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멜리슨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곤 오히려 투정을 부렸다.
“어제 그 신수 때문에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어요. 지금도 온몸이 쑤셔요, 아버지.”
“그게 지금 중요해?”
체이스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멜리슨이 철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겪을수록 기가 찬다.
“어제 일은 너 때문에 일어난 거야. 그러게 왜 그 여자를 저택으로 들인 거야?”
“안 그러면 안 넘어올 것 같으니까……. 아니, 그런데 저보고 그런 하녀하고 결혼하라고요?”
멜리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누군지 모르세요, 아버지?”
“네가 누군데!”
“저예요, 멜리슨! 저는 데이먼 가의 차남이라구요!”
참 대단한 인물 나셨다.
체이스가 팔짱을 끼고 멜리슨을 응시했다. 점점 하는 짓이 가관인 동생 때문에 그 대단한 데이먼이 이번에도 망할 뻔했다.
성녀의 위치도, 위험함도 모르는 저 멍청한…….
체이스가 루시아를 가두지 않았다면, 황후가 계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멜리슨은 성녀를 모욕한 죄로 죽었을 것이다.
“저는 아가사 공작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허.”
그 와중에 이어지는 헛소리에 체이스가 혀를 찼다.
여전히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나.
“제가 루시아한테 접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구요. 아가사 공작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면!”
데이먼 백작이 책상을 내리쳤다.
“아가사 공작이나 만날 것이지 왜 저택으로 끌어들여서 이런 일을 벌여!”
“그야… 아니, 이런 문제가 생길 줄 몰랐다니까요. 아, 결혼하면 되잖아요!”
멜리슨이 짜증스럽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집무실을 나가 버리는 멜리슨을 체이스가 한심하게 응시했다.
“……아버님께서는 저런 놈을 아가사 공작에게 들이민 겁니다.”
“내가 미쳤었지.”
데이먼 백작이 엉망이 된 책상을 정리했다.
“없어진 건 없으십니까?”
“다행히. 그냥 뒤지다가 나간 것 같구나.”
데이먼 백작이 고개를 젓고는 책상 서랍을 닫았다.
“게다가 중요한 서류는 다 금고에 넣어 두었지. 여기에 있는 건 사라져도 상관없는 것들뿐이야.”
“다행이군요. 후우, 일단 일은 벌어졌으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체이스가 천천히 생각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멜리슨을 구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계책을 내놓으신 건 맞습니다.”
“그렇겠지. 황후께서 우리 말고 기댈 곳이 있으시겠니.”
데이먼 백작이 의자에 고개를 기댔다.
“성녀를 가지게 된다면 가문에 힘이 되긴 될 게다. 멜리슨을 감시하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네, 아버지.”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가사에게 체이스는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아가사는 체이스가 그런 선물을 보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 계기만 생기면 된다. 아가사를 함락시키고 슈타디온을 안에서부터 가질 수 있다면…….
“이번 일은 제게 맡겨 주세요, 아버지. 황후 폐하를 뵙고 의논을 한 다음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먼 백작이 체이스를 힐끗 보았다. 확실히 멜리슨보다는 훨신 나아 보였다.
“좋아, 체이스. 반드시 성녀와 그 신수를 이 저택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약속드리죠, 아버지.”
체이스가 음험한 눈빛을 빛냈다.
루시아와 젬은 데이먼 백작 가를 위한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멜리슨이 저질렀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이번이 가장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술집 여자가 아닌 게 어디야.’
성녀라니. 데이먼 가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대박이었다.
* * *
나엘이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요새 일이 몰려 약간 피곤했다. 거기에 더해져서 약혼식 준비도 하고 있으니.
나엘은 두 사람의 약혼식을 브륄스 제국이 다 알 수 있도록 화려하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아가사는 그닥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나엘은 열의에 차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이번 범죄 사건과 전쟁 준비까지.
그 외에도 황제가 떠넘기는 자잘한 일들까지 더하면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신수 피를 뽑아 판 범죄였다.
이건 신전하고도 관련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들어온 대신관이 꽥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귀가 아팠다.
“저희는! 이번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 이겁니다! 이건 마엘리스 신을 향한 모독이에요!”
같은 말을 고장난 기계처럼 반복하면서 결국에 바라는 건 하나다.
“이번에 범인들에게서 압수한 자산을 신전에 귀속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대신관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나엘이 날카롭게 웃었다.
“뭘 이렇게 길게 늘어놓으시오. 그냥 돈을 달라 하면 되는걸.”
“커흐음! 그런 게 아닙니다. 신을 모독하여 번 돈이니 신전이 사용하는 게 가장 합법적이며 보기 좋다는 말씀을…….”
나엘이 혀를 찼다.
대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든 말든 나엘이 눈 밑을 꾹 눌렀다. 신전하고 얽히면 이 부분이 특히 안 좋다. 마탑주도 만만치 않게 꼬장꼬장하지만 대신관이 그중 최고였다.
황제도 대신관은 피해서 도망 다닐 정도니…….
“대신관이 말하는 대로 그 방법이 정당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슈타디온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커흐으음! 슈타디온 공작께서는 특히나 신심이 깊으신 분이십니다.”
나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가사에 대한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나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이 돈도 정의대로 슈타디온에 귀속시키고 공작이 쓰는 게 맞겠군. 슈타디온 공작이 신심이 깊다면 알아서 신전에 기부하지 않겠나.”
“어째서 그런 결론을…….”
대신관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실상 대신관이 바라는 것은 슈타디온에서도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챙기고, 지금 이 돈도 받아 챙기는 거였다.
듣기로는 범죄자들이 꽤 큰 돈을 벌어들였다 한다. 분명 돈이 꽤 될 텐데.
“크흠, 전하. 그게 아니라…….”
키브르 대신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종교의 의미와 마엘리스 신의 업적 같은 것을 떠들어 대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서라도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작정으로.
“저, 황태자 전하…….”
순간 시종장이 급히 들어와 나엘에게 무언가를 말하자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대신관, 그 깊은 신심에 대해서 슈타디온 공작과 직접 이야기 나누면 되시겠소.”
“예?”
“마침 슈타디온 공작이 도착했다는군.”
나엘이 삐뚜름히 웃었다. 어제 오후, 아가사에게서 오늘 방문해도 되겠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나엘은 허락한 참이다.
그리고 딱 타이밍 좋게 도착했다. 대체 어느 나라 양심이면 남의 포상금을 가로채려 하는 거지?
하여튼, 신전 놈들이란.
“왜, 갑자기 조용해지셨소?”
“커흐음. 황태자 전하, 이건 슈타디온 공작처럼 어린 사람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해 본 우리가…….”
“나와 대신관을 한통속으로 묶지 마시오.”
나엘이 딱 잘라 손절했다.
“나는 정의의 편에 설 생각이거든.”
대신관이 입술을 오므렸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대신관이 뭐라고 더 하기도 전에 아가사가 도착했다.
“아, 손님이 계셨군요.”
“아가사.”
아가사의 자리는 나엘의 옆자리였다.
당사자가 등장하자 대신관이 입을 더 꾹 다물었다. 거액의 기부금으로 단번에 신전의 최대 주주로 올라선 아가사는 여태 무엇도 신전에 요구하지 않았다.
무언가 요구한 게 있다면 그나마 속이 시원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대신관, 인사 나누시오.”
한편, 아가사는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대신관이구나. 처음 뵙겠습니닷.’
뭐, 그런 생각.
* * *
그 시각, 이브라임은 대마법사의 저택에 있었다.
점점 주기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만큼 이브라임이 대마법사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는 거다.
“얼른 이게 끝나야 하는데.”
대마법사가 귀찮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브라임이 강해지는 만큼 쇠약해진 대마법사가 말했다. 어린 소년이었던 대마법사는 조금씩 중년의 사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간 귀찮아서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아버지.”
이브라임이 빈정거렸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있어야지.”
보통 드래곤에 대한 인식과는 다르게 마도룡의 경우는 인간이 드래곤화(化)되는 거였다.
마도룡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힘의 전승을 통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대마법사의 힘을 이브라임이 이어받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대마법사는 이 대륙에서 외롭게 버텨 왔다.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힘을 담을 새로운 그릇을 찾으며.
그리고 이브라임을 발견한 것이다.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는 건 이브라임이 이루어야 할 일이나, 힘을 채워 주는 건 대마법사의 일이었다.
그간 버팅기는 이브라임을 달래려 노력하느라 피곤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솔직히 네 결정은 내게는 좋은 일이나 네게도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구나. 네가 이 힘을 누군가에게 물려주지 않는 이상 네게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