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43)화 (43/90)

#43화.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님이 이런 선택을 하시도록 유도하셨을 거란 이야기죠!”

루시아가 흥분한 얼굴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

“그러지 않고서는 공작님이 황태자 전하… 랑…….”

그 사이에 ‘따위’라는 단어가 묵음 처리된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까. 루시아가 파르르 떨었다.

“공작님, 제게 말씀만 하세요! 만약, 원하지 않는 약혼이시라면…….”

“아니야. 소설 그만 읽어, 루시아.”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

엠마는 머리를 풀고 곡을 시작했고 루시아는 새로운 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나엘은 나를 납치해서 세뇌하는 나쁜 놈이었고 나는 선량한 피해자였다.

“요새는 스톡홀롬 증후군이 대세 소재라고…….”

얘들아, 제발.

진정 좀 해 봐.

* * *

루시아는 정신적인 충격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우리 공작님이 하필 나엘과?

루시아는 이게 다 체이스 같은 놈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라는 엠마의 의견에 동의했다.

루시아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의 작은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 데이먼 가문 사람들 중에 가장 접촉하기 쉬운 건 역시 멜리슨이다.

멜리슨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열에 아홉으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제 망나니 같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으니까.

루시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지켜보기만 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접근을 해야지. 데이먼 가의 약점을 얼른 캐내야만 아가사가 원치 않는 약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엘은 아가사에게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이 결혼에는 밝혀지지 않은 비리가 있는 게 분명했다.

루시아는 이 음모론을 굳게 믿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진실에 가까워진 상황이었지만 루시아는 몰랐다.

어쨌든, 루시아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젬. 내가 잘할 수 있겠지?”

젬이 주머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루시아는 젬이 편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드레스를 개조했다. 그리고 풍성한 드레스 속 주머니는 젬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다.

젬이 고개를 허공으로 치켜들고 코를 씰룩거렸다.

마치 그게 루시아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아.”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척, 척, 척.

비장한 용사의 표정으로 루시아가 멜리슨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두렵지 않았다.

지금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루시아가 위험에 처하면 도와줄 이가 있으리라.

행동하지 않는 자, 바라는 걸 얻지 못하리라.

“어, 어, 어……. 전 뵈, 뵈었던 분 아닌가요?”

루시아가 혀끝을 물었다.

패기는 좋았는데 루시아의 연기력이 문제였다. 어색해서 손발이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젬도 못 지켜보겠다는 듯이 주머니에 쏙하고 숨어 버렸다.

아휴.

연기도 연습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던 멜리슨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그 어색한 연기 톤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멜리슨이 비죽이 웃었다.

그에게서 풀풀 나는 술 냄새에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야, 루시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야지!’

루시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루시아의 어깨에 아가사의 행복이 달려 있었다.

루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데이먼 백작 가의 차남 아니신가요?”

“나를 알아보는군. 전에 멜버리에서 봤었지? 아가사 공작의 하녀?”

멜리슨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간 몇 번이나 루시아에게 접촉하고 싶었지만 슈타디온의 담장에 막혀 실패했었다.

사실 공작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루시아를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루시아가 완전 취향이었다.

선명한 금발에 귀여운 핑크색 눈동자라니. 한입에 삼켜도 비린내 하나 안 날 것 같았다.

“우우우우, 멜리슨, 뭐야? 어? 어떤 아가씬지 소개 안 시켜 줘?”

“아아.”

멜리슨이 거들먹거렸다. 이런 미인이 먼저 말을 걸어 준다는 건 멜리슨의 어깨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멜리슨이 친구들 앞에서 루시아를 소개했다.

“여기, 루시아라고 해. 나랑 친한 사이니까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거야.”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친하긴 개뿔.

어쨌든 얼굴을 트는 덴 성공했다. 자, 이제부터야. 루시아, 파이팅!

* * *

요새 다들 왜 이러는 거니.

‘제가 구해 드릴게요!’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던 루시아와.

‘저만 믿으세요, 공작님. 제가 반드시 공작님을 지킬 거예요.’

기사라도 된 것 같은 엠마.

하지만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루시아와 엠마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이브라임까지.

이브라임이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보고 있었다. 뜬금없이 집무실에 쳐들어오더니 내 건너편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얌전히.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을 않는다. 내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며 다비드가 보내온 서류를 보던 중이었는데 입으로 그 서류를 토해 낼 지경이었다.

참으려다가 도저히 못 참고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왜! 왜! 왜! 용건이 있으면 말을 해.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아.”

아?

지금 아라고 그랬어? 지금 3시간 동안 그러고 앉아 있어 놓고 아? 누구 속 터지는 꼴 보려고 작정했나.

아주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 놓아 버릴 것 같은 눈으로 보고 있더니! 저런 반응은 뭐야!

“……할 말 있으면 하라니까?”

“약혼. 정말로 하는 거야?”

“황명이 들어갔으니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나한테 대안이 없기도 하고.”

그냥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술술 토해 놓았다.

“역시. 원해서 하는 약혼이 아니구나. 강압이나 타의에 의해서 떠밀린 거야…….”

이브라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왜 묻는데. 그걸 물어보려고 여태 있었던 거야?”

이 고양이 같은 자식.

이브라임의 무릎에 앉아 있던 젤리가 하품을 하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확인할 게 있기는 했지.”

“뭐를?”

이브라임이 피식 웃었다.

“너는 아직 몰라도 되는 거.”

하.

속 답답해.

“세상에는 말이야, 가장 못된 짓이 몇 개 있어. 그중에 하나가 뭔 줄 알아?”

내 높아진 언성에도 이브라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말을 하다가 마는 거야. 뭔데, 말해 봐.”

“……한동안 종종 외출을 해야 할 것 같아.”

“그건 마음대로 하고.”

그대로 나가 주면 더 좋고!

“하던 말이나 마저 해 봐. 내가 뭘 아직 몰라도 돼? 어차피 알게 될 거 말이나 해 봐.”

이브라임이 고개를 저었다.

“나 없는 동안 젤리나 잘 부탁해.”

“뭐?”

“우리 애 좀 잘 챙겨 달라고.”

이브라임이 젤리의 머리를 툭툭 쳤다. 잠에서 깬 젤리가 신경질을 부리며 솜방망이를 휘둘렀다.

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생각했다.

이게 바로 주객전도……?

* * *

일상이 뒤흔들린 것은 이브라임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사의 눈물과 나엘의 말, 그리고 약혼이 계속 겹쳐진 채로 생각났다. 이브라임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3시간 동안 아가사를 보면서 고민했는데 결론은 결국 하나다. 아가사를 지켜 줄 힘이 필요한 거라면.

‘그 힘을 얻으면 돼.’

이브라임이 심호흡을 했다.

지금 그는 마탑이 아닌 작고 소담하지만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하고 있는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제도에서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저택은 대마법사의 저택답게 온갖 보호 마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브라임이 목을 꺾어 스트레칭하고는 문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세요.”

이브라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브라임의 옆에는 코알라처럼 들러붙어 있는 델코도 함께였다.

델코는 마탑에서 이브라임과 나오던 날, 마탑주로부터 두 가지를 당부받았다.

첫 번째, 이브라임을 절대로 혼자 두지 말 것.

두 번째, 이브라임이 절대로 혼자서 사고 치게 두지 말 것.

어쨌든 이브라임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는 거다. 그래서 현재 결국 마법사들이라면 가장 기피한다는 대마법사의 집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 이브라임 님……. 대마법사님께서 출타하신 게 아닐까요?”

델코가 오들오들 떨면서 말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대마법사의 존재는 산중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구전된 전래 동화 속 인물 같달까.

델코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대마법사를 둘러싼 소문 중에는 그가 ‘젊은 마법사의 마력을 흡입한다’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겁나면 따라오질 말… 저기 있었구만.”

이브라임이 위쪽을 손가락질했다. 델코가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국, 대마법사까지 만나는구나. 어머니, 아버지. 제가 못 돌아간다면…….

“얜 뭐야?”

“딸꾹.”

갑자기 들이밀어진 얼굴에 놀란 델코가 딸꾹질을 토해 냈다. 이브라임과 델코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제 막 10살이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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