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원작의 법칙에 따르면 다치는 건 내가 아니라 루시아가 아닐까 싶은데.
“저를요?”
“혹시 모르니까 혼자 돌아다니지 마. 그리고, 멜리슨이 또 다가오면…….”
“그러면요?”
“저리 꺼져. 드래곤볼 쪼개 버리기 전에.”
“예?”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라 해 봐. ‘저리 꺼져, 드래곤볼 쪼개 버리기 전에!!’ 이렇게. 위협적으로!”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리 꺼져, 드래곤볼 쪼개 버리기 전에……? 드래곤볼이 뭐예요?”
“그런 게 있어. 그리고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중요한 곳을 걷어차 버려. 할 수 있겠지?”
“에… 그래도 될까요? 저는 하녀고…….”
“내가 책임진다니까. 내가 백작보다 더 세.”
루시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해 볼게요! 저를 이렇게 믿어 주시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시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뭔가 좀 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일순 금색으로……?
엇, 어어어엇! 각성이 가까워진 건가!!
나와 전혀 다른 의미로 흥분한 루시아가 재차 결심했다.
“제가 공작님을 지켜 드릴게요!”
내가 지켜 준다니까.
우리 여주인공은 탄탄대로 걸으면서 남주들 거둬 가야지.
“루시아도 혼자 다니지 말고.”
“네!”
그나저나 데이먼의 멜리슨이라. 얘 성격이 어땠더라.
바빠죽겠는데 찌끄래기까지 난리야. 자기 계발 좀 해 보겠다는데 도움이 안 되네.
쯧.
* * *
이번에는 내가 다비드를 찾기도 전에 그가 나를 찾아왔다. 다비드가 왔다는 건 신전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냈다는 거겠지?
안그래도 원작에서 부정부패로 유명한 신전을 뒤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다비드가 충직한 얼굴로 결과를 보고 했다.
“공작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신전에 사람을 보내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전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금난? 황실에서 지원도 해 주고……. 분명 기부금 같은 것도 걷을 텐데.”
물론, 나로서는 아주 잘된 일이지만. 내가 주는 돈이 좀 더 효용성이 있을 거라는 거잖아.
사실 신전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이유는 대충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신전은 친황제파였는데 황제의 야욕을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황제에게 군자금을 대고 있었고 덕분에 재정이 파탄 났을 것이다.
물론 재정난이라고 해서 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신관이 욕심 많고 멍청한 탓이지, 뭐.
신관들은 수습 신관, 일반 신관, 수석 신관, 대신관으로 나뉜다.
개중 수석 신관 이상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다. 걔들이 자신이 갖는 걸 포기할 리 없으니 어떡하겠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신관과 황제의 만남이 잦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는 듯한데 거기까진 알아내기 어려웠습니다.”
깊게 알 필요는 없지.
“좋아.”
“신전에 기부금을 지금 내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적당한 때가 올 거야. 그때부터 신전에 기부금을 낼 생각이었는데…잠깐만.”
눈을 가늘게 떴다.
신전의 대주주로 등극해야겠는데 언제가 좋을까. 루시아가 신전에 들어갈 때? 아니면, 미리미리?
흠. 아무래도 앞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루시아가 들어가는 게 좋겠지?
“아니다, 다비드 경, 지금 당장 진행해 줘. 대신관을 직접 만나서 생색이란 생색은 잔뜩 내 줘.”
“네, 공작님.”
“기부금의 액수는 대신관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려고 하는데… 내 목적은, 다비드 경.”
활짝 웃었다.
“중앙 신전의 검은 손이 되는 거야.”
“검은 손이요?”
“숨겨진 실세. 중앙 신전을 이 손으로 주무르고 싶어. 이해했지?”
다비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유는 묻지 않았다.
“네! 이해했습니다.”
“큼. 그리고… 요새 많이 바쁜가?”
“하하.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공작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비드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로군.
뭐랄까.
화려한 주인공들만 보다가 다비드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달까. 사실 나엘이나, 이브라임, 루시아는 머리와 눈부터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비드는 색상값부터 편안하잖아.
그리고 다비드의 미소는 유독 순한 편이었다. 저런 얼굴로 슈타디온의 사업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새로운 사업을 같이하자고 하기엔 내가 양심이 없는 거지. 그렇다고 지금 있는 사업체를 내가 맡아서 하기엔 너무 아는 것도 없어서…….
“고마워, 다비드 경.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비드 경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내 말에 감동 받은 듯 다비드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환하게 웃었다. 하여튼, 예쁘다니까.
자, 그러면 내 사업 파트너는 어디에서 구한다?
* * *
다비드가 신전의 문을 두드렸다.
다비드는 여러모로 유명한 편이었다. 현 슈타디온 공작의 심복으로서 재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인물 아니던가.
평민 출신이었지만, 아가사의 줄을 타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가사를 대신해서 모든 사업을 맡고 있는 데다가 훈훈한 외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젠트리 계급의 딸들이 다비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사교계 유명 인사가 나타나니 신전도 술렁였다. 여성 신관들이 창문에 매달려 다비드를 구경할 정도로.
“안녕하십니까.”
많은 신관 중에서도 다비드를 안내하게 된 것은 일반 신관 중에서도 권력을 잡고 있는 프레니였다.
프레니는 대신관의 양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프레니가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아, 대신관을 뵙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대신관님은 아무나 뵐 수 없습니다. 먼저 약속을 잡으신 이후에나…….”
“기부금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습니다만. 슈타디온 공작님께서 정기 기부에 관심을 보이셔서요.”
“기부금……!”
프레니의 눈이 커졌다. 그런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슈타디온이라니! 대신관도 화장실에 있다가도 달려 나올 이야기였다.
“잠, 잠시만 기다리세요!”
프레니가 신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대신관의 허락은 고작 3분 만에 떨어졌다.
다비드는 곧장 가장 화려한 알현실로 안내되었다.
조금 기다리자 대신관이 들어왔다. 흰색 로브에 금색으로 자수가 놓여진 옷을 입고 있었다. 대신관의 인자한 미소 속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마엘리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마엘리스 신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대신관이 다비드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뭐라 불러 드리면 될까요?”
대신관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저 다비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다비드.”
대신관이 다비드의 이름을 입 안에 굴렸다. 프레니가 호들갑을 떨어 댈 만한 인물이었다. 키도 크고 잘생긴 것이 신전 안에서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네, 대신관님. 저는 오늘 슈타디온 공작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프레니 신관에게 가벼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정기 기부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다고?”
“그렇습니다, 대신관님. 슈타디온 공작님께서는 깊은 신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정기 기부를 통해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하세요.”
“마엘리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대신관이 묵주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슈타디온 공작님의 깊은 신실함에 마엘리스 신께서도 탄복하실 겁니다.”
“슈타디온 공작님은 배포가 크신 분이십니다. 깊은 신실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금액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관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슈타디온의 의도를 이해했다. 이럴 경우 바라는 게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신전의 돈은 물처럼 빠져나가는데 들어오는 건 한미한 이때 슈타디온의 재력이 더해진다?
‘어린 공작이 돈 쓰는 재미를 알았다더니.’
거기에 신전이 편승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대신관 입술이 욕심으로 단단히 굳었다.
“하하, ‘바라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신께서 공작의 소원을 들어주실 겁니다.”
“공작 각하의 소원은 ‘나중에’ 빌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밑밥을 깔겠다는 거로구만. 무엇이든 괜찮지.’
대신관이 생긋 미소 지었다.
“바라시는 대로. 마엘리스 신께서는 기다려 주실 겁니다.”
협상은 끝났다.
* * *
황후가 드디어 체이스를 불러들였다. 체이스가 비스듬히 웃었다. 요새 멜리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실 웃으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떠보았을 때 슈타디온 공작과 진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체이스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얼마 전에 그의 손아귀에서 아가사를 낚아채던 황태자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그의 먹잇감을 다른 포식자가 훔쳐 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다.
체이스를 마중 나온 시녀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일러스 황자 전하와 함께 계십니다.”
“오, 오랜만에 조카님 얼굴을 보겠군. 안내하게.”
“네, 이쪽으로 가시지요.”
시녀장과 체이스가 온실에 도착했다. 유독 로살린 황후가 좋아하는 온실이었다. 온실 가득히 피어 있는 꽃 냄새가 체이스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