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4)화 (4/90)

#4화.

나는 소시민 김유나가 아니라 슈타디온 공작이다, 슈타디온 공작. 아가사다, 아가사.

그런 주문을 속으로 외우면서.

“슈, 슈타디온 공작님? 부, 분명 아프시다고 들…….”

“다 나았네. 지금은 이렇게 멀쩡하지.”

나 이 정도면 여우주연상감 아니냐.

연기 너무 잘해.

완전 공작 같았지, 방금?

“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 강아지. 두고 가려는 거잖아. 아니야?”

여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나 보네?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천천히 강아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여자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그러고는 도망쳐 버렸다.

뭐야, 미친X인……. 큼. 어디 아픈 여자분인가.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품에서 동그랗게 몸을 마는 작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그렇게 순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아는 거겠지.

동물들이 말을 못 한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강아지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새로운 출발은 새 이름부터.

“네 이름은 또리다, 또리.”

아주 똘똘하게 생겼네. 겁먹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금세 좋아질 거다. 내가 있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아가. 너는 앞으로 나하고 아주 행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

검은 눈과 새하얀 털이 매력적인 또리. 생긴 게 메리랑 더 닮아서 마음이 갔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엠마가 뒤에서 한마디 덧붙였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요즘 이런 일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를…….”

“이런 일이 많다고?”

음. 할 거 없으면 그거나 해 봐……?

* * *

“이걸 정말 하시려는 건가요?”

엠마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응. 멋지지 않아?”

며칠 동안 방에 박혀서 나의 구상을 계획서로 옮겼다.

“……특이하기는 하네요. 그리고 특이하고. 또 특이해요.”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의미지?”

“어떤 귀족도 이런 생각을 하진 않을 거예요. 생산적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도 있어요.”

엠마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럼 뭐 어때?”

“네?”

“나 아가사잖아.”

돈 많고 작위도 빵빵한 안하무인 악녀, 아가사.

근데 못 할 게 뭐가 있어?

“맞네요. 요새 공작님이 너무 천사 같아지셔서 깜빡했어요. 공작님은 아가사 공작님이었죠!”

엠마가 새삼 놀랍다는 듯이 말하고는 까르륵 웃었다. 이거 묘하게 돌려 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뭐, 어쨌든.

아가사의 악명이 나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텐데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람.

“내가 보통 이런 일을 할 땐 누구를 부르더라?”

아가사의 일을 대신 해 주던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기억날 듯 말듯 한데. 기억상실 모토에 충실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아. 뭔가를 하실 때. 그러니까 큰돈을 쓰려고 하실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을 열심히 읽기는 했는데 아가사가 주인공이 아니니만큼 계략을 꾸미는 것 외에는 제대로 나온 것들이 없었다.

아가사의 악녀 역할에 충실했던 거지.

그러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들이 많았다.

“음. 그럴 때는 보좌관인 다비드 님께 맡기셨었어요.”

다비드?

나 얘 알아.

소설 속 슈타디온 가문의 충복이자 아가사가 나쁜 짓을 생각할 때마다 그걸 도맡아서 해 주던 사람이었다.

소설 읽으면서 대체 왜 저렇게 맹목적인가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당시 독자들의 주된 반응 중 하나가 그거였다. 아가사 이 못된 년이 저주 같은 거 건 거 아니냐고.

그 못된 년이 나네.

“그럼 다비드를 불러 줘.”

“정말 하시려는 거죠?”

엠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차 물었다. 쓸모없는 걱정이라니까.

“그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이겠어.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다음 날, 다비드가 바로 슈타디온으로 왔다.

* * *

사락사락.

내가 만든 사업 계획서를 다비드가 꼼꼼히 살피는 소리만이 집무실에 가득했다.

뭔가 팀장님한테 결재받을 때의 기분이랄까. 다비드가 눈을 깜빡이는 속도와 깃펜을 움직이는 모습까지 신경 쓰였다.

아니,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해?

내 돈 쓰겠다는 건데!

내가 그 돈을 바다에다가 퍼붓겠다고 해도 내 마음 아니겠…….

“재밌을 것 같군요.”

보는 눈이 있구나, 자식.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다비드의 모습에 내 마음이 빈대떡처럼 뒤집혔다.

“이 일이 처음에는 배척받을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슈타디온의 이미지도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제국에서 반려신수들이 능력을 잃은 이후로 버림받는 일이 흔히 있으니까요.”

암, 암.

내가 그런 것도 다 고려해 봤지. 공손히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꼬고 몸을 의자에 붙이고.

“반려신수들이 일반 동물로 변하고 나서는 버림받거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요. 분명 좋은 사업이 될 겁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세요.”

아휴. 칭찬이 과해. 거기까지만 하고 넣어 둬.

“큼. 그래서 이걸 이렇게 하고….”

신이 난 나는 내가 세워 놓은 플랜을 A부터 시작해서 Z까지 전부 꺼내 놓았다.

다비드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다비드는 짧고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에 가로로 긴 눈을 지녔다.

웃을 때마다 리트리버가 연상되는 생김새랄까. 그렇다고 위험한 냄새가 나는 건 아니고 우유 냄새가 풀풀 날 것 같이 생겼다.

배신과는 거리가 아주 멀 것 같은?

소설에서는 악녀인 아가사를 도와서 별짓 다 하던데. 충성심의 잘못된 발로였던 걸까?

“공작님이 하시는 일은 당연히 전부 돕겠습니다. 한동안은 이 일에 전념하시려는 걸까요?”

“응, 아무래도. 제대로 하려면 그래야겠지?”

“……그러면 황태자 전하는요?”

“황태자? 황태자가 왜.”

여태 부드럽게 빛나던 다비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한낮의 바다가 밤바다로 물드는 것 같은 변화랄까.

묵직해진 시선이 나를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 사람을 붙이신 일 말입니다.”

다비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 그건…….”

내가 그런 짓도 했어?

아가사. 그거 범죄야! 얘가, 얘가 법 무서운 줄 모르고!

후우.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우물에 대고 소리 지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건 그만둬야지. 어휴.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돼. 아니, 절대 하지 마.”

“어째서……?”

“나 이제 황태자 안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다비드도 그렇게 알아.”

일순 다비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다비드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러면 비밀의 방도 없애시는 겁니까?”

비밀의 방?

그게 뭔데. 해X 포X에서 나온 것처럼 거대한 뱀이라도 키우는 건가?

내게 힌트를 줘, 엠마.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애야 한다는 뜻인가?

“커흠. 그래야지. 그것도 없애야지.”

다비드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산책 1시간을 하고 또 1시간 더 하자는 말을 들은 리트리버 같았다. 정말로.

다비드는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논의하고는 돌아갔다.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정말 잘 생각하신 겁니다, 공작님. 앞으로는 황태자하고는 말도 섞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다비드의 눈빛에 나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는 아가사가 황태자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질투.

아가사는 다비드에게 저주 같은 걸 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협박을 하거나 계약을 한 것도 아니었고.

너, 이 자식. 아가사를 좋아했구나.

아가사를 향한 사랑이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다비드에게는 미안하게 됐다. 그가 사랑했었던 아가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 *

내가 다비드가 말했던 비밀의 방을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쯤 지났을 때였다.

내 꿈이 실현된다는 행복함에 빠져 비밀의 방에 대해서 미처 잊고 있었는데, 다비드가 반드시 그 방을 없애야 한다고 편지까지 보내왔기 때문이다.

손에 들고 있었던 다비드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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