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3)
* * *
‘성능 확실하구만.’
눈의 정령 스노위가 내 기대 이상으로 더 훌륭한 성과를 내줘서 나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다.
“라헬 님, 역시 대단하세요!”
루시엘은 내 테스트를 본 이후로 두 손을 깍지 낀 상태로 계속 대단하다고 연달아서 감탄만 하고 있다.
“알았으니까 그만, 민망해.”
“넵! 근데 어떻게 스노위의 위력이 그렇게 강할 수가 있나요?”
정령 개체의 강함은 전적으로 정령사의 역량에 따른다.
하지만 정령사와 정령이 친밀할수록 위력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그런 방면에서 보면 내가 스노위와 계약한 건 고작 며칠 전. 벌써 친밀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내 기질은 그것마저도 능가한다.
「후, 드디어 찾았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특이한 정령들을 찾아다녔다.
눈의 정령은 겨울이라면 사실 그렇게 보기 힘든 정령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계절에 스노위를 찾으려면 눈으로 덮인 산꼭대기까지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모두가 감탄하는 광경을 자아내기 위하여 벨크 마을 주위의 그 높은 산에 올라 스노위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러나 계약한 직후에 바로 테스트를 봤다면 이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특유의 정령 친화력이 고작 그 며칠 동안에 친밀도를 극대화한 결과였다.
“후후.”
학생들과 선생님의 반응이 내 생각보다 더 재밌어서 즐거웠다.
아, 그리고 그 전기 정령을 쓰던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을 보자 더 뿌듯했다. 내가 성격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런 승부욕을 가지면 더 열심히 하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루시엘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수업은 뭐야?”
“정령술의 역사요!”
음, 잠 좀 자야겠다.
* * *
“하~암.”
“주무셨어요?”
“으응. 점심시간이야?”
“네! 급식 드실래요? 아니면 저기, 기숙사에서 제가 요리라도?”
딱히 준비해온 도시락도 없으니 급식도 나쁘지 않겠지.
“그냥 급식 먹자.”
“좋아요! 급식실은 2층으로 가서….”
“저기, 라헬… 님?”
급식실로 가던 도중,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아까 그 금발의 전기 정령사, 리안나가 있었다. 그녀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네? 어쩐 일로….”
“아까 그… 정령술, 대단하시더라고요.”
수줍게 말을 건네오는 그녀를 보자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혹시, 같이 점심 드실래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럼, 좋아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한편, 엘프 두 명과 함께 급식실로 온 나는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엘프들의 요리 문화를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풀떼기, 야채, 과일…
잠시 리안나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면서 나간 사이, 그녀의 잘못은 없지만 괜히 루시엘에게 반찬 투정을 했다.
“하아, 이걸 누구 코에 붙여.”
우리 동네에서 맨날 고기반찬과 맛있는 음식들을 먹던 내게 건강식 위주인 엘프 급식은 상당히 곤욕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빨리 제 기숙사로 가실까요?! 제가 요리를…!”
“다음에 갈게. 점심시간도 별로 안 남았고.”
여자아이 방에 가서 요리 얻어먹는 상황은 분명히 20살 남자(정신)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루시엘은 티론과 똑같이 그냥 동생일 뿐이다.
“루시엘, 너 나이가 얼마였지?”
“저 올해로 54살입니다!”
“그렇군…요.”
동생은 아닌 듯싶다. 근데 동생 같아. 왜지? 메리엘 님은 분명 누나 같은 분위기였는데…
“엘프들은 나이에 크게 신경 안 써? 우리 반이 다 같은 나이는 아닐 거 아냐.”
엘프는 외모로 나이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내 옆 짝이 30살일지 130살일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음… 그래서 대부분은 그냥 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 풍조죠. 저도 사실 저보다 한참 어린 라헬 님께 반말해도 되는 건데, 존댓말이 습관이 됐거든요.”
“그럼 나도 존댓말 할까…요?”
루시엘이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라헬 님은 저 같은 애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신데…”
“그럼 그냥 반말 써도 되겠지?”
“당연하죠!”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얘한테는 쭉 반말 해도 되겠다.
“리안나! 여기로 와요!”
멀리서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는 리안나를 존댓말로 불렀다. 아무래도 다들 학기 첫날이라서 그런지, 친구가 고픈 모양이다.
“저만 두고 가신 줄 알았어요….”
리안나 특유의 졸린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리안나는 아카데미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저는 이번 학기가 처음….”
“정말요? 저도 처음인데!”
아무래도 나와 리안나는 엘피디언 아카데미 입학 동기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루시엘은 언제 입학한 거지?
“루시엘, 너는 언제 입학했어?”
“저는… 우물우물, 올해가 2년째죠.”
“다 먹고 말해라.”
“네에~”
나만 반말하고 루시엘은 내게 존댓말을 하는 관계에 리안나가 의구심을 갖는 것 같았지만, 딱히 이유를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2년이라, 너도 오래 다닌 건 아니었구나.”
“그렇죠. 길게는 몇십 년을 다니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럼 넌 입학 첫해에 중급반 수석을 먹은 거야?”
생각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었잖아? 맨날 애 같은 모습만 보였는데, 학교 안에서 보니까 의외의 모습도 있었다.
“맞아요. 그치만 올해는 못 할 것 같네요….”
루시엘이 갑자기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또 열등감 병이 도진 건가?
“왜? 할 수 있어!”
“그쪽 두 분이 계시는데 정령술에서 수석을 어떻게 먹어요.”
나는 어차피 자퇴할 거니까 배제하고, 확실히 중급 정령술 A반 중에서는 리안나와 루시엘이 1, 2등을 겨룰 실력이었다. 두 정령사의 위력은 비슷하지만, 정령의 희귀도에서 리안나가 살짝 우세인 느낌? 하지만 이 정도는 언제나 역전 가능한 차이다.
“다들 열심히 해야죠.”
리안나가 우리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눈치를 보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까 내 정령술을 보고 승부욕에 부들부들 떨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아서 신기하게 느껴졌다.
“리안나도 기숙사에 살아요?”
문득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학생은 다 기숙사에 사나?
“네. 나중에 구경 오세요.”
“물론이죠. 제 기숙사에도 놀러 오세요. 별 건 없지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룸메이트는 대체 누구인데 그렇게 밤늦게 들어와서 나보다 빨리 나간 걸까?
아니, 어쩌면 그냥 밤새 안 들어온 거 아니야?
비싼 방을 쓰는 걸로 보아 학기 전날에 친구들과 파티라도 벌이는 귀족 엘프 양아치녀가 아닌지 살짝 걱정됐다.
“저도 기숙사니까 놀러 오세요! 오시면 맛있는 것도 해드릴게요!”
루시엘이 흥분해서 나와 리안나에게 계속 방문을 권유했다. 원래 친구가 적었던 루시엘의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귀찮다기보단 살짝 불쌍하게 느껴졌다.
지금 리안나라는 친구가 생긴 것에 이렇게 기뻐하는 거겠지….
나는 밥을 대충 깨작깨작 먹은 뒤 두 엘프들과 함께 급식실 밖으로 나섰다.
“제가 학교를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볼만한 거 있어?”
“저쪽으로 가면 대정령 조각상도 있고, 저쪽으로 가면 역대 엘프 왕, 여왕님들의 동상들도 있고… 아! 저기는 물의 정령들로 만든 연못….”
“…….”
말은 안 하지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학교 이곳저곳을 유심히 바라보는 리안나. 그리고 1년 선배라고 여기저기 소개해주며 즐거워하는 루시엘.
쌓인 눈이 여름 태양에 의해 빠르게 녹아가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 아이들과 점심시간 동안 동문에서 서문까지, 북문에서 남문까지 왕복하며 아카데미를 구경하니까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으아앗! 이제 곧 수업 시간이에요!”
우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간신히 반 안에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됐다.
이건 사족이지만, 점심시간 동안 나와 루시엘, 그리고 리안나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다른 학생들이 꼭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 함께 다닌다며 부러워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이번 시간에 공부할 것은 정령과 계약하는 법이고….”
점심 먹었으면 한숨 자야지. 음냐…….
* * *
“저기, 다들 기숙사로 가는 건가요?”
수업이 전부 끝난 뒤, 하교하는 나와 리안나에게 루시엘이 물었다.
“그렇겠지? 할 것도 없고.”
“우으… 난 왕궁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저도 도서관 가서 공부를….”
리안나도 공부, 루시엘도 공부?
뭐야. 얘네 학기 첫날부터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이러면 상급 정령 몇 마리 만나서 챙긴 다음 자퇴하려고 한 내가 너무 나빠지잖아.
“헐, 그럼 저랑 같이 공부하실래요? 리안나 양?!”
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 왕궁에 가기는 조금….”
“아뇨! 제가 도서관을 가면 되죠! 저 사서 언니랑도 친하다구요?”
“그럼 좋아요.”
리안나가 배시시 웃었다. 음, 그럼 나는 혼자 가야 하네?
“그럼 둘이 잘 공부하다 와~”
“네, 라헬 님! 아, 설마 제가 같이 안 가서 화나신 건 아니죠? 죄송해요! 그치만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아냐. 정말 괜찮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루시엘도 오랜만에 친구가 생겼는데 나 때문에 놓치면 아쉬울 테니, 둘이서만 같이 있으면 서로 금방 친해지겠지.
“…….”
근데 나는 뭔가 루시엘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루시엘, 너는 왕궁이 있는데 왜 기숙사에서 자는 거야?”
별로 큰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멀쩡한 집 내버려 두고 왜 딴 데서 자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저, 궁은 너무 짜증 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헤헤.”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녀는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루시엘도 루시엘만의 사정이 있겠지.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한편 리안나의 시선에는 루시엘은 엘프 종족의 차기 여왕인 반면, 나는 정령술이 조금 뛰어난 인간 정령사일 뿐이다. 그런 내가 루시엘을 하대하고 반대로 루시엘은 나를 꾸준히 존대하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듯했다.
음, 혼자 있는 동안 변명이라도 준비해 놔야겠다.
* * *
둘과 헤어진 나는 곧바로 기숙사, 내 방에 와서 온종일 뒹굴었다.
《계약자! 오늘 학교생활은 어땠냐? 궁금하다!》
아르마랑 대화도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비록 하루밖에 안 됐지만, 아직 상급 정령들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이그니스, 아쿠아, 클로이, 진, 다들… 어디 있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그니스였다. 나의 첫 정령이자, 가장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
도마뱀이었던 작은 녀석이 화염 구체가 되고, 마침내 상급 정령으로 진화해 아리따운 적발 적안 미소녀가 되었을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무엇이냐, 소녀의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드디어 세상에 발을 디딘 소녀의 계약자가 이런 범부라니, 실망이 크구나.』
그 오만한 소녀가 그립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소녀가 범부 따위에 불과한 계약자 그대를 세계 정점에 선 사내로 만들 것이니.』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그녀는 그 말들을 전부 실제로 이뤄냈으니 그저 대단할 뿐이다.
이제 세계 정점에 선 ‘사내’는 아니지만….
그런 옛 생각을 하며 추억에 빠져 있으니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다.
“으음. 나가서 먹어야 하나. 요리 재료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올 때 뭐라도 사 올 걸 그랬다. 몇 시간 동안 편하게 휴식을 취하니 나갈 준비를 하고 나가는 것도 번거로웠다.
“그냥 한 끼 거를까….”
끼익.
그 순간, 우리 기숙사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숙사 방은 방이라고는 하지만 최상급 방인지라 사실상 집 내부에 방이 두 개, 그리고 화장실과 식탁이 딸려 있는 모습에 가까웠다.
나는 그 방 두 개 중 룸메이트의 짐이 없는 방에 짐을 풀고 뒹굴뒹굴하던 상태였고, 이 안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온 건가.”
룸메이트와 처음 만나는 자리다. 나는 거울을 보고 누워 있느라 엉망진창이 된 옷매무새와 머리를 조금 다듬은 다음, 돌아온 룸메이트를 맞이하러 나왔다.
“저,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룸메이트가 어떤 아이일지 긴장 반 설렘 반, 나는 흑심 없는 순수한 표정을 꾸미고 거실로 나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어?”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