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측근 하녀인 엠마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엠마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체이스놈 때문이야. 그놈이 우리 공작님한테 주제에도 안 맞는 약혼을 하자고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루시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의 감성으로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역시 귀족들의 세계는 어려운 것 같다.
“체이스를 없애야 해. 체이스를 제거하고 나면 우리 공작님도 황태자를 만날 일이 없어지고……. 원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루시아가 박수를 쳤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체이스를 제거하느냐다.
어떻게 해야 체이스가 아가사에게 집적거리지 않느냐!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체이스는 이전 결혼을 무효로 만들면서까지 아가사에게 들이대고 있는 인물이다.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 가에 추문이 생기면……?”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추문?”
“그, 왜. 멜리슨이라는 둘째 있잖아.”
루시아가 그녀에게 집적거리던 이를 떠올렸다. 눈빛이 탁해 보이고 금방이라도 무슨 사고를 칠 것 같았던.
“그 망종!”
엠마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하녀인 우리가 어떤 추문이 생기게 만들 수 있을까?”
“약점을 찾아내서 고발하면? 체이스하고는 달리 먼지가 수북할걸?”
“좋은 생각이야. 똥물에 담가 주자고.”
루시아와 엠마가 손을 마주쳤다. 이렇게 쿵짝이 잘 맞다니!
“엠마는 공작님을 모셔야 하잖아! 내가 멜리슨을 한번 쫓아다녀 볼게.”
루시아와 엠마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라, 데이먼 백작 가! 우리 공작님을 울린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루시아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젬이 동그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젬의 코가 씰룩거렸다.
루시아의 수상하고 은밀한 외출이 시작되었다.
* * *
계속 우울해하고만 있을 순 없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루 종일 침대를 뒹굴거렸더니 기분도 나아졌고.
어제 나엘은 나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다. 다시는 체이스나 황후가 쉽게 접근하지 않을 거라나.
에라이, 더러운 세상.
그리고 나엘의 호언장담은 금세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황실의 청혼서가 슈타디온에 도착한 것이다. 황태자와 함께.
“아가사.”
아가사는 왠지 모르게 복잡한 기분으로 나엘을 맞이했다.
내가 수락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등이 떠밀린 기분? 아니, 그게 사실이긴 하지.
“반갑지 않은 표정이군.”
“뭐…….”
부정하진 않겠다. 나엘의 손에 들린 서류를 눈이 빠지게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엘의 반대 손에는 작은 강아지가 들려 있었다.
“히샤는 반가워요.”
히샤가 나를 향해 열렬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한동안 못 봤더니 더 귀여워진 것 같네.
나엘이 히샤를 내 품으로 넘겨주었다.
“끼이잉! 낑!”
열렬하게 내게 매달리는 히샤를 꼭 끌어안았다.
“그간 잘 지냈어? 어쿠, 어쿠. 그랬어어? 할 말이 그렇게 많았어어?”
“끼이이이잉! 깡! 깡!”
“맞아, 맞아! 나도 보고 싶었어! 아주, 아주 많이!”
“까앙!”
히샤가 격하게 내 얼굴을 핥았다. 아주 세수를 시켜 줄 기세였다.
나와 히샤가 그간의 회포를 풀고 있는데 나엘이 무언가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히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히샤를 바닥에 내려놓은 나엘이 나를 힐끔 보곤 속삭였다.
“……방금 거기 핥았어.”
“네?”
나엘이 히샤를 턱짓했다.
“아래 말이야, 아래.”
“…….”
아래라면……. 그리고 저런 찝찝한 얼굴이라면…….
히샤, 그러는 거 아니야!!
갑자기 얼굴에서 강아지 쉬야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저, 세수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얼마든지.”
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면 몰랐을까 알고 나니 찝찝해서 살 수가 없었다.
“엠마! 엠마, 어디 있어!”
흑흑, 나 지금 히샤한테 능욕당했어!
다 이를 거야!
* * *
[나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았어!]
나엘의 말을 듣고 있던 히샤가 반발했다. 나엘은 시큰둥한 얼굴로 히샤를 밀어 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나는 지엄한 신수야!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내가 다 봤는데.”
히샤가 뜨끔했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그랬어, 나도 모르게! 그걸 꼭 창피하게 콕 짚어서는……!]
히샤가 캬르릉거리며 나엘을 위협했다. 그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메에리, 메리! 또리!]
삐졌다는 걸 어필하곤 도도도도 달려가는 작은 뒷모습을 나엘이 응시했다.
본디 신수는 야생 짐승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히샤는 그런 습성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을 잃긴 했지만 신수가 가득한 이곳이 편안한가 보다.
나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에 기거하고 있는 모든 신수가 편안한 모습이었다.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그리고.
“저건 뭐야.”
못 보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나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실은 마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법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종 자연재해에 대한 방비와 피해 수복 등에도 항상 마탑이 동원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장 자주 마주쳤었던 게 바로 저기에 있는 ‘이브라임’이었다.
마탑의 이단아. 매번 오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던.
그런데 편안한 자세로 정원에 누워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나엘이 열심히 제 일을 하고 있던 정원사를 불러 세웠다.
“네, 황태자 전하!”
“저 마법사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저런 모습으로?”
정원사가 고개를 돌려 이브라임을 보았다. 이제는 이브라임이 저러고 있는 것도 익숙했다.
정원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슈타디온에 오신 입주 마법사이십니다!”
“입주……?”
“네! 공작님께서 신수님들을 거두시는 일을 시작하신 이후로 마법을 써야 할 일이 많아졌거든요. 민원도 종종 들어왔었고.”
“그래서 마법사를 눌러 앉혔다?”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무언가 천년의 연적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
사실 나엘은 여태까지 이브라임과는 크게 부딪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브라임의 평판이 어떠하든 간에 그는 일 처리가 아주 빠르고 깔끔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나엘은 이브라임과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호의가 전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지내신 지 꽤 되셨는걸요?”
“그래?”
나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불쾌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곧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치장을 새로 하고 내려오던 아가사와 정원에 있던 이브라임이 마주친 것이다.
이브라임이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곤 아가사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이내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브라임의 성격상 귀족에게 저렇게 곁을 줄 리 없는데.
아니, 애초에.
그 ‘이브라임’이 ‘귀족’ 가문에 상주한다? 그 또한 말이 안 될 일이었다. 분명 어떤 속셈이 있는 것이다.
나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왠지 두 사람을 멀리 떼어 놔야 할 것 같았다. 나엘이 두 사람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나엘을 발견한 건 이브라임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사와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젤리가 발바닥을 허락했다고? 드디어……! 축하해.”
아가사가 손뼉을 짝짝 쳤다.
그간 이브라임의 노고를 알고 있었던 탓에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들었다.
젤리와 친해지겠다고 그 앞에서 뒹굴고 잼잼 하면서 재롱을 부리던 이브라임의 모습이 눈 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곧 있으면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이브라임은 나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뒷말에 더 강세를 주었다. 그 순간에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이브라임과 나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아가사.”
아가사의 뒤에 서 있던 나엘이 그녀를 불렀다.
“아, 황태자 전하.”
천천히 뒤를 돈 아가사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것도 이거 나름대로 심장에 해로운데……?’
한 프레임에 담고 싶지 않은 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
아가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을 두고 아가사는 자리를 피해 주고 싶었다.
이브라임과 나엘은 절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았다.
이브라임은 높은 신분 출신을 싫어한다. 그리고 나엘은 자신을 꺼리는 자를 좋아할 만큼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전쟁터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석의 양극단 같은 사이랄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야말로. 마법사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지. 내 ‘약혼녀’의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