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6화 (36/40)

〈 36화 〉 마탑 방어전(2)

* * *

“허억, 허억.”

낯선 천장이었다.

“악몽…이었나.”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정신을 차린 뒤 주변을 둘러보니, 푹신푹신한 침대, 고풍스러운 장식들이 보였다. 조금 전에 연못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싶은 의문이 들었다.

“정신을 잃었었나 보네.”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의 얼굴이었다. 아마 그가 정신을 잃은 나를 옮겨 준 거겠지. 그렇다면 여기가 어디인지도 바로 정답이 나온다. 아마 마탑 안의 방일 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방금 꿨던 악몽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미 죽어버린 아리아, 그리고 변해 버린 메리엘이 꿈에 나왔다. 성녀 아리아가 언데드라니…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현재 그녀는 그 숭고한 희생을 인정받아, 제대로 영웅 대접을 받아 역대 용사 파티원들의 무덤에 같이 묻혀 있다.

그저 끔찍한 악몽일 뿐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다. 아리아의 죽음, 혼수상태인 용사만으로 충분히 힘들었는데 다크 엘프로 타락해 버린 메리엘까지. 물론 그녀의 자의인지 마왕의 계략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받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이그니스와 아쿠아라도 만나서 다행이지, 정령들도 만나지 못했다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징징댈 때가 아니었다. 현재 나는 마왕군의 간부 중 하나인 흑마법사 리치가 마탑을 공격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온 상황이다. 마법 면역을 둘둘 두르고 있는 리치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령사, 확실히 도움이 될 터였다.

나는 힘들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그니스도, 아르마도, 아쿠아도 깊이 잠수하며 화염 갑옷을 만드는 데 마나를 많이 소비했던 모양인지, 말도 없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료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일단 그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겠지.

방문을 열고 나오니 바로 오른쪽에 계단이 보였다. 여기서 올라가야 하는지, 내려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뒤쪽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구, 정령사님. 깨어나셨군요. 지금 동료분들과 크리스 님, 그리고 랜서스 님이 1층에서 리치 공략 회의를 하는 중이십니다. 어서 내려가 보시지요.”

뚱뚱한 남자 마법사, 분명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뭐였더라…?

“아, 게르혼 님, 감사합니다. 저도 어서 내려가 보지요.”

힘들게 이름을 기억해내 감사 인사를 한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보니 1층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은 동료들이 보였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크리스, 그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무명. 관심 없다는 듯이 테이블 앞에 앉지도 않은 줄리아, 죄다 제각각인 인간들이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 로헨 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마수 조련사, 줄리아였다. 공략 회의에 집중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어서 제일 빨리 발견한 거겠지.

“어, 음. 로헨 님까지 오셨으니 얘기가 빠르겠군요. 앉으시죠, 방금 막 시작한 참입니다.”

크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사악한 흑마법사, 리치를 쓰러트릴 계획을 짜야 할 때였다. 크리스가 자신이 준비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중대한 문제는 리치가 두른 마법 방어막입니다. 이 해골바가지가 저희 탑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은 게 이 마법 방어막 덕분이죠.”

“제 기억으로는 마왕급의 방어막은 아니었어요. 마왕은 정령술을 포함해서 마력으로 된 모든 것을 막아냈는데, 리치는 마법 종류의 공격만 막아낼 수 있었죠.”

리치의 마법 방어막은 온전히 대(?) 마법사용이었다. 마왕의 방어막보다 질적으로는 훨씬 낮지만, 자신의 수하들에게 전부 둘러줄 수 있다는 점이 곤란한 부분이었다. 소위 질보다 양이라고 하나.

하지만 정령술은 그 방어막에 무효화되지 않는다. 말장난 같지만 이게 가능한 걸 보면, 리치의 방어막이 오로지 마법사만을 막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있던 용사 파티에서는 리치에게 져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성검을 가진 용사, 성녀 아리아, 고귀한 자연의 기운을 가진 엘프, 그리고 유사 마법을 쓰면서 방어막에는 막히지 않는 정령사. 상성 상 너무 리치에게 유리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용사도 없고, 성녀도 없고, 엘프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뿐.

“그래서 로헨 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리치의 마법 방어막이 정령술에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병력의 언데드 군대를 로헨 님 혼자서 해치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죠. 제 마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마법 방어막을 뚫는 걸 목표로 합니다.”

리치의 마법 방어막이 진정 무서운 점은 질보다 양이라는 것. 그의 언데드 군대 모든 개체에 하나하나 마법 방어막을 입힌 그의 집착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걸 간파한 크리스는 애초에 정령술로 언데드들을 죽이는 계획을 짜지 않았다. 그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계획이었다.

100만큼의 마나를 써서 10마리한테 10씩의 마나를 쓴 정령술 공격을 퍼부으면, 10마리가 확실히 죽는다. 하지만 100만큼의 마나를 써서 100마리에게 1씩의 마나를 쓴다면, 죽이지는 못하지만 마법 보호막만은 깰 수 있다.

“그렇게 로헨 님이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서 마법 보호막을 제거하면, 그때 저희 마법사들이 전력 지원을 나섭니다.”

“아쿠아를 이용해 전장을 물바다로 만들어 마법 방어막을 깨는 게 좋겠네요.”

정령술을 통한 광역 공격으로 적의 보호막을 깨고, 화력으로만 따지면 그 어떤 집단보다 뛰어날 마법사 집단이 총공세를 퍼붓는 것이다.

“저희뿐만 아니라 마수 조련사, 당신도 하늘에서 온갖 공격을 퍼부을 겁니다. 마수 군대로 언데드 군대를 깨부수는 거죠.”

크리스의 말에 줄리아의 의지가 불타올랐던 건지,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실패한 임무를 이어받은 게 리치다. 그런데 리치가 만약 마탑을 침공한다는 임무를 성공시킨다? 그녀의 자존심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큰 충격이 될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애초에 자신을 제외한 마왕군 간부들을 전부 싫어했으니 동기부여가 될 법도 했다.

“근데, 리치가 라이프 베슬이 있는 건 알지? 그거 부수는 거 아니면 리치는 몇 번이라도 다시 도전해 올 거야.”

줄리아가 지적한 부분은 나 역시 한때 걱정했었던 내용이다. 내가 평생 마탑에서 살 수도 없고, 라이프 베슬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리치는 몇 번,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이라도 다시 마탑을 침략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무명 스승님이 오신 거야.”

“……?”

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도 하다. 그녀는 무명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가 언데드와 흑마법사 사이의 연결 자체를 끊어 버리는 모습을 말이다.

“확실히 라이프 베슬이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몰라. 아마 리치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겠지. 마왕은 알려나, 그래도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수는 없어.”

용사 파티가 멀쩡했을 때, 우리는 리치와 싸운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리치는 용사의 성검에 베였다. 그러나 리치는 죽지 않고 계속 돌아왔다. 그 망할 놈의 라이프 베슬을 깨부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성검에 의해 정화될 거라 생각했는데, 리치 같은 최고위 언데드들은 어떻게든 저항하는 모양이었다.

“무명 스승님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거든.”

“아마 가능할 것 같다. 꼭꼭 숨겨 둔 라이프 베슬과 본 주인인 리치와의 연결 자체를 끊어 버리는 참격이라, 불가능하지는 않아.”

언제나 믿음이 가는 목소리였다. ‘아마’라고는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연결이라는 개념 자체를 끊어 버리는 검격, 그것이 천 년 산 불멸자 무명의 검술이었다.

내 공격으로 마법 보호막을 깨부수고, 마법사들과 마수 조련사가 총공격을 감행해 언데드 군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후, 무명이 직접 라이프 베슬을 무시하는 일격을 날려 리치를 죽인다.

하지만 이 계획을 진행함과 동시에 나에게는 다른 역할도 있었다.

‘메리엘이 있는지 찾아봐야 해.’

줄리아의 말에 따르면 메리엘은 마왕군 간부를 감시하는 겸, 지원하는 겸 파견된다고 한다. 정말 왔을지도 모르고, 왔다 하더라도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타락했든 말든 상관없다. 신전의 신성력으로 정화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여태까지 내 여체화 저주를 제외한 모든 사악한 저주를 해제해 왔다. 분명 메리엘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계획이 무사히 성공하기를, 그리고 메리엘을 만날 수 있기를.

***

“준비가 끝…나가는군….”

한편, 마탑 주위의 드넓은 평야를 지나서 더 멀리 가 보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온통 칠흑으로 물들어 있는 울창한 숲이 나온다. 그 숲에 숨어서 마탑을 침공할 준비를 거의 다 마친 흑마법사, 리치의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저…암컷 엘프년은 왜 나를…검귀한테나 갈 것이지….”

마왕이 그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다크 엘프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총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더욱 시간을 끌며 임무를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마법 연구에 몰두할 텐데, 저 여자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

마왕의 종복인 그였지만, 이곳은 온갖 마법사들로 가득한 마탑. 재능 넘치는 마법사들을 한 명씩 잡아와서 모든 마법 지식을 흡수하려 했다. 그리하여 더 위대한 흑마법사, 더 위대한 리치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막상 그 계략을 실행하자니 눈치가 보였다.

“…….”

자신이 딴청을 부리는 티만 보이면, 그녀는 어느새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마왕님의 전언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공간 이동도 할 줄 모르는 엘프 따위가 속도는 왜 저리 빠른지, 리치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최고급…재료를 가지고…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갖다 버리는…꼴이로군….”

마법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리치가 이 임무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불만은커녕, 마왕님이 자신에게 이 임무를 맡겨 주신 것이 감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리치가 되고, 마법 보호막을 설계하고, 마왕의 밑에 들어간 것까지 전부 가증스러운 마법사들을 죽이고, 마탑을 붕괴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끝을…맞이해라…. 나의…후배들이여….”

덜그럭, 덜그럭거리는 해골들 사이에서 리치가 턱이 빠질 듯이 킬킬 웃어댔다. 길고 길었던 원한의 마침표를 찍을 복수의 기회, 역대 최강의 마법사가 될 기회. 그 모든 가능성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법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

그리고, 흑갈색 피부의 엘프는 말없이 마탑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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