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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22)화 (22/90)

#22화.

이브라임이 이 고루한 마탑에 처박혀 있는 것도 전부 대마법사 덕분이었다.

가진 것 없는 어린 애를 거둬 이곳에 보내 준 것은 감사한 일이나, 이브라임의 인생을 조종하려는 건 틀렸다.

“이브라임 님, 다시 생각해 보세요. 눈앞의 탄탄대로를 버리시겠다고요?”

수습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저는요? 저도 곧 있으면 정식 마법사 칭호를 얻는데! 아무도 절 받아 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브라임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가끔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모르겠어. 짐이나 싸.”

“네?”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짐이나 싸라고. 설마, 나를 혼자 보내려고?”

이브라임이 눈썹을 씰룩였다. 수습 마법사가 눈물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저를 생각해 주시기는 하시는……!”

“네가 없으면 귀찮은 일은 누가 해. 일단, 정리하고 있어.”

감동이 와장창 깨어졌다.

이브라임이 날카롭게 눈을 번뜩였다.

“담판 짓고 올 테니까.”

이브라임의 가출 선언 사건의 전말이었다.

상황은 아가사가 바라는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양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 * *

빼꼼.

새하얀 토끼가 코를 씰룩거렸다.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여자에게서는 부드러운 햇빛 냄새가 났다.

고개를 갸웃하던 토끼가 루비를 연상시키는 눈동자를 굴렸다.

왠지 옆에 있으니 잠이 솔솔 오는 것 같았다. 한창 신나게 놀았으니 낮잠을 잘 시간이기는 했다.

토끼 신수, 젬은 루시아의 옆을 비집고 누웠다. 젬이 도롱도롱 잠에 빠져들었다.

“젬!! 이 녀석, 젬!!”

젬을 돌보는 사육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이 귀여운 악동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질 않는다.

토끼는 본디 잡식성이다. 철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다행히 젬은 신수라 먹진 않았는데 죄다 씹어 놓곤 했다.

사육사가 엉망진창이 된 서재를 보곤 부들부들 떨었다.

‘어, 어떡해……!’

젬과 사육사가 지내던 곳에서 쫓겨난 것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귀 서적과 중요한 서류들을 젬이 전부 씹어 놓았었다.

덕분에 열이 받은 자작이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젬을 이곳으로 직접 데리고 온 건 사육사였다. 갈 곳 없었던 그녀가 슈타디온에서 머물 수 있게 된 건 젬 덕분이었다.

그런데 젬이 쫓겨난다면?

사육사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끌어 모았다. 수십 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주범은 고개조차 내밀지 않고 있었다.

울먹이며 찢어지고 구겨진 것을 펴고 이어 붙여 보았지만 귀한 책들은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어떡해……. 흐으… 젬, 얘는 어딜 간 거야…….”

겁먹은 사육사가 눈물을 퐁퐁 쏟아 냈다.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신수들에게 자비롭기로 유명한 슈타디온 공작이라고 해도 이런 걸 참아 줄까?

사육사의 10년 월급을 가져다줘도 복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사육사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강아지 메리와 또리, 그리고 고양이 젤리를 대동한 아가사 공작이 눈앞에 있었다.

이 자리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사육사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어, 이건… 이건 절대로……. 저, 절대로…….”

머리가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육사가 벌벌 떠는 것을 아가사가 무심하게 응시했다.

“깡!”

오히려 메리와 또리가 사육사에게 달려와 머리를 비볐다. 그 온기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달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메리와 또리도 바닥에 널린 것들에 흥미를 느낀 듯 사육사가 치마 아래로 숨기기 위해서 노력하던 잔해들을 이로 물고 끌어당겼다.

바사삭, 바사사삭.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마치 사육사의 멘탈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어휴. 재밌어?”

아가사가 피식 웃고는 두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끼이잉!”

“깡!”

자신들을 놓으라는 듯이 발버둥 치는 아이들을 아가사가 고쳐 안았다.

그 순간, 사육사는 예전에 들었던 아가사의 수많은 악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 날 산 채로 튀겨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하녀의 예상과는 달리 아가사는 태연했다.

“젬이는?”

“네?”

“젬이가 안 보여서.”

“모, 모르겠어요. 분명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있을지도…….”

“그럴 만한 나이지.”

아가사가 미소 지었다.

“이곳은 사서가 정리할 거야. 이만 나가서 젬이 찾아봐.”

“네……?”

그게 전부라고? 아, 젬이를 찾아서 같이 나가라는 거구나. 하녀가 고개를 붕붕 저으려 할 때였다.

“곧 있으면 젬이 식사 시간이잖아. 찾아서 밥 먹여야지. 얼른 가.”

정말로 이게 끝이라고……? 사육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도 사육사는 아가사의 마음이 변할까 속도를 빨리했다.

사육사가 사라지고 아가사가 서재를 둘러보았다.

“아주 엉망진창이네.”

발버둥 치는 강아지들을 결국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바바바박!

신이 난 메리가 종이를 파헤치고 놀았다. 어차피 엉망이 된 거 신났으면 됐지, 뭐.

“이 책들을 도로 구하려면 얼마나 들려나.”

역시 동물들을 키우는 것도 보통 돈 드는 일이 아니다. 아가사가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휴. 언니 어깨가 무너지겠어, 욘석들.”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를 강아지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그게 바로 아가사의 행복이었다.

* * *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으으음…….”

아가사 공작은 루시아를 위해서 방 한 칸을 내어 주었다. 그녀가 회복할 때까지 쉬어 가라고 했다.

‘정말 좋은 사람.’

루시아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서든 이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그 이전에 코델리아 부인을 찾는 게 먼저였다.

루시아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코델리아 부인은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모함이다. 그런데 루시아에게는 그것을 밝혀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제부터 루시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비비적.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작고 하얀 생물체가 옆에 누워 있었다. 길고 하얀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너는…….”

이곳은 슈타디온이다. 슈타디온이 요새 동물들을 돌보고 있다고 들었다. 능력을 잃은 신수들을 위한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나.

그렇다면 여기에서 지내는 동물 중에 한 마리일 것이다.

젬이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정말 예쁜 눈동자네. 루비 같아.”

젬이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젬이가 루시아를 응시했다.

“너는 이름이 뭐니?”

젬이가 코를 씰룩거렸다.

“나는 루시아라고 하는데.”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젬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손바닥에 고개를 비볐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한결 외로움이 가시는 것 같았다.

“우리 친구 할래?”

젬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코로 루시아의 손바닥 냄새를 맡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루시아의 손바닥에 앙증맞은 엉덩이를 얹었다.

“뭐야. 약속하는 거야?”

루시아가 까르륵 웃었다. 마음이 따뜻했다.

루시아는 붉은 눈의 흰 토끼에게 홀라당 반해 버렸다. 이 또한 절대로 아가사의 의도는 아니었다. 아가사가 모르는 곳에서 운명은 부지런히 실을 자아내고 있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 * *

한편, 황태자의 궁.

렌디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코델리아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병이라도 확보해.’

‘그 여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황태자의 여러 비밀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 렌디아, 나는 그 여자가 필요해. 내게 코델리아를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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