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엘레나는 황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엘에게 불려갔다.
분명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나엘은 오늘 하루 종일 엘레나만 기다린 게 확실했다.
그 모습을 본 엘레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나엘은 속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나엘의 속마음이 투명하게 다 보이는 듯했다.
“……아가사는.”
“모두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나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편지는?”
“아, 혼자 있을 때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나엘이 납득하고 의자에 앉았다.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엘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이런 알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속에 쌀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나엘이 이마를 짚었다.
“이상해.”
“무엇이 그리 이상하십니까?”
나엘의 혼잣말을 들은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는 잘 어울리던가? 아가사가 마음에 들어 해?”
일전에 함께 황실 의상실에 직접 방문해서 골랐던 드레스였다. 원단부터 장식까지.
아가사가 직접 골랐다.
그날, 아가사의 표정이 어땠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레스도 잘 어울리셨고요.”
나엘이 머리를 헤집었다.
하루 종일 이런 괜한 고민을 하고 있느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접 가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공작님께서 더 좋아하셨을 겁니다.”
정말로 그랬을까?
“아가사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제가 내뱉어 놓고도 이상해서 나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한번 시작한 말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 약혼도 내가 우겨서 이루어지는 거야. 아가사가 정말로 이 약혼을 바랄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평생 황실 의상실에서 일하면서 나엘의 옷을 만들어 왔다.
원래 엘레나는 선황비의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선황비와 같이 황성에 들어왔고 또래였던지라 친분이 금세 깊어졌었다.
선황비는 특히 섬세한 사람이었다. 황비는 황후와 달리 제약이 많았다. 입어서는 안 되는 색, 써서는 안 되는 장식. 그런 것들을 선황비는 불편한 기색 없이 세심히 챙겼다.
엘레나는 나엘이 그런 면을 물려받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똑 닮아 있었다. 선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 하며… 아가사의 감정을 챙기는 것까지.
“그런 건 직접 확인해 보셔야지요.”
엘레나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사는 날 싫어해.”
나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몰랐지만 그 말이 퍽 충격적이었던 건지 마음에 박힌 채로 빠지질 않는다.
아가사 앞에서는 겁쟁이가 된 것 같다. 또다시 그런 표정으로 ‘난 니가 싫어!’ 하는 말을 듣게 되면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엘레나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오늘 뵌 공작님은 그러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
“네. 용기를 내세요, 황태자 전하.”
나엘이 머리를 쓸었다.
“황태자 전하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엘레나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대화를 하는 동안 나엘은 아가사에 대해서는 물었어도 스스로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엘이 눈을 깜빡였다.
“내 마음?”
“네, 황태자 전하의 마음이요.”
나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싫어하지 않아.”
그건 확실했다.
“나는… 그 애가 불쌍한 적은 있어도 싫어한 적은 없었어.”
엘레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셔야겠어요.”
나 자신.
“아가사 공작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함께 하고 싶으신지.”
대외적으로 나엘은 뛰어난 황태자였다. 황제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니 나엘은 제 감정에도 서투른 소년 같은 면이 있었다.
나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게 중요한가?”
“물론이지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아가사가 나를 거절하면 끝인데.”
나엘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무력한 약자가 된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항상 나엘은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새 아가사 앞에 서면 모든 결정권을 빼앗긴 사람이 된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미인을 얻지 못한답니다.”
완전히 잃느냐, 시도라도 해 보느냐. 그 차이인 건가?
나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이만 돌아가서 쉬게.”
“네, 황태자 전하.”
엘레나가 돌아가자 나엘은 다시 혼자 남겨졌다. 나엘이 안경을 벗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옆에서 앞발에 얼굴을 얹고 자고 있던 히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나엘을 힐끗 본 히샤가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멍청이.]
하지만, 그 무엇도 나엘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엘은 갈피를 잃은 나뭇잎처럼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답은 결국 하나였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었던 감정이 기지개를 켰다.
좋아한다.
나엘은 아가사를 좋아한다.
‘결국 이거지.’
아가사가 보고 싶은 밤이었다.
* * *
“으.”
“오늘은 또 무슨 일이세요. 어제 너무 감동받으셔서 우셨어요?”
엠마가 내 눈두덩이에 티스푼을 올렸다.
“그랬나 봐.”
“어휴. 정말 내가 못 살아.”
“오늘 일정은 없지 않아?”
내 하루는 대부분 저택에서 시작해서 저택에서 끝나기 마련이었다.
“아니요. 다비드 경이 오시기로 했어요.”
“다비드가?”
“어제 그냥 가셨잖아요.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다비드만 만나면 끝이야?”
엠마가 어느새 따뜻해진 티스푼을 떼어 내고 차가운 티스푼을 새로 얹었다.
“아으.”
적당히 울걸. 얘는 왜 이렇게 잘 부어?
“아니요. 오늘은 일정이 하나 더 있으세요.”
“어떤 일정?”
“기다리시던 분이 오시거든요.”
그건 또 누구야.
나 요새 너무 사람 많이 만나는 거 아니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기 빨리는 일이었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시면 안 돼요, 공작님!”
엠마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냥 나 녹게 해 줘…….
* * *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다비드는 성실하게 약속한 시간을 지켰다. 정확히 10시 30분. 어, 그런데…….
“다비드 경, 어디 아파?”
오늘 표정이 되게 안 좋네. 얼굴이 평소보다 하얗게 질리기도 했고.
“아닙니다, 공작님.”
다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 같은데.”
“조금 피곤해서 그런 듯합니다.”
다비드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어제는 왜 그냥 갔어?”
“그게… 어제 공작님께서 바빠 보이셔서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었네요. 죄송합니다.”
다비드의 미소가 매우 어색했다. 다비드는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어제 내가 뭘 했…….
아.
표정이 굳는 게 느껴졌다. 다비드는 아가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약혼식 드레스를 입고 잘 어울리냐는 말이나 내뱉었다.
어제 내가 저지른 미친 짓에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정신이 나가셨세요? 그게 무슨 노매너야.
“아, 아니야. 어제는 내가 미안, 바빠서……. 커흐으으으음!”
목을 격렬하게 가다듬었다.
내 무심함으로 인해서 피해자가 발생해 버렸다.
그런데도 다비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공작님. 미리 여쭤보고 왔으면 좋았을 걸 제가 마음이 성급했어요.”
“아니야, 다비드 경. 정말로 내가 미안.”
다비드가 생긋 웃었다.
그 표정이 정말 아파 보였다. 순간 나는 어제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서 연애 고자들이란…….
으아.
사람의 감정만큼 어려운 게 없었다.
“그,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이걸 먼저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다비드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서류를 확인했다.
“이게 뭔데?”
사업 구상안인 것 같기는 한데……. 어, 이건……?
“공작님께 도움이 될 만한 사업 아이템인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다비드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의 사업이기도 했다. 사실 지금 내가 무기를 만들 것도 아니고, 선박을 건조할 것도 아니고, 도로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 대형 사업에 뛰어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업 구상안에 있는 사업은 너무 간결했다.
‘신수들의 아이돌화.’
정리하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신수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수 있음과 동시에, 신수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도 달래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업의 개요도 간단해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드시나요, 공작님?”
“응. 괜찮은 것 같네. 내용도 안 어렵고.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건 누가 가져온 건데?”
표지에서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덮는 순간이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입니다, 공작님.”
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