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네, 하녀장님!”
엠마가 머리를 허둥지둥 다듬고는 문을 열었다.
“엠마.”
베리타 부인이 손에 들고 온 건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맥주였다. 아예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베리타가 말했다.
“술 한잔할래?”
엠마가 물끄러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오후 3시가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술은 원래 낮술이라고들 하지 않니.”
베리타 부인이 환히 웃었다.
“……좋아요.”
엠마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의 통역사는 레이였다.
“밤비,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어볼 거야. 괜찮겠니?”
일단은 밤비의 상태를 살피는 게 먼저였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밤비에게 끔찍할 테니까.
다행히도 밤비가 순둥하게 내 손등에 코를 비볐다.
“괜찮다는군.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오. 다만,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서 말해 줄 수 있는 게 얼마 없다고 하오.”
“괜찮아, 밤비. 아는 것만 말해 줘. 큼, 레이 말로는 레이를 풀어 준 소녀가 있다고 했어. 거기에 어린 소녀가 있었니?”
밤비가 눈을 깜빡였다.
한동안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밤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신수 사이에 나는 알 수 없는 교류가 오갔다.
“밤비가 말하기를 10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가 종종 오갔다고 하오. 푸우는 좀 더 자세히 알 텐데…….”
메리와 정원을 뒤엎고 있는 푸우를 보았다. 밤비가 애지중지하는 것에 반해서 푸우는 천방지축이었다.
벌써 흙투성이가 되어서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큼. 아직 어린 신수는 기억이 온전치가 않아서…….”
“그 소녀가 어디에서 온 건지 알아, 밤비? 이름은?”
밤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오. 그저 가끔 밤비와 푸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다고 하는구려. 그리고 ‘꼭 구해 줄게.’라는 말을 했다고 하오.”
레이가 근엄하게 말했다.
“역시 정 많고 착한 소녀가 아닐 수 없소.”
그러게.
소녀는 약속을 지켰다. 나한테 편지를 보냈으니 말이다.
“사실… 나한테 편지를 보내 준 사람이 있었어. 밤비와 푸우가 당하고 있는 일을 알려 줬지.”
“공작님은 그게 그 소녀였다고 생각하는구려.”
“맞아. 그래서 나도 그 여자애를 꼭 찾고 싶어졌어.”
그런 환경에서 그 애 또한 멀쩡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네……. 나엘을 만나 범죄자들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
으아, 결국 나엘을 만나야 하는구나.
* * *
그 시각, 베리타 부인과 엠마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잔을 부딪쳤다.
“으아아아아, 하녀장님! 저는 정말요오. 공작님을 잘 보필하고 싶었는데요… 저는 엉망이었어요. 공작님 마음도 모르고…….”
“아니야, 엠마아아아. 너어는 아주 잘하고 있어…….”
말 길이가 늘어지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취한 게 확실했다. 서로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하며 또 한 잔을 들이켰다.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 속상했고 또 속상한 마음을 술을 불렀고, 그리고 또 술이 술을 불렀다. 속에 탱크라도 있는 것처럼 술이 잘만 들어갔다.
“제에가 정말로 잘하구 있다구여?”
엠마가 고개를 꾸벅했다.
“구럴 리가 없눈데……. 꽁작님이 그러면 저한테 거짓말을 하고 그러실 리가아 …….”
“쏘옥싸앙해할까 봐 수움기신 거게찌잉…….”
베리타 부인이 술을 꼴깍꼴깍 마셨다.
그런 말이 있다. 낮술은 부모님도 못 알아보게 한다고.
한 잔, 한 잔이 주옥같았다.
베리타 부인이 가져온 트레이에 가득했었던 술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빨개지고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 되었을 때, 엠마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루시아였다.
“세상에.”
엠마가 어제부터 방문 밖으로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위로차 들른 것이다.
루시아는 엠마와 먹기 위해서 다디단 쿠키를 가지고 왔다.
원래 우울할 때는 단 게 최고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런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이게 무슨 일이야…….”
루시아의 맑은 눈망울이 흔들렸다.
“엠마, 엠마. 괜찮아?”
루시아가 엠마의 어깨를 흔들었다. 엠마가 눈이 풀린 채로 루시아를 응시했다.
“으으응……. 루씨아짜나.”
안 괜찮구나.
“루씨아아아, 루씨아아아아도 쑬 마씨짜.”
베리타 부인이 술잔을 내밀었고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주정뱅이들 같으니.
* * *
다음 날, 엠마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배를 탄 것 같달까.
“우웁!”
엠마가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 동안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워 낸 후에야 비틀거리면서 화장실에서 나왔다.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엎어지려던 엠마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방이 아니야.’
엠마가 꾹 감고 있던 눈을 도로 동그랗게 떴다.
익숙한 곳이기는 해도 훨씬 넓고 호화로운 것을 보아서는…….
‘공작님 침실!’
술이 화들짝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엠마가 침대에서 다시 구르듯이 내려왔다.
엠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루시아와 베리타 부인까지 늘어져 있었다.
“부, 부인! 루시아!!”
엠마가 그들을 흔들었다.
“지,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일어나 봐!!”
“우우응? 엠마, 나 속이 안 좋아……. 우어웩!”
“안 돼……!”
엠마의 목소리가 침실 안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값비싼 카펫에 얼룩이 잔뜩 졌다.
왜 그들이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가 어디…….”
베리타 부인이 느지막이 눈을 떴다. 바닥에서 달팽이처럼 꿈틀거리던 베리타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엠마, 왜 그런 표정이니. 루시아……?”
“……어제 기억나세요?”
베리타 부인이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몸을 세웠다.
“어제? 어제 네 방에서 술을 마시고…….”
베리타 부인이 눈을 깜빡거렸다. 알고 있던 풍경이 아닌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베리타 부인이 침을 삼켰다.
그녀가 루시아와 엠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 여기가…….”
“공작님 침실이요…….”
엠마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베리타 부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낮술은 부모님도 못 알아보게 만든다는 건 진실이었다.
제기랄.
낮술은…… 공작님도 못 알아보게 만들었다.
세 주정뱅이는 무려 슈타디온 공작의 침실을 차지했다. 만취한 상태로.
그리고 그때.
문이 열렸다.
“……일어들 났네?”
아가사가 피곤한 얼굴로 들어왔다. 직접 트레이를 밀고서. 이런 불경한……!
베리타 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속도 안 좋을 텐데……. 얼굴이 창백하네. 거기 앉아 있어.”
아가사가 가져온 건 무려 숙취 해소제와 간단한 스프였다.
“다들 속 안 좋을 텐데 먹어.”
뭔가 완전히 뒤집혔다.
엠마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누가 기억 좀 찾아 줄 사람……?
* * *
어제는 정말 날벼락이었다.
아니, 자려고 누웠는데 세 명이 쪼르르 찾아온 것이다. 혀는 꼬이고 눈은 풀린 채로.
그런데 또 먼저 와 준 엠마가 고마웠다. 만취자들의 주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많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했지만.
“이제 마음이 풀렸어?”
어젯밤 엠마가 나를 보면서 베시시 웃는 걸 보니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흐으으음!”
베리타 부인이 헛기침을 크게 했다. 얼굴이 빨간 걸 봐서는 창피한 듯싶었다.
“저, 저, 제가 어제 큰 실수를 하지는 않았겠지요?”
만약 아니라고 대답하면 창밖에 목이라도 매달 것 같았다.
“하하하. 기억이 다들 안 나는 것 같네?”
열심히 스프를 떠먹던 루시아가 멈칫했다.
“제가 진짜 술을 잘 마시는 편인데요…….”
그 말이 바로 주정뱅이들 단골 멘트라더라.
“전에는 안 취했었는데요…….”
그 말도.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웃음이 피식 나왔다.
“……죄송합니다.”
엠마가 웅얼거렸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름 재밌었거든. 나한테 그렇게 섭섭한 게 많은지 몰랐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엠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베리타 부인도 고생이 많았어. 새파랗게 어린애가 늙은이라고 부르는데 참아 주느라고.”
“……제가 그런 말씀을……?”
베리타 부인이 넋이 나간 채로 흔들거렸다.
“풉.”
참고 있었던 웃음이 터졌다. 분명 어제 있었던 일은 예상치 못했고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즐거웠다.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뒤에서 나를 씹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내 웃음소리에 세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네?”
“사랑한다며. 아주 많이 사랑한다며?”
장담컨대 그렇게 강렬하고 뜨거운 고백은 처음이었다.
엠마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고맙고, 미안해. 엠마.”
어제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이 말들은 사실은 이렇게나 쉬운 거였다.
치열했던 우리 사이의 공방이 끝났다. 아주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