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54)화 (54/90)

#54화.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이먼 백작 가가 다른 짓 못 하게……. 저택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 주변을 포위하도록 해. 그리고 케르인이 직접 가서 루시아의 신병을 요청하도록 하고.”

“네, 공작님!”

“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케르인한테 내 권한을 일부 양도하겠어.”

“네!”

이게 최선의 선택지겠지?

“이브라임은 어디 있어?”

“아, 정원에 계신 걸로 알아요.”

이브라임에게 케르인 집사장과 동행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사실 이브라임이 슈타디온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호위할 순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하자.”

“네, 공작님!”

* * *

이브라임은 항상 그렇듯 젤리와 함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브라임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 잤어?”

윽. 어제의 창피한 소란이 생각나는 질문이었다.

“큼!”

호들갑을 떨어 댄 친애하는 내 친구(?)들 덕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던 어제.

“잘, 잤어. 마법사님은?”

“마법사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 부탁할 게 있나 보군.”

이브라임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서 그런가. 이브라임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어, 응응……. 혹시 말이야. 루시아를 알아?”

네가 앞으로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될, 그래서 절절한 서브 남으로 변모하게 만들어 줄 그 여자 주인공 말이야.

몇 번 한 프레임 안에 잡혔었는데.

내 기대와는 달리 이브라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누군데. 네 친구야?”

“아니,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그 금발에다가…….”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기대감이 푸시식 식었다. 정말 왜들 이러는 거지? 한곳에 모아 놔도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다. 역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건가.

아니, 지금은 이런 고민 할 때가 아니지.

“루시아가 사라져서 찾아야 하거든. 근데 정황상으로는 데이먼 백작 가에 감금되어 있는 것 같아서.”

“같이 가 달라는 거로군.”

“나는 엠마하고 좀 나중에 갈 거야. 그러니까 집사장이랑 같이 가서 시간을 끄는 걸 도와줘. 그리고, 여기 메리하고 또리.”

“깡!”

“왕!”

두 녀석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젤리가 어슬렁거리며 두 녀석 주변을 맴돌았다.

“뭔데?”

“얘들을 데려가면 루시아와 젬을 찾아줄 거야. 혹시 모르니까…….”

“아하.”

이브라임이 뚱한 얼굴로 두 녀석을 받아 들었다. 얼굴이 되니까 그림이 되네.

“……몸은 괜찮고?”

“아주 멀쩡해.”

왜 기절했는지도 모르겠는걸. 기절하던 당시의 기억이 희미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브라임이 어깨를 으쓱했다. 케르인 집사장과 이브라임을 위시한 저택의 사람들이 위세 등등하게 데이먼 백작 가로 떠났다.

가서 루시아를 되찾아 오자고!

“이브라임, 넌 할 수 있어!”

* * *

다친 두 신수는 정원에 있었다.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곳에. 그 주변에는 수의사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함께였다.

녀석들에게 다가갈수록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솟았다.

마음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가 다시 움직였다. 가까이에 가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조차 겁났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거대한 곰이 눈을 슬그머니 떠서 나를 보았다.

“꾸우웅…….”

거의 꺼져 가는 목소리였다. 내 마음의 빛도 꺼져 버릴 것 같은.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두웠다.

“상태는 어떤가.”

“이 아이는…….”

수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수의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곰 신수가 사슴 신수를 여태까지 보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슴 신수가 상대적으로 멀쩡한 것에 반해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발견 당시에도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던 것은 곰 신수가 사슴 신수를 최선을 다해 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이 사슴 신수는 회복할 수 있겠나?”

곰 신수가 한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사슴 신수라도 꼭 살리고 싶었다.

“네, 공작님.”

마음이 아렸다.

내가 좀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내가 좀 더 빨리 알게 되었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다이아몬드 수저를 문 이후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나를 휘어 감았다. 나는 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직은 따뜻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데 살리지 못한다니.

곰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업보였다.

이 아이가 그 악독한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연민을 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됐을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다.

“네 이름은 푸우로 하자.”

디즈X에서 나온 행복한 곰돌이 푸우. 꿀단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행복해하는 캐릭터였다.

“푸우. 다음 생에는 꼭 행복해지는 거야. 네 친구는 내가 반드시 지켜 줄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이 아이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너무 늦지 않은 때에.

푸우가 내 얼굴을 길게 핥았다. 속상해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엎드려 있던 사슴 신수가 몸을 일으켜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네 이름은……. 밤비.”

이 아이들이 그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반드시 행복해지길 바라며. 과거의 어두운 고통은 전부 잊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물렁거렸다.

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고개를 들고 손을 내미니 푸우가 손바닥을 핥았다. 그리고 푸우의 몸이 천천히 빛 알갱이로 산화되기 시작했다.

“잘 가……. 기다릴게.”

왠지 희미하게 웃는 푸우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이라도 편하게 떠날 수 있어서,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빛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황금색에 문양이 새겨진 둥글고 큰 알이 남겨져 있었다.

이게 바로 신수의 비밀이었다.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윤회를 통해서 신수들의 모든 것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알을 쓰다듬었다.

“다시 보자.”

우웅.

마치 알이 그렇게 대답하는 듯싶었다. 밤비가 알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푸우를 지켜 주겠다는 듯이.

인간보다 낫네, 역시.

“……이 아이들을 잘 돌보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네, 공작님!”

그렇게 밤비와 푸우가 우리 슈타디온의 가족이 되었다.

절대로, 절대로 이번 일을 벌인 잔인한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루시아만 되찾아 오고 나면 나엘을 찾아가 강력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인식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안일하던 나의 일상에 새로운 풍랑이 몰아치고 있었다.

* * *

한편, 루시아는 멜리슨의 방에 말 그대로 감금되어 있었다.

“젬, 여기서 날 내보내 줄 수 없을까?”

“나빴어! 여기, 여기, 여기! 이건 신수들을 봉인할 때 쓰는 봉인석이야! 젬이 아직 힘을 다 쓸 수 없어서 안 돼. 나빴어!”

젬이 시무룩해서는 루시아의 앞을 빙글 돌았다.

“아니야, 괜찮아.”

루시아가 젬을 끌어안았다.

데이먼 백작 가도 과거에 신수와 함께했었다. 덕분에 불완전하지만 이런 장치들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방 안에는 바닥에서부터 천장을 관통하는 거대한 식물 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건 결정적인 순간에 젬이 루시아를 지켜 낸 흔적이었다. 젬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루시아를 지켰다.

이번에는 루시아가 젬을 지켜 줄 차례였다.

“여기서 뛰어내리기에는……. 안 되겠구나.”

창문 밑도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 방에서 벗어나면 젬이 더 큰 힘을 쓸 순 있겠지만…….

이 저택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테니 젬에게는 부담을 주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데이먼 백작 가는 소란스러웠다.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 루시아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잠을 자겠는가.

어제 루시아는 각성했다. 스스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성력은 대부분 치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건 루시아의 성력도 마찬가지라 지금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으…….’

분명 슈타디온에서도 루시아의 실종을 인지했을 것이다.

‘찾으러 와 주실까?’

고작 하녀 하난데.

물론, 젬도 함께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녀에게 신경을 쓰는 주인이 있던가?

“아냐… 데리러 와 주실 거야.”

고개를 저은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문득 아가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으니까.

“그럼 루시아는 내가 지켜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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