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레이에게는 밤비, 푸우와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레이를 두고 오긴 했는데.
레이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레이를 도와준 ‘소녀’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내게도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신수의 피를 뽑아 파는 자들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태 왜 그걸 잊고 있었지?’
아무튼, 그때의 사건과 레이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레이를 구해 준 소녀와 내게 편지를 보낸 발신인이 같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었다.
“이거…….”
되게 고마운 사람이잖아.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이 편지의 발신인은 소녀라고 불릴 정도로 어리다는 거고. 그런데 이번에 잡힌 이들 중에 소녀라고 불릴 만한 이는 없었다.
‘누구냐, 너.’
일단 밤비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있었다. 밤비는 그곳에 레이보다 오래 있었으니까.
밤비와 이야기를 대신 나눠 줄 신수도 있었다.
그리고 인물을 특정한 다음에 나엘을 찾아가서……. 나엘을 찾아가서…….
아, 나엘.
머리를 부여잡았다.
피하고 싶었고, 그래서 피하고 있었던 문제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나엘의 편지.
그 속에 들어 있을 무언가.
그리고 내 마음.
원작의 흐름.
“으아아아앙.”
쿵.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잊어, 잊어, 다시 잊으라구!
“고, 공작님?”
책상 위에 축 늘어졌다.
“왜 그러세요, 공작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레이가 다시 아파요? 그도 아니면……. 밤비가 아프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가 괴롭히나요?”
엠마가 랩처럼 쏘아붙였다. 아쉽게도 다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는 건 나였다.
* * *
엠마가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를 부르니 젬이 따라왔고 젬이 오니 젤리가 따라왔다. 그리고 젤리가 따라오니…….
“마법사님?”
엠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브라임이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엠마를 응시했다.
이 저택에는 깡패가 여럿 있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아가사는 당연히 최고 깡패였고.
그 밑에 이브라임을 포함해서… 저기 귀염뽀짝한 신수들.
엠마가 모시고 살 이들이 이렇게 많다며 한숨을 삼켰다.
“무슨 일 있어, 엠마?”
“루시아.”
엠마가 심각한 목소리로 루시아를 불렀다. 이브라임보다 엠마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응?”
“나는 사실 우리 공작님이 평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엠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항상 이상했지.”
엠마는 여전히 진지했다.
“사실 다른 귀족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예전부터 많이 하셨었으니까.”
황태자를 쫓아다니면서 초상화를 모을 때는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고 엠마가 덤덤히 말을 늘어놓았다.
그 외에도 아가사가 저지르는 온갖 기행 덕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계단 위에서 누군가를 밀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속이 문드러졌었다.
“우리 공작님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셨거든. 남을 사랑하는 법도, 미워하는 법도 모르셨지.”
루시아와 이브라임까지 감화될 만한 절절함이었다. 사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두 사람의 기저에 아가사를 향한 애정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공작님이 마차 사고에서 깨어나신 이후로 변하신 게 정말 좋았어.”
“……그럴 만했네.”
루시아가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럴 만했다냥.”
젤리가 코를 쓱 문질렀다.
“곤쟈님 괴로핀 사람 나쁜 샤람(공작님 괴롭힌 사람 나쁜 사람)! 나빴어!”
젬은 오열을 했다.
이브라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아무튼 엠마의 본론은 이게 아니었다.
“그런데 요새 공작님이 조금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 루시아.”
엠마가 허공을 응시했다.
“응?”
“아마도 메리지 블루 같은 게 아닐까 싶어.”
엠마가 덤덤히 선언했다.
“뭐?”
“곧 약혼을 앞두고 계시잖아. 아무래도 혼란스러우신 거지.”
“……아.”
루시아가 탄식을 흘렸다.
동시에 이브라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사가 바라지 않는 약혼이라서 그래.”
이브라임이 차갑게 내뱉었다.
“상황에 떠밀려서 하는 약혼이 달가울 리가 있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엠마가 도끼눈을 떴다.
엠마는 이 약혼의 로맨틱함에 대해서 탄복하고 있었다.
완전히 틀어졌었던 두 남녀가 역경을 이겨 내고 사랑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두 사람 사이의 굳건한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엠마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에 떠밀려서라니?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마법사님.”
이브라임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게 아가사를 아낀다면서 그 속내도 몰랐나?”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엠마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말 그대로야. 데이먼은 애먼 놈을 들이밀면서 압박하지, 전에는 귀족 가의 사용인들이 청혼서를 들고 개떼처럼 몰려온 일도 있었지. 그뿐이야? 사교계에 나가면 사람들이 슈타디온을 먹잇감 취급하잖아.”
이브라임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엠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파랗게 질렸다.
“그, 그래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야.”
이브라임이 뇌까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가사가 그깟 황태자와 약혼할 이유가 있나.”
“착한 분이시기는 해요…….”
루시아가 소심하게 항변했다.
엠마가 투우장의 황소가 되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래서 이 약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걸 여태 몰랐다는 게 나는 더 신기한데.”
이브라임이 이죽거렸다.
이브라임이 얄미운 것도 얄미운 거지만 엠마의 가슴은 찢어졌다.
엠마는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눈물이 핑 돌았다.
“공작님이 드디어 약혼을 하신다고 좋아했는데……. 사랑을 받으시는 거라고…….”
엠마가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흐르려다가 쏙 하고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가사의 다리에 매달려서라도 이 약혼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메리지 블루?
무슨 말도 안 되는.
황태자?
개나 주라지!!
엠마가 눈에서 불을 뿜으며 뛰쳐나왔다.
* * *
나엘에 대한 건 뒤로 두고 일단 눈앞의 일부터 차근차근 하자는 맘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으악! 무슨 일이야!”
뛰어 들어온 것은 험악한 얼굴의 엠마였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뭘 하다 온 건지 표정이 안 좋았다.
엠마가 내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에, 엠마……?”
“안 돼요, 공작님.”
엠마가 말했다.
“뭐, 뭐가 안 돼?”
“저는요. 지금도 자기 전에 공작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해요. 저는 공작님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제 영혼도 팔 수 있어요.”
“엠마…….”
“그런데 정략 약혼이라니요!”
엠마가 소리쳤다.
“그건 안 돼요, 공작님. 저는 싫어요!”
갑자기 무슨…….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왜 그래, 엠마.”
엠마를 일으키기 위해서 손을 뻗자 엠마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켜 드릴게요. 제가 다 해 드릴게요. 공작님을 욕하면 물어뜯고, 공작님을 괴롭히면 제가 돌을 던져서 지켜 드릴게요.”
엠마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는… 공작님이 사랑받으시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엠마…….”
왜 이 난리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엠마가 어디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엠마의 앞에 눈높이를 맞춰서 앉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황태자 전하께서 프러포즈를 하셨나요?”
“그 비스무리한 것은 했지.”
계약 약혼하자는 말이었지만, 그 또한 프러포즈라면 프러포즈였다.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씀도 하셨나요?”
엠마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사랑이라.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엘과 내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였던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엠마가 펑펑 눈물을 터뜨렸다.
“공작님은 너무하세요. 저한테 어떻게 이래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공작님이…….”
엠마가 벌떡 일어나서 잘 말려 두었던 장미꽃 다발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게 다 뭐예요.”
쨍그랑.
엠마의 손에 휩쓸린 향초가 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다 뭐냐구요…….”
엠마가 다시 주저앉았다.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런 걸 매일 쓸고 닦고…….”
“엠마아.”
“아무것도 몰랐어요. 공작님이 그렇게 힘든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고… 어떡해.”
엠마가 가슴을 내리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가사를 향한 엠마의 그 애정은 진짜였다. 내가 눈을 뜬 이래로 나는 엠마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다.
그녀는 내게 충성적이었고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으며 가진 것 모든 것을 퍼 주었다.
나는 엠마의 애정을 배반한 것이다.
거짓과 기만으로.
그런데 말이야, 엠마. 나는 네가 사랑하는 그 아가사가 아니야…….
내가 흘려선 안 되는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죄책감의 결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