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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2)화 (427/486)

제192화

백작을 뒤따라간 나는 복도 끝에서 그와 조우한 인물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사벨라 도노반의 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길래 백작과 껴안는 거지?’

“조심해야 해요. 여긴 글래스턴령이 아니에요, 란스.”

백작의 품에 안긴 갈색 머리 여자가 주변을 살피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는다.

“몇달 만에 보는 건데 내게 이렇게 차갑게 굴어야겠어?”

그런 그녀의 입술이 다치는 게 싫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 백작은 한숨처럼 제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망할 레일라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너까지 데려가는 바람에 나만 글래스턴을 지켜야 했잖아.”

“이사벨라 님의 부탁이었으니까요. 란스, 그나저나 이사벨라 님은……?”

“쉬이. 마녀는 아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여자가 남몰래 벨네르니인들을 돕고 있다는 증거도 아들을 시켜 모으고 있으니까 안심하라고.”

백작은 걱정하는 여자의 어깨를 붙든 채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자, 들어가자.”

“네? 란스, 레일라가 옆방에서 쉬고 있어요.”

“흥. 우리가 얼마나 격렬한 사랑을 나누든 엿듣지도 못할 귀머거리잖아, 나의 부인은.”

나는 백작이 중얼거리는 말속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제 부인을 향한 강한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생학에 빠진 인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네.’

아돌프가 주장하는 우생학이란, 우월한 인종은 신체나 정신에 그 어떤 결함도 없으며 장애가 있는 사람은 열등한 민족이라는 이론이었다.

“천박한 마녀가 몸을 함부로 굴리다 집시 따위와 놀아난 게 분명해! 젠장, 그런 주제에 내게 레일라와의 결혼을 강요하다니.”

글래스턴 백작은 방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이사벨라와 제 아내의 흉을 보며 궁시렁거렸다.

‘쓰레기가 따로 없네.’

쓰레기가 쓰레기를 낳은 셈이다.

백작의 아들인 트레시는 발목에 금제구를 채워 제대로 도망갈 수도 없는 벨네르니인들을 숲속에 풀어 제 쾌락을 위한 사냥감으로 써먹는 인간이었으니까.

“이리 와, 헬렌. 더 참기 힘들다고.”

“란스도 참! 성격 급한 건 여전하네요.”

까르르.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다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쉰다.

‘음. 어린이가 이런 소리 들으면 안되는데.’

시답잖은 걱정을 하며 쫑긋 귀를 세운 채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넌 누구니?”

가녀린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레일라 도노반인가?’

좁은 턱에 어딘지 모르게 유약한 느낌을 풍기는 여자는 서쪽의 마녀와 이목구비가 신기할 정도로 흡사했다.

‘아까 봤던 할머니랑 느낌이 너무 다르긴 하지만.’

“레오노라예요. 트레시 글래스턴 공자의 친구예요.”

천천히 말문을 열자 내 입만 뚫어져라 노려보던 여자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진다.

“레오… 노라?”

‘입 모양으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네.’

나는 여자의 어눌한 어투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시에게 여자인 친구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구나.”

‘그거야 친구가 된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까.’

“난 트레시의 엄마인 레일라란다. 이 저택의 주인인 이사벨라 도노반의 딸이지.”

레일라의 말에 나는 문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대꾸했다.

“에녹의 동생이에요. 하차니아 공작님의 딸이고요.”

“아! 네가 바로 그 유명한 레오노라 공녀로구나.”

“절 아세요?”

“그래. 너무 명성이 자자해서 이 시골까지 소문이 전해질 정도라 모를 수가 없겠더구나.”

레일라는 완전히 경계를 풀었는지 삐죽 튀어나온 내 옆머리까지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쁘띠 플뢰르 선발전, 잘 봤어. 바주카포가 인상 깊었단다…….”

“감사해요.”

“그런데 이 방에 누가 있길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거니?”

나는 레일라의 물음에 먹이를 빼앗긴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했다.

‘사실대로 말할까? 빼빼 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인데 충격받으면 어떡하지?’

고민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눈을 가늘인 채 내 얼굴을 탐색하던 레일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남편이 들어간 모양이구나. 내게 말해 주는 걸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넌 상당히 상냥한 아이일 테지.”

레일라는 머쓱한 얼굴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옆방으로 이끌었다.

“혹시 내 남편과 헬렌의 대화를 들었니? 아, 남편과 같이 있던 여자가 갈색 머리의 미인이라면 내 사촌 누이인 헬렌일 거란다.”

아내의 사촌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막장 드라마 버금가는 백작의 만행에 입을 쩌억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디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

“어째서요? 나쁜 사람들이에요.”

레일라는 콧김을 쒸익쒸익 뿜는 내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 제 뺨을 감싼 채 의자에 앉았다.

“그래. 그는 나쁜 사람이지만, 내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해.”

“제가 트레시나 레미라면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공녀. 어른에게는 어른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란다.”

나는 레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파르가 남의 가족 일에 함부로 참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했어.’

“어른들이라고 전부 저보다 똑똑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니까요.”

“똑똑한 아이네. 어머님이 좋아하시겠어.”

“이사벨라 님이요?”

“그래. 어머니는 너같이 영특한 아이를 좋아하시거든. 그래서 나 같은 건…….”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건 채 작게 말을 중얼거린 레일라는 내게 비밀의 대가로 작은 금화 주머니를 안겨 주었다.

* * *

레일라가 안겨 준 금화 주머니를 짤랑이며 연회장에 들어선 나는 그사이 자르파라에게 부탁해 전달받은 글래스턴 백작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란스 글래스턴

48세

아내의 사촌 동생인 헬렌 도노반과 내연 관계

이아론 후작과 프란츠 황제의 지원으로 서부 개척 사업의 책임을 맡음]

글래스턴이 맡고 있는 사업은 말이 서부 개척 사업이지, 영지민들이 농사를 짓는 평야를 죄 파헤쳐 글래스턴령과 도노반령을 잇는 수로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글래스턴은 이미 만들어진 수도를 잇기만 하면 되니 큰 이득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도노반은 자칫하면 유일한 농경지를 잃게 되고 말걸.’

나는 과연 이사벨라가 제 사위인 글래스턴 백작이 도노반을 처참히 짓밟고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까 싶어 눈앞의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하, 할머님.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트레시의 말에 나와 제 손주를 돌아본 이사벨라가 미간을 좁힌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움푹 패이는 것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딸인 레일라와 달리 무척 꼬장꼬장한 할머니 같긴 한데.’

인상은 티에리보다도 무서웠다.

티에리도 허리가 꼿꼿한데다 고집불통 같은 인상을 주긴 했지만, 눈앞의 이사벨라 도노반처럼 매섭게 나를 살펴보진 않았으니까.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하차니아입니다.”

“흐음. 북부의 조무래기였나.”

나는 이사벨라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에녹을 붙잡았다.

이 할망탱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라고 대뜸 목소리를 높일 게 뻔했으니까.

‘서쪽의 마녀는 북부를 싫어한다고 사뮈엘 대공이 귀띔해 줬으니 놀랄 것도 없지.’

나는 더는 나와 말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리는 이사벨라를 향해 다가서며 그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그 밴드.”

“음?”

“사용하기 편하신가요?”

내 물음에 제 손목을 힐끔한 이사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손목이 시큰할 때마다 사용하는데 통증 부위를 적절한 열로 감싸 줘서 좋더구나.”

이사벨라가 칭찬하는 손목 밴드는 손톱만 한 마정석을 이용해 열을 내는, 일종의 파스였다.

‘고령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사벨라까지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재봉을 할 때마다 손목이 아프다는 티에리를 위해 내가 개발한 물건이었다.

“하차니아가 운영하는 움베르토 제약과 제랄드 공방의 합작이거든요.”

“……그래?”

“네! 조무래기가 개발한 물건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무래도 꼬맹이는 내가 제 가문을 조무래기라고 부른 것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로구나.”

파지직.

순간적으로 마주친 이사벨라의 눈에서 스파크가 튄다.

‘앗,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이사벨라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 한다고.’

순간적으로 자존심을 세웠던 나는 뒤늦게 아차 싶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전혀요!”

내 다급한 부정에 이사벨라의 입꼬리가 호쾌하게 올라간다.

“나쁘지 않아. 어린애는 자고로 야망과 자존심이 있어야지.”

‘음? 내가 마음에 든 건가?’

싶어 눈을 반짝이는데, 나를 불청객처럼 뒤로 밀어낸 남자가 이사벨라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다.

“이사벨라 님, 레일라는 몸이 아프다고 해서 혼자 내려왔습니다.”

“그래. 내 딸이 몸이 약한 탓에 자네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아.”

“고생은요. 레일라는 제 평생의 사랑인데 그런 말씀 마세요.”

풉!

나는 불륜남의 새빨간 거짓말에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고, 그제야 시선을 돌린 글래스턴 백작의 눈에 띄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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