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8)화 (433/486)

제198화

이불 속에 숨어 있던 헬렌을 발견한 레일라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당사자인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 또한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파렴치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귀부인이 나직하게 내뱉는 외마디가 숙연한 파티장을 울릴 뿐이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해 그녀의 비난을 들은 헬렌이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만요. 다들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보이는 상황으로만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헬렌의 변명에 기가 막혀 귀부인들을 따라 쥘부채로 입을 가린 채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다르게 보라는 거야?’

누가 봐도 불륜의 현장이 발각된 상황이 아니었나.

“백작님이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해서 살펴보고 있었어요. 바닥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침대 위로 넘어졌을 뿐이고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절거린 헬렌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레일라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제가 몸이 아픈 레일라의 온갖 수발을 들고 있다는 건 다들 잘 아시잖아요. 백작님을 보필하는 일은 아내인 레일라의 몫이지만, 레일라가 하지 못해서 제가 대신했을 뿐이에요.”

나는 헬렌의 말에 잔뜩 굳은 채 고개 숙인 란스를 노려보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이사벨라 님, 도노반령은 원래 치료를 발가벗고 해요?! 신기하다!”

내 감탄 어린 말에 사람들이 그제야 헬렌이 반라에 가까운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쯧쯧 혀를 차기 시작한다.

무슨 생각인지 큰 눈만 꿈뻑이고 있는 레일라를 지나쳐 앞으로 나선 이사벨라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찰싹!

순간 다리 힘이 풀렸는지 살짝 빗겨 간 그녀의 손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데, 얻어맞은 것이 억울하다는 듯 헬렌이 목소리를 높인다.

“왜 때리세요! 이사벨라 님이 뭐라고 저를 때리세요!”

“……고얀 녀석.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사정이 딱해 내 너를 친딸처럼 돌봤거늘.”

이사벨라의 서늘한 목소리에 헬렌은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움츠렸다.

“정말 친딸처럼 생각해 주셨다면 지금 제 따귀를 때릴 생각도 안 하시겠죠! 오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네 말을 믿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눈뜬장님인 줄 아는 게야?!”

이사벨라의 호통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발견한 헬렌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반박했다.

“만약 이사벨라 님 말대로 백작님과 제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고 해도, 전 잘못이 없어요.”

“뭐라고?”

“백작님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여자는 레일라가 아니라 저니까요!”

헬렌의 폭탄 발언에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글래스턴 백작이었다. 눈을 홉뜬 채 숨을 들이켜는 백작을 흘깃한 나는 움후후,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입매를 주먹으로 가렸다.

‘자신들의 부정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는 꼴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란스 글래스턴, 지금 헬렌이 지껄이는 말이 전부 사실인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백작에게 턱짓한 헬렌이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다.

“이, 이사벨라 님…….”

“사실이냐고 묻지 않나! 나와 내 딸을 여태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야!”

“기만이라뇨. 언사가 지나치십니다.”

이사벨라의 말꼬투리를 잡으며 백작이 대답을 회피하자, 헬렌은 당황한 얼굴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빨리 사실대로 말해요, 란스. 우리 떳떳하잖아요.”

“…….”

“레일라가 당신에게 결혼을 강제하기 전부터 우리는 사랑하던 사이었잖아.”

그런 헬렌의 정수리 위로 죽창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뚝 떨어진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헬렌. 레일라와 결혼하고 싶다고 간곡히 머리를 숙인 사람은 다름 아닌 란스 글래스턴이었다.”

“……뭐라고요?”

이사벨라의 말에 헬렌의 가녀린 얼굴에 금이 가든 말든,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은 이사벨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사벨라 님, 부디 저를 믿어 주십시오.”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

“이 여자가 저를 유혹하려고 계속 시도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게는 레일라밖에 없기에 뿌리쳐 왔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헬렌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벌어졌다는 백작의 주장에 이불만 몸에 두른 채 덜덜 떨고 있던 헬렌의 얼굴이 화드득 불타오른다.

“이 나쁜 새끼!”

“집안의 큰 어른이신 이사벨라 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망발이요, 레이디 헬렌!”

“이제 와서 네가 나를 모른 척한다고?”

“모른 척이라니. 방금도 몰래 침실에 들어와 혼자 옷을 벗지 않았소!”

헬렌과 백작은 제 주변에 몰려든 구경꾼의 존재도 잊은 듯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다툼을 시작했다.

“백작님이 정말 억울해 보이긴 하죠?”

“하긴. 양심이 있으면 백작 부인을 두고 외도를 저지를 리가. 다 무너져 가던 글래스턴 백작가가 도노반의 도움을 받아 번영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평소 이미지 관리를 잘해 왔는지, 자신은 억울하다는 백작의 주장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백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사벨라에게 매달렸다.

“이사벨라 님, 부디 제 결백을 믿어 주십시오!”

끝까지 당사자인 레일라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는 백작의 행동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 너만 빠져나가게 둘 줄 알고?”

주머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아티팩트를 작동시키자, 파티장 곳곳에 설치된 음성 증폭기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리석은 귀머거리 여자 따위 내 인생의 걸림돌일 뿐이야. ]

[ 내 심장은 너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않나, 헬렌. ]

백작은 홀을 가득 메우는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제, 제가 아닙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저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 나, 란스 글래스턴이 명예로운 글래스턴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번 사업만 잘 풀리면 레일라를 버리고 헬렌 너를 고귀한 백작 부인의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

이어지는 말소리는 증폭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화의 주인공이 헬렌과 백작이라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사벨라 님.”

“그 더러운 입에 감히 내 이름을 올리지 말게.”

이사벨라의 단호한 거부에도 무릎을 꿇은 채 그녀에게 다가온 백작은 창백해진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제가 레일라와 결혼하기 위해 감수한 것들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프란츠 황제 폐하께서 제게 직접 큰 자리를 하사하려고 하셨지만, 레일라 때문에 맡지 못했습니다!”

“……자네가 아쉬워하는 그 자리는 벨네르니 민족의 학살을 감행하는 ‘집행부’의 총괄 자리였지.”

나는 이사벨라가 백작을 쳐 내며 하는 말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국에서 집행부의 또 다른 별명은 청소부였다.

제국의 오염 물질을 제거한다는 의미였지만, 결국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노약자들과 윌레탄 민족이 아닌 제국민들을 나라에서 몰아내는 일을 수행할 뿐이었다.

‘원작에서는 그레고르가 진행한 정책이지만, 혹시 몰라서 대비해 놓길 잘했지.’

나는 아이네스의 잔인한 손속에서 하차니아를 구할 방도를 헤아리며 레일라 때문에 나라의 큰일을 맡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백작을 차갑게 노려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레일라 님 때문에 백작님이 일을 포기하신 거 맞나요?”

“그래!”

“에이. 그냥 백작님이 일을 못하셔서 폐하께서 제안을 거두신 게 아니고요?”

내 도발에 안 그래도 심적인 벼랑 끝에 서 있던 백작은 발작하듯 목청을 높였다.

“웃기지 마라! 레일라에게 귀머거리라는 흠만 없었어도, 글래스턴은 더욱 번영할 수 있었-!”

“배, 백작님, 이만하시지요.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백작의 말을 자른 사람은 내가 아닌 그의 측근 카터 남작이었다.

“정말 추하네요. 둘 다 인간이 덜되었군요. 몸 약한 아내를 두고 불륜을 저지른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사촌의 남편을 유혹하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거 아닌가요?”

백작이 입을 다물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와 헬렌을 대놓고 흉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 아내의 아픔을 흠이라고 싸잡는 백작의 말에 그나마 그의 편을 들던 사람들도 혀를 차며 레일라를 위로하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하녀에게 끌려가듯 퇴장하는 헬렌과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레일라의 손을 붙잡았다.

‘결국 백작은 끝까지 레일라에게는 사과하지 않았어.’

“난 괜찮단다, 레오노라. 고마워.”

그 사실에 화가 나 분개하는 나를 알아차린 듯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어머니가 아버지를 이 정도로 모욕하실 수 있어요!”

사람들이 조금 물러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트레시가 거친 호흡을 숨기지 않고 레일라에게 달려든다.

자신이 물려받을 글래스턴의 입지가 줄어들기라도 할까 잔뜩 조바심을 내는 얼굴이었다.

‘저러고 등장할 줄 알았지.’

“글래스턴의 명예가 곤두박질치게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이러고도 글래스턴 백작 부인이라고 하실 수 있는- 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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