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16화 (16/40)

〈 16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4)

* * *

“어?”

“너희들이 왜 여기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두 명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둘이 루시엘과 리안나였다는 사실이다.

“라헬 님이 제 룸메이트셨군요!”

리안나가 밝게 웃었다. 다행히 내 룸메이트가 개학 전날 집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밖에서 노는 무서운 양아치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데, 루시엘은 왜 같이 온 건가요?”

“배고픈데 리안나가 저녁 해준다 해서… 헤헤.”

여태까지 둘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이제 막 저녁을 먹으려는데, 그 장소를 리안나의 집으로 잡았던 것 같다. 근데…

“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엄청 민폐 아닌가요… 이거.”

“네?”

리안나는 겁먹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룸메이트한테 말없이 자기 친구를 방에 데려오는 건 배려가 없는 거잖아. 심지어 오늘은 학기 첫날이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루시엘과 리안나의 목소리가 서글퍼졌다.

“넘어가고, 저녁밥 할 거면 저도 같이 먹죠.”

“네?”

“저도 배고팠거든요.”

안 그래도 저녁때였는데 노력 없이 밥을 얻어먹을 좋은 기회였다.

“그럼 초대한 제가 대접해 드려야죠.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아니에요, 저도 도울게요!”

둘 다 서로 자신이 요리하겠다며 나섰다.

그런 둘의 모습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한 채로 누워서 구경하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라헬 님! 제가 고기도 준비했어요!”

아까 낮에 풀떼기밖에 없던 점심을 먹고 내가 몹시 실망한 것이 신경이 쓰였는지 루시엘이 고기반찬을 준비해 온 모양이다.

“근데 리안나, 어제는 왜 안 들어온 건가요?”

“저 어제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서… 기숙사 들어와서 씻기만 하고 다시 나왔어요.”

“그런데도 학교에서 멀쩡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안 졸은 거죠…?”

그렇게 웃고 떠들며 즐기던 사이,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그래서 제가….”

­쿵!

“잠깐, 루시엘.”

“네?”

­쿵!

“이게 무슨 소리지?”

여기는 기숙사 거의 꼭대기 층이다. 그런데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듯한 쿵쿵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글쎄요. 굳이 신경 쓸 문제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최근에 이상한 일이 많아서.”

“으음, 그럼 잠깐만 내려갔다 와 볼까요?”

­쿵쿵, 쿵쿵.

내려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우리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다른 학생들도 우르르 내려가고 있었다.

­쿵! 쿵!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어요. 그냥 한번 보러….”

루시엘, 리안나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가며 주변 학생들한테 물어봤지만, 다들 어떤 사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했다.

“꺄아아악!”

“괴물이다!”

엘프 마을은 신비한 마법에 걸려 있어 허가받지 않은 인물은 들어오지 못한다.

게다가 엘프 학교, 엘피디언 아카데미 주위는 강력한 마법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웬만한 마수들은 침범하지도 못해 학생들의 안전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마수는 무엇인가.

코뿔소를 닮은 외형.

하지만 그것의 뿔은 일반 코뿔소의 몇 배는 되는 크기였다.

결정적으로, 뿔 주변의 화염이 이글댄다.

화염코뿔소. 크게 위압감은 없는 이름이지만 나름 중급 마수 중에서 중위권 정도는 하는 녀석이다.

마을에 쳐들어온 언데드들이 단일 개체로는 하급 마수 중에서도 하위권인 것을 생각하면 꽤 강한 녀석이다. 언데드들은 그 수가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쿵!

그 화염코뿔소가 마법 방어막, 아카데미의 결계를 그 뿔로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결계를 부수려는 듯이 돌진하는 녀석.

“저 정도로는 안 뚫려요! 얼마나 튼튼한 결계인데.”

루시엘이 나름 선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냐. 이건 위험해.”

“네? 그치만 화염코뿔소는 중급 마수잖아요. 상급 마수가 와야 뚫을까 말까 한 게 엘프들의 결계라고요?”

“저 녀석은 평범한 화염코뿔소가 아니야.”

전장에서 오래 굴렀던 경험이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일반적인 화염코뿔소보다 1.5배는 더 컸고, 뿔은 2배 정도 더 컸다.

그리고 그 뿔에 두른 화염의 열기로 보나, 돌진하는 위압감으로 보나 단순히 중급 마수라고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그때 그 뱀이 중급 마수 중 상위권… 이려나.”

티론을 구하러 갔다가 동굴에서 만난 거대 뱀. 그런 마수는 처음 봤지만 상급 마수 정도는 아니었고, 중급 마수 중 상위권이라고 볼 만했다.

그런데 지금 내 감이 그때의 뱀보다 눈앞의 화염코뿔소가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뭔가에 의해서 강화됐거나, 돌연변이 개체. 그것이 제일 타당해 보이는 답변이었다.

강화된 마수라… 설마.

“뭔지 아시나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루시엘, 빨리 선생님들 불러와.”

“네, 넵!”

­쾅! 쾅! 쾅!

코뿔소가 결계를 들이받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지치지도 않는 듯하다.

“야, 저거 뭐야?”

“선생님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딴 애가 부르러 간 것 같은데. 근데 애초에 뚫리겠냐?”

“화염코뿔소는 그렇게 무서운 녀석은 아냐.”

“나 여기 10년 다녔는데 안 뚫려. 괜찮아.”

반면 다른 학생들은 저 마수의 위험성을 아직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듯하다. 내가 나서서 처치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아르마(?)를 꺼내야 한다.

그럼 일반적인 학생이라는 신분은 사라지는데… 그리고 이렇게 많은 학생들 앞에서 상급 정령사, 혹은 다중 속성 계약자로 알려지면 여러 가지로 이슈가 될 게 뻔했다.

“선생님이 올 때까지 버텨야겠어요. 리안나, 가능한가요?”

“제가요…? 할 수는 있지만 여기는 기숙사인데 맘대로 정령을 소환해도 될까요?”

모범생인 그녀답게 허가 없이 정령술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듯했다.

“괜찮아요. 위급 상황인데요, 뭐. 혹시라도 결계가 깨지면 바로 쓸 수 있게 준비만 해 놓죠.”

근데 어떤 정령을 써야 할지 고민이다. 상대가 화염인 만큼 물의 정령과 무기의 정령, 아르마를 혼합해서 막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눈의 정령뿐.

“마수 한 마리 처리용으로는 그리 효율이 좋지 않은데….”

“에클레어(?).”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리안나는 미리 영창해 전기의 중급 정령, 에클레어를 소환해 놓았다. 녀석이 결계를 깨고 들어오는 순간 낙뢰가 빗발칠 것이다.

­쿵!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쿵!

이제 곧 온다. 학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쿵!

“다들, 도망치세요! 빨리!”

내가 소리쳤다.

­쿵!

“뭐야, 쟤 누군데?”

“오늘 눈 내리게 한 애가 쟤 아냐?”

“A반 수석이라던데?”

“그럼 사실상 학생 중에 정령술은 제일 뛰어난 거 아냐?”

­쿵!!

“빨리 도망치세요!!”

­쿠르르릉!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화염코뿔소의 돌진이 강해지자, 학생들도 두려웠는지 다들 결계로부터 거리를 뒀다.

대부분 정령술을 쓸 수 있겠지만, 우리를 돕지 않았다.

아까의 리안나처럼 그들 역시 정령술을 마음대로 써도 될지에 대한 판단이 다들 안 선 듯하다.

“스노위(雪).”

아까처럼 기상 마법을 쓰는 것은 1대1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눈덩이를 던져 움직임을 멈추는 정도면 충분하겠지.

마침내,

­쨍그랑!

“에클레어(?), 내리쳐라!”

“스노위(雪), 얼려버려.”

단순히 얼리는 빙결 계통의 효과는 눈 정령보다는 얼음 정령 쪽이 더 효과가 좋다. 그도 그럴 게, 얼려 버리는 것과 눈덩이를 던져 얼어붙게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소리없이 내려친 번개가 화염코뿔소에 직격했다. 그 위력과 마비 효과는 확실했다. 역시 리안나는 중급 정령사들 중 최상위권이라고 할 만했다.

“쿠오오오!”

특별히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전기 계통의 정령인 만큼, 중급이라도 그 위력만은 일부 상급 정령을 약간이나마 상회할 정도였다.

“크오오오오!”

낙뢰를 맞고 마비된 것인지 화염코뿔소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비되어 있는 동안 얼려야 했다.

“이얍! 하앗!”

나는 힘차게 기합을 지르며 셀 수 없이 많은 눈덩이를 녀석에게 날렸다. 눈덩이 폭격은 그 추진력만으로 매우 강했지만, 큰 타격 없이 하나하나 녀석의 발밑에 쌓여 천천히 얼어붙고 있었다.

“크, 오오.”

마비에서 벌써 회복된 녀석이 돌진하려던 순간, 눈에 묻힌 채로 얼어붙어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리안나! 계속 낙뢰를!”

낙뢰가 떨어지면 그 충격에 내 얼음들은 산산이 조각나지만, 그 마비와 빙결을 번갈아 가며 공격해 화염코뿔소를 저지해야 했다.

“엘리오르(?)!”

“스노위(雪)!”

“쿠오오오오!”

이놈의 선생이란 작자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걸까.

“엘리오르(?)!”

“스노위(雪)!”

“그워어어어!”

조금씩 지쳐가는 녀석. 선생이 오지 않아도 몇 번만 더 하면…

“하아, 하아… 라헬, 저 조금 힘들어서….”

“리안나? 리안나?!”

낙뢰를 여러 번 쓴 리안나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강한 위력을 가진 만큼 그 리스크가 큰 모양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계약자, 이제 방법이 없다.》

“아르마…? 하지만, 으으….”

《계약자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뒤에 있는 학생들을 봐라.》

그 말대로였다. 내 이기심 때문에 이곳이 뚫리고 뒤의 학생들이 당한다면… 나는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크윽. 아르마…!”

그때였다.

“운디네(?)!”

“실프(風)!”

“나이아스(?)!”

“쿠오오오!”

녀석의 뿔을 조준한 물대포들이 쏟아졌다.

“저도, 힘을 보탤게요!”

“여기는 엘프 학교다. 인간에게 맡겨만 둘 수는 없지!”

“저는 하급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학생중 몇몇이 드디어 나섰다.

“좋았어!”

화염코뿔소는 물에 제일 약하다. 특히 그 코의 뿔을 조준해 물을 쏟는다면 잠시 동안 매우 약화된다. 물 정령사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다해 줬다.

또한 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걸 바람 정령사들이 강풍으로 밀어낸다.

“스노위(雪).”

온몸이 물로 흠뻑 젖어 있다면, 얼어붙기는 더 쉬워진다. 바람 정령과 그 힘이 보태져 눈 폭풍이 화염코뿔소를 덮쳤다.

“크, 억, 어억….”

“데려왔어요! 라헬 님!”

“무슨 일인가? 아니, 이게 무슨!”

하, 다 끝나고야 오셨군. 아까 낮의 정령술 선생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백발의 노인.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엘프였다.

이미 화염코뿔소는 얼어붙어 거의 괴사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윌(光)!”

하필 데려와도 전투에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엘프였다. 빛의 정령은 극한으로 수련해 열선을 쏠 수 있지 않은 이상… 아니, 그냥 나 이외에는 전투용으로 쓰는 사람이 없었다.

빛나는 인형 모양의 정령, 윌(光)이 코뿔소에 가까이 다가가 생사를 확인했다.

“휴, 이미 죽었군. 정말 다행이야.”

“선생님! 어째서 결계가…?”

“선생님, 학생이 쓰러졌습니다! 저기 여자애가…”

쏟아지는 질문에 상급 빛의 정령사, 선생이라는 인간도 혼미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한 번도 깨진 적 없던 결계가 깨졌으니 당황스럽겠지.

“혼란스러운 것은 알지만, 일단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다들 들어가고… 이 사안에 대해서는 여왕님 및 다른 선생님들과도 얘기를 나눌 테니 안심하고 일단 주무십시오. 병사들을 불러 경계도 강화하겠습니다.”

그래도 꽤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프로다웠다.

“라헬 님… 내일 봐요.”

아까 결계가 뚫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루시엘은 많이 착잡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리안나?”

쓰러진 리안나는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니 바로 회복됐다. 능력을 단기간에 살짝 무리하게 쓴 것 외에는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네… 일단은….”

“업힐래요?”

“아니에요! 혼자 걸을 수 있… 꺄악!”

억지로 혼자 일어서려던 리안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죄송해요. 조금만 도움을….”

“물론이죠.”

나는 리안나를 업고 기숙사 방까지 올라갔다.

“빨리 주무세요. 내일 일어나서 봐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암. 라헬 님….”

나는 리안나를 눕히고 그녀 방의 불을 끄고 나왔다.

그나저나, 요즘은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변방 마을의 네크로맨서… 여기까지는 그럴 만했다. 하지만 광산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 뱀이라던지, 뚫린 적 없던 엘피디언 아카데미의 결계가 갑자기 강화된 마수에 의해 박살 난다든지.

“아마도 이게 다….”

마왕에게 용사 파티가 패배해서 생긴 일이 아닐까.

상대편의 강력한 전력이 사라져서 균형이 점점 기울어진 나머지, 마왕을 비롯한 악의 무리가 날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 * *

­쾅쾅쾅!

“으아아악!”

설마 또 결계를 누가 두드렸나 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비명 지르면서 깨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누군가 노크를 한 것뿐이었다.

…살짝 쪽팔렸다.

“누구시죠?”

리안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노크한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여왕님의 명입니다!”

리안나가 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제가 나가 볼게요.”

­끼익.

“무슨 일이시죠?”

또 처음 보는 엘프였다. 누구를 데리러 온 건가?

“정령사 라헬 피스본, 여왕님이 호출하셨습니다. 잠시 따라와 주시죠.”

“여왕님?! …알겠습니다.”

“네에?! 여, 여왕님…?”

리안나는 나보다 더 놀란 듯이 그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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