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5화 (35/40)

〈 35화 〉 마탑 방어전(1)

* * *

전투 중에다치거나 상처를 입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늘 말끔하게 회복시켜준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상급 물의 정령 아쿠아, 그녀가 있으면 항상 든든했다.

어머니든, 아버지든…가족이라고는 정령들밖에 없었던 나에게 가장 ‘어머니’ 같았던 존재가 그녀였다. 이그니스는 짜증 나는 누나 정도의 포지션이었고, 아르마는…애완동물 같은 느낌?

하지만, 이제 고작 둘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상급 정령의 수는 수십 이상. 그들과 전부 만나려면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직접 정령계에 쳐들어가서 정령들을 다 구해오지 않는 이상, 그들과 빨리 만날 수 있는 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령계에 갈 방법은 없겠지.”

《물론, 어떻게 진입하는 방법을 찾아도 인간의 몸으로는 정령계에서 살아서 버티기 힘들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봐도 정령계에 침입했던 인간은 극소수였다. 공간을 왜곡시키거나, 신비한 마법을 사용해 정령계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었지만 살아서 빠져나온 인간은 0명이라고 단언해도 될 정도였다.

푸하, 수면 위로 올라온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물에서 빠져나온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은발 머리카락,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형의 청년. 크리스 베네피쿠스였다.

“무사하십니까?”

그가 건넨 말에 멀쩡하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시야가 흐리고, 아쿠아를 안은 팔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고작 잠수 한번 했다고 이렇게 탈진해버린 건가?

아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부정했다. 깊은 심해 속은 인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게다가 이미 계약 단절된 정령과 재계약을 맺었으니 굉장한 피로가 몰려온 것 같다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계약 단절됐던 정령과 재계약하는 것이 굉장한 피로를 가져온다는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이그니스와 재계약을 맺을 때도 굉장히 피로해졌는데, 그때는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이번에 두 번째 재계약을 시도해 보니 확실히 재계약에는 체력이 많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네, 일단 아쿠아 좀 받아 주실래요…?”

아쿠아를 든 손이 시리고 아파서 크리스에게 넘겨주려 한 순간, 아쿠아의 몸에서 빛이 나며 실체화가 해제됐다. 이제 그녀는 편안하게 휴식하며 다시 깨어날 때까지 내 마나를 흡수할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고작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돌아갑시다.”

크리스가 그의 오른손을 내밀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다시 마탑 안으로 들어가서 리치를 대비한 전략을 짜야겠지. 방금 힘들게 일을 하나 처리했는데 또다시, 쉴 시간도 없이….

눈앞이 흐려졌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괜찮을지 모르겠네.’

로헨이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크리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뛰어난 정령사라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의 이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이 본 것만 믿는 성격, 크리스의 시선에서 로헨은 연약한 소녀일 뿐이었다.

로헨을 처음 봤을 때, 크리스는 경악했었다. 별다른 관리 없이 길게 늘어뜨린 푸른빛 머리카락, 수도에서 보이는 여자들이 죄다 머리를 꾸미고 화려한 장식을 달고 다니는 것과 달리, 수수해 보이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지닌 소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 소녀의 깊은 푸른빛 눈동자에 빠져들어 갈 때쯤, 크리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상대의 복색을 살펴보았다.

‘로브, 여성스러운 면이 부족한 몸짓, 나 다음에 알현실에 들를 인간이라면….’

자신 다음에 알현실에 들러 국왕을 알현할 인간이라, 방금 직접 얘기를 들었던 로헨이라는 정령사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 추측에는 확신이 필요했다. 로헨은 분명 남자라고 들었는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녀는 여자라는 점만 빼면 로헨임이 확실했다.

크리스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자신의 시각은 이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굴곡 있는 몸매는 분명 여성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은은히 풍겨 나오는 달콤한 여인의 향기가 그 확신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크리스는 눈앞의 로헨이 여성이라고 확정 짓고, 자신이 주로 여성을 유혹할 때 쓰는 기술을 사용하였다. 장소는 왕궁, 상대는 자존심 높은 용사 파티의 정령술사. 때도, 장소도, 상대도 좋지 않았지만 크리스 베네피쿠스는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는 사내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나의 사랑을 받는 마법사, 대마법사들이 총공격을 감행해도 뚫어내지 못했던 마수 조련사의 인조 골렘을 뚫어버린 역대 최강의 마법사인 크리스 베네피쿠스는 자신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여성을 유혹하는 데도 그는 많은 경험이 있었다. 사실은 대부분의 여성이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귀족이라고 판단해서 몸과 마음을 줬던 것이지만 크리스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냥 여자들은 전부 쉽고, 즐거운 유흥거리라고 생각했을 뿐.

그래서, 자신감 넘치는 젊은 남성 마법사는 매력을 느낀 상대에게 바로 스킨십을 감행했다. 어깨를 살짝 터치한 이후, 손을 내려 그녀의 탄력 넘쳐 보이는 엉덩이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탄탄하지는 않고 말랑말랑한 촉감에, 여성의 몸을 많이 만져 본 크리스는 눈앞의 여성이 운동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로헨은 전투 훈련도 열심히 하던 남자였지만, 여성으로 변하고 나서 그 단련된 육체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눈앞의 소녀는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자신은 원래 남자였고, 저주에 걸려 여자가 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그 이야기는 크리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가 남자였던 시절의 외관은 알지도 못하고, 크리스는 단지 눈앞의 여성이 매력적이어서 구애하고 있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 처음에는 이렇지. 후, 함락당할 때가 기대되는군.’

그렇게 생각한 크리스는 여러 가지 계획을 실행했다. 그녀의 마을에 가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성들에게 고백해 그녀의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계획도 시도했고, 여성들에게 잘 먹히는 달달한 멘트를 준비해서 그걸로 공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마치 철옹성을 연상케 하는 극강의 철벽이었다.

로헨을 기다리던 크리스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그녀가 나오지 않자, 호수의 물을 아예 다 들어서 찾아볼까도 고민했다. 이 물이 정령의 마력이 담긴 물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마력이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그는 자신이 있었다.

고작 수면에 손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 깊은 물 속에서 잠들어 있는 정령을 찾는 것은 일반 마법사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뿐인가, 지고한 대마법사들도 몇 분에서 몇십 분은 걸릴지도 모른다. 이 호수의 물에는 텔레포트 방지 마법, 정령의 마력이 담겨 있어 더욱 추적이 어려웠다.

그러니, 깊은 곳에 있는 물의 정령을 바로 찾아낸 것은 오로지 크리스의 상상을 초월한 마법 능력 때문임이 확실했다. 로헨은 그 정도로 크리스가 사기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그 말이 그저 허풍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본인이 전문가라고 해서 보냈는데,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어쩌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연약한 아녀자인데 같이 잠수해 주었어야 했던 건가.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 드디어 그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무사하십니까?”

그렇게 말을 건넨 크리스는 곧바로 후회했다. 한눈에 봐도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장 마탑 안으로 돌아가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내가 같이 내려갔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크리스는 자신의 감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는 그에게 그저 유흥일 뿐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재미를 추구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거나 욕정을 느꼈던 적은 있어도 걱정이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로헨의 몸과 정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로헨의 품에는 그녀와 살짝 닮은 푸른빛 머리칼에, 푸른빛 눈동자를 가진 성숙미 넘치는 여인이 안겨 있었다. 평소의 크리스였다면 아무리 정령이라지만 살짝 눈독 들였을 여자였을 텐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전혀 시선이 가지 않았다.

“돌아갑시다.”

급하게 손을 내밀었고, 마탑으로 들어가기 위해 순간이동을 쓰려는 찰나 로헨은 정신을 잃고 크리스의 어깨에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를 기댔다.

바로 들어가서 그녀를 눕히고 휴식을 취하게 해 주고 싶었던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는 로헨을 보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조금씩 부풀고, 작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들어가는 가슴. 그리고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살짝살짝 떨리는 눈꺼풀. 발그레한 볼, 옷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하얀 살결 등 모든 것이 크리스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려 하기에, 손가락을 갖다 대 조금 옆으로 치워 주었다. 그러고 나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었다.

“조금이라면, 괜찮겠지.”

몸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조금 쓰다듬는 것뿐이다. 크리스 자신도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녀의 몸을 만진다든지 그런 추악한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다.

“으응…안 돼….”

그렇게 쓰다듬을지 말지 격렬하게 고뇌하던 도중, 로헨이 잠결에 크리스의 품 안에 얼굴을 폭, 하고 묻었다. 정말 안 좋은 꿈을 꾸는 건지 걱정됐다.

“에이, 모르겠다. 지금 말고 언제 해보겠어.”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슬퍼서 결국 손을 갖다 대어 머리를 가볍게 쓰윽, 쓰윽 쓰다듬었다. 그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로헨의 표정이 조금 괜찮아져서 마음이 놓였다.

크리스 베네피쿠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처음 겪는 짝사랑에 빠져 있었다.

***

한편, 로헨이 꾸고 있는 꿈은 무엇이었느냐.

“아리아.”

이미 죽어버린 성녀, 아리아가 사악한 리치에 의해 해골로 되살아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살아 있을 적 그녀의 총기 어린 눈빛과 매끄러운 피부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깊고 예쁜 눈이 있을 장소에는 텅 빈 구멍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덜그럭,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에게 기어 왔다.

“오지 마, 오지 마!”

전력을 다해서 도망쳐 온 곳에는 뾰족한 귀와 흑갈색 피부를 지닌 여성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지만, 몇 년 동안 함께했던 동료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메리엘?”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은 비참할 정도로 매정했다. 그녀가 활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고, 날카로운 화살이 빛의 속도로 내게 달려왔다.

푹, 소리가 아니라 휙, 소리가 들렸다.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누르는 느낌이 들면서 떨리는 다리가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화살은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곳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 압력이 조금은 기분 나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화살을 쏜 다크 엘프, 메리엘도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기어 오는 해골 성녀, 아리아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 이후로 가족 같았던 정령들이 실체화한 모습이 하나씩 순서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침내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남았다.

그저 어둠만, 오로지 어둠만이 나를 감쌌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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