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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9)화 (434/486)

제199화

행여나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이 줄어들까 전전긍긍하는 인성이 어찌나 저열한지 트레시에게서 코끝을 찌르는 악취라도 풍기는 듯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의 멱살이라도 잡아 입을 틀어막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지만, 그의 말을 끊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입 닥쳐, 형!”

트레시에 입에 냅다 주먹을 메다꽂은 레미가 씩씩거리며 제 형을 노려본다.

“어머니한테 그게 무슨 쓰레기 같은 말이야!”

내 기준으로는 속삭임에 가까운 외침이었지만, 늘 제 형에게 주눅이 들어 있는 데다 천성이 소심한 레미치고는 매우 커다란 목소리였다.

“뭐, 뭐라고?”

레미의 반항에 적잖이 놀랐는지, 트레시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쩌억 벌리며 눈을 부라린다.

“어머니를 상처 주는 그 쓰레기 같은 입을 다물라고 했어.”

그러나 레미는 트레시의 사나운 눈빛에도 기가 죽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형, 입냄새 나.”

“감히 누가 누구에게 쓰레기라는 거야! 나는 영광된 글래스턴을 물려받을 후계자다!!”

레미의 말에 귓불을 붉힌 트레시는 쿵 발을 구르며 레미의 마른 어깨를 밀쳤다.

“넌 내게 복종할 의무가 있는 차남에 불과하다고!”

“그까짓 영지, 나는 줘도 안 가지고 싶으니까 형이 다 가져. 그러니까 제발 꺼져.”

자신을 밀치는 트레시의 팔을 붙잡은 레미는 힘의 반동을 이용해 그를 뒤로 밀어 버렸다.

“두 번 다시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말란 말인데 못 알아듣겠어?”

“멍청한 놈. 황제 폐하께서 새로이 이끌 제국에 어머니가 설 자리는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지금 어머니 편에 섰다가는 너도 평민으로 끌어내려질 수도 있다고.”

트레시는 레미가 불쌍하다는 듯 혀까지 끌끌 차다 한숨을 내쉬며 레일라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도 한마디 하시죠. 귀머거리 모친을 뒀다고 레미까지 신분을 잃어버리게 두실 겁니까?”

빈정거리는 트레시의 말에 레일라는 기다렸다는 듯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

가냘픈 흰 손이 다소 거칠게 허공을 가른다.

짜악-!

“어머니!”

짜악, 짜악-!

“그만하세요! 피가 나잖아요!”

레미는 제 뺨을 스스로 내려치는 레일라의 행동에 기함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만 떠나렴, 트레시.”

그런 레미의 등을 달래듯 두드린 레일라는 차분한 얼굴로 트레시를 향해 턱짓했다.

“방금 내가 내 뺨을 스스로 내려친 것은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에 대한 응당한 값이란다.”

“……미치신 겁니까?”

“하지만 아이를 제대로 길러 내지 못한 죄가 고작 이 뺨 한 대로 씻겨지진 않을 테니, 나는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야겠지.”

레일라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트레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이제 성인이고, 성인은 아이와 달리 자신이 걷는 길을 선택할 권리도, 그 선택에서 오는 결과를 책임질 의무도 있는 법이라는 걸 기억하렴.”

“저는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약자를 향해 쥔 칼날은 언젠가 네게도 향할 거야.”

“버러지들의 칼날 따위 두렵지 않아요. 레미 너도 글래스턴령에는 얼씬할 생각도 하지 마.”

씩씩거리며 레일라의 말에 콧방귀를 뀐 트레시는 제 모친을 꼭 끌어안고 있는 레미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형이나 도노반령에 얼씬도 하지 마!”

‘잘한다, 레미!’

볼 때마다 나를 너무 집요하게 쳐다봐서 부담스러운 아이였지만, 오늘만큼은 아주 기특했다.

나는 끝까지 트레시에게 지지 않고 반박하는 레미가 기특해 마음의 손뼉을 치며 주머니를 뒤졌다.

“레미, 사탕 먹을래?”

“응!”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사탕을 상으로 받을 나이는 아니었지만, 레미는 눈이 커다랗고 체구가 작아 어쩐지 동생처럼 느껴졌다.

“아이, 귀여워.”

다람쥐같이 오동통한 뺨을 흔들며 대답하는 레미가 귀여워서 사탕을 쥔 손을 내민 순간,

탁-!

누군가가 내 손에 들린 사탕을 낚아채 간다.

“?”

아그작 아그작.

기가 막혀 뒤를 돈 나는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사탕을 씹어먹는 히스를 발견하고 헤 입을 벌렸다.

“히스, 사탕 그렇게 씹어먹으면 이 상해.”

“전 원래 이렇게 먹습니다.”

나는 무뚝뚝한 히스의 대답에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레미 줄 거였는데 네가 뺏어 먹으면 어떡해?”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눈이 돌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녀.”

‘응? 원래 단 거 안 좋아하지 않았나?’

심지어 사탕 먹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레일라와 레미 앞에서 히스와 아웅다웅 말씨름을 할 수도 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히스의 행동을 무시했다.

“……레미는 그럼 이 사탕 먹을래? 이게 더 커.”

내가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어쩔 수 없지.

별수 없이 다른 주머니를 뒤져 더 커다란 사탕을 꺼내든 나를 향해 레미가 떨떠름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안 먹을래. 나는 오래 살고 싶어.”

‘단 거 많이 먹으면 빨리 죽는다는 말인가?’

사탕 주는 사람은 나인데 왜 히스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

* * *

날이 밝기도 전에 글래스턴 백작과 트레시는 도노반령에서 쫓겨났다.

덕분에 백작이 관리하고 있던 벨네르니인들이 풀려났는데, 이사벨라는 다행히 그들을 도노반의 영지민으로 받아 주었다.

“벨네르니의 토속 종교를 인정해 주시면 그들이 빠르게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사벨라 님.”

터를 잃은 벨네르니인들을 영지민으로 받아들이는 건 하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차니아가 겪은 시행착오를 토대로 이사벨라에게 조언을 건네자,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는다.

“허어. 내가 북부의 조무래기 공작을 이렇게까지 부러워할 날이 올 줄이야.”

“아빠가 부러우시다고요? 왜요?”

“너처럼 영특한 아이를 자식으로 두지 않았느냐. 수로를 파내면 지반이 무너질 거라는 건 또 어찌 예측한 것이야?”

나는 이사벨라의 날카로운 질문에 음, 음 작은 허밍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백작님과 비슷한 수로 사업을 막무가내로 진행한 나라가 홍수로 큰 피해를 봤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거든요.”

‘사실은 원작에서 본 거지만.’

나는 혹시나 이사벨라가 내 속내나 정체를 의심할까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또, 도노반은 섬이 매립되어서 형성된 지역인데 그런 곳들은 지반이 약하다고 배웠어요.”

“사뮈엘이 네게 그런 것까지 가르쳤단 말이냐? 각 영지의 특성을 공부해서 무엇에 쓴다고?”

“제가 혼자 공부했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얼음 마탑을 세운 데다 ‘현자’의 칭호까지 받았으니 하차니아만 생각해서는 안 되잖아요.”

“허. 사뮈엘이 어린 여우 한 마리를 키워 냈구먼.”

말은 여우라고 흉을 보는 듯했지만, 나를 보는 이사벨라의 눈빛은 따뜻하다 못해 애틋하기까지 했다.

‘으음. 하차니아로 돌아가는 걸 막으려고 하면 어떡하지.’

슬슬 피어오르는 걱정에 이사벨라의 시선을 피하는데 그녀가 제 옆에 선 레미를 내게 툭 내민다.

“레미 이 녀석이 공녀를 무척 좋아하던데. 나이도 엇비슷하고…….”

“하, 할머님!”

“어떠냐, 레오노라. 나는 겨우 마법 지식이나 베푸는 째째한 사뮈엘과 달리 네게 도노반을 통째로 내줄 생각도 있는데.”

당황한 레미의 만류에도 이사벨라는 나를 자신의 손주며느리로 삼으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어쩐지 조금 안쓰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일라가 눈에 들어온다.

‘이사벨라는 자신과 달리 똑똑한 사람만을 좋아한다며 슬퍼했었지.’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사벨라는 제 딸인 레일라를 무척 사랑했으니까.

‘게다가 레일라가 트레시나 란스 글래스턴보다 백 배는 똑똑한걸.’

나는 씁쓸하게 웃는 레일라의 등 뒤로 오도도 달려나가 책장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이사벨라 님, 이 초상화는 누구 거예요?”

전에 봐 둔 액자의 정체를 묻자 이사벨라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내려놓거라! 남의 물건을 그리 함부로 만지면 쓰나!”

이사벨라가 내게서 액자를 뺏으려고 들었지만, 나와 가까이 서 있던 레일라가 먼저였다.

“제가 어릴 때 그린 초상화잖아요.”

빛바랜 초상화를 찬찬히 살핀 레일라가 의아하다는 듯 이사벨라를 돌아본다.

“이런 걸 가지고 계셨어요? 몇 년 전 저택에 불이 났을 때 전부 소실된 줄 알았는데요.”

“어쩌다 보니 그 초상화는 남아 있더구나. 서재에 있는 줄도 몰랐군.”

“에이, 거짓말!”

나는 이사벨라가 멋쩍은 볼을 긁으며 내놓은 대답에 액자를 가리키며 방긋 웃어 보였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보존 마법까지 걸어 두셨잖아요?”

나는 액자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을 느낀 후 말을 이었다.

“느껴지는 마나가 사뮈엘 대공 전하의 것 같은데 전하께 부탁까지 하셨나 봐요.”

“그, 그놈이 멋대로-!”

“에이, 거짓말.”

이사벨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놀리는 나를 괘씸하다는 듯 노려보다 레일라의 손에서 액자를 빼앗아 갔다.

“그래, 이 녀석아! 거짓말이다! 내가 내 딸 초상화를 간직 좀 하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이사벨라가 곧 허겁지겁 레일라의 어깨를 붙잡는다.

“아, 아니, 너는 또 왜 우는 게야?”

나는 흐느끼는 레일라와 당황한 이사벨라만을 남긴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모녀’가 화해했으니, ‘부녀’도 조우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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