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사나운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 글래스턴 백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는다.
“너는… 아, 그래. 하차니아의 막내딸이로구나.”
나는 나를 알아봤다는 듯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리는 백작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네 오라비가 내 아들의 왼팔을 부러뜨렸다지.”
나와 내 옆에 선 에녹을 번갈아 바라본 글래스턴 백작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다.
“야만성은 벨네르니인들에게나 많이 발현되는 특징인데……. 북부에 유전자 검사의 도입이 시급하겠군.”
북부는 실제로 벨네르니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벨네르니인이 많이 섞여든 곳이었다.
‘하지만 개국공신인 하차니아를 의심하다니.’
내 피에 다른 민족의 피가 섞였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차니아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백작의 심보가 얄밉긴 했다.
“아이들은 실수하면서 크는 거랬는데.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뭐?”
“아돌프 박사님의 우생학 이론이라면 저도 마탑에서 살펴본 연구예요. 박사님 이론에 따르면 다혈질도 벨네르니인의 특징이라던데!”
너 속이 많이 좁구나? 게다가 다혈질이기까지 하다니!
하며 비꼬는 내 말에 글래스턴 백작이 우악스레 인상을 찌푸린다.
“순혈 윌레탄인이 자명한 글래스턴인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발칙한!!”
백작이 상황도 잊고 내게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레일라 님의 약을 챙겨 드릴 시간이에요. 백작님, 이사벨라 님.”
백작과 이사벨라 사이에 끼어든 헬렌-불륜녀-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럼 전 레일라 님께 가 볼게요.”
레일라의 이름을 언급하자 백작은 그제야 이성을 찾고 숨을 가다듬었다.
“당신이 고생이 많소, 헬렌. 내 아내를 보살펴 주어 고맙네.”
그는 이사벨라 앞에서 헬렌의 노고를 치하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일라는 여러모로 저희를 걱정시키는군요, 이사벨라 님.”
“……그래. 헬렌과 자네가 레일라를 알뜰히 살펴 주어서 다행이지.”
이사벨라의 떨떠름한 대답에 글래스턴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준비한 사업안을 꺼내 들었다.
“아, 제가 보낸 수로 사업안은 한번 살펴보셨을까요? 도노반령과 글래스턴령, 양쪽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입니다. 폐하께서도 지원을 약속하셨고요.”
그러나 이미 글래스턴 백작의 계획을 간파한 듯한 이사벨라가 미간을 모으며 백작에게 손을 내젓는다.
“결과적으로는 영지 한복판에 구멍을 내자는 말이 아니냐. 영지민들이 그만 한 피해를 감당하게 할 수는 없어.”
“……네, 그렇죠. 막대한 수익보다는 영지민들의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는 영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충성스러운 영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사벨라의 걱정을 반박하는 글래스턴 백작의 말에 코를 찡긋했다.
‘무너질 지반이 글래스턴 백작령이었다면 누구보다 난리 칠 인간이 말은 잘하네.’
이사벨라가 백작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반박하려는 듯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여는 순간,
“저도 이사벨라 님과 레일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습니까.”
백작이 먼저 선수를 치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귀머거리인 아내를 서부 사교계에 입성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닌 제 노고를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사벨라 님. 얼굴이 말이 아니질 않습니까.”
글래스턴 백작의 못생김은 딱히 피로가 원인인 것 같진 않았지만, 이사벨라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그래. 자네가 고생이 많다는 것을 내 모르는 건 아니지.”
“걱정했던 대로 레미의 한쪽 귀가 멀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황권이 바뀌어 온 제국이 흉흉한 시점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백작가의 명예가 얼마나 곤두박질칠지 모르겠습니다.”
“란스, 그게 사실인가?”
“네. 저도 절망스럽습니다. 아내에 이어 둘째 아들놈까지 귀머거리라뇨!”
글래스턴 백작이 한탄하는 말에 움찔한 이사벨라가 걱정 어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린다.
“레일라를 진찰했던 의사를 소개시켜 주겠네. 내 주치의는 늘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이니까.”
나는 백작을 위로하기 위해 손을 뻗는 이사벨라의 늙은 몸을 천천히 살폈다.
‘사뮈엘 대공과 비슷한 연배였으니 몸 이곳저곳이 말썽일 텐데, 주치의를 글래스턴령으로 보내 주겠다는 말인가?’
레미가 적잖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도 결국 레일라의 장애도 치료하지 못한 돌팔이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사벨라의 호의를 단번에 싹둑 자른 글래스턴 백작은 뾰족한 콧수염을 매만지며 제 손에 들린 사업안만 팔랑일 뿐이었다.
“레미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아비인 제 일이 잘 풀려야 하질 않겠습니까. 재고해 주십시오, 이사벨라 님.”
“……알겠네.”
나는 백작의 사업이 영 껄끄러운 눈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받아 드는 이사벨라의 행동에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레일라의 귀가 들리지 않는 걸 빌미로 백작이 이사벨라를 압박하고 있었구나.’
아들에게 장애를 물려줬다면 레일라의 죄책감도 심할 테고, 이사벨라는 제 딸이 남편에게 홀대를 당할까 두려워 백작의 편의를 봐주는 모양이었다.
‘다만 의문인 건…….’
* * *
나는 머릿속에 떠올린 의문을 천천히 정리하며 거칠지만 애정 어린 손길로 장미 나무를 가꾸는 이사벨라를 올려다보았다.
‘이사벨라가 식물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트레시에게 습득해 어찌어찌 정원에서 마주치는 것까지는 했는데,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네.’
무뚝뚝한 그녀는 내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뮈엘 대공 전하와 친구시라고 들었어요.”
나는 먼저 이사벨라와 나의 공통 지인을 언급하며 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도 대공 전하랑 친구거든요.”
“그놈과 네가 친구라고? 오래 살다 보니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구나. 대공은 결혼했다면 너만 한 손주가 있을 나이야.”
“우정에는 나이가 없다고 배웠어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은 이사벨라가 그제야 가위를 내려놓으며 나를 돌아본다.
“그래. 하지만 나는 대공과 친구 같은 게 아니란다. 오히려 원수에 가깝지.”
투덜대는 그녀의 말투에서 애정을 느낀 나는 방긋 웃으며 그녀가 정리한 장미 덤불에 코를 박았다.
“하지만 닮은 부분이 없지 않으신걸요.”
“나와 대공이 닮았다고? 어느 부분이?”
더 향기로운 장미가 있다며 나를 정원의 안쪽으로 안내한 이사벨라가 퉁명스레 묻는다.
‘영특하고 똘망똘망한 어린아이를 좋아하는데 쉽게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정답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말을 고르며 눈을 굴렸다.
“으음. 솔직하지 못하신 거요.”
“나는 직설적이다 못해 독선적이라는 평을 듣는 마녀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 솔직하지 못하시다고 느꼈어요. 특히 레일라 님에게요.”
말하고 나니 마음속에 피어오른 의문이 조금 더 뚜렷해진다.
‘왜 레일라는 이사벨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백작에게 하는 것만 봐선 이사벨라는 분명 자신의 딸인 레일라를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내 딸을 만났느냐?”
내 대답이 의외였던 듯 이사벨라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인다.
“네. 아름답고 다정한 분이시던데요.”
나는 누군가 노엘을 칭찬하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줄 모르던 티에리를 떠올리며 레일라를 묘사했다.
“글래스턴 백작님 같은 분일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분 같았어요.”
“……백작은 욕심이 많고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레일라와 결혼한 거란다.”
장미를 손질하던 이사벨라의 손에서 붉은 꽃망울이 우그러진다.
레일라와 글래스턴 백작의 결혼 생활에 딱히 흡족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헬렌과 내연 관계라는 사실은 모르는 눈치였음에도.
‘하긴, 수면 위로 드러난 인성조차 그 모양이니 마음에 차지 않을 만도 해.’
“귀머거리에 마녀의 딸이라고 손가락질받는 레일라를 아내로 삼고 싶어 하는 귀족이 없었으니까. 글래스턴 백작은 먹잇감만 제대로 쥐여 주면 적어도 레일라를 버리진 못할 인간이다.”
나는 백작을 아예 짐승 취급하는 이사벨라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어른들은 가끔 어린아이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속내를 털어놓곤 했고, 이럴 때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평범한 삶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녀의 딸이니 귀머거리 영애니 하는 오명으로 얼룩덜룩해진 삶이 아니라, 글래스턴 백작 부인의 삶 말이다.”
나는 그제야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이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그늘진 레일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사벨라 님, 레일라 님이 정말 그런 삶을 바라셨을까요?”
“이상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내 딸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어머니로 둔 사람이 마녀의 딸이라는 낙인을 오명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 않아요.”
내가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건네는 위로에 이사벨라의 무뚝뚝한 입매가 허물어진다.
“하차니아 공작을 한 10여 년 전쯤에 만난 적이 있었지. 사람이 너무 좋고 물러 한심한 작자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세요.”
“하지만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