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81)화 (416/486)

제181화

“…됐어요. 그만 해요!”

가스파르도 에녹과 실비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나는 화드득 붉어진 얼굴을 에녹의 가슴팍에 숨기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자카리만 애타게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카리는 어디 갔어?”

“형님은 마구간에 가 있겠대.”

‘아, 오늘은 마차 대신 말을 타고 간다고 했지.’

어차피 사냥터에 들어가면 승마를 해야 하니 그냥 말을 타고 가는 게 편하긴 할 터였다.

공작령에서 간단한 승마를 배우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숙련되지 못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이동해야만 했다.

“리니, 내 말은 네가 순하다고 좋아했던 노르딘의 백마야.”

누구 말을 탈지 고민하는 내 앞으로 눈부시게 새하얀 말을 끌고 나타난 에녹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찬란한 금발을 뽐내며 손을 내민다.

“내 말이 에녹의 말보다 세 배는 빠르다.”

그러나 그 손은 내게 닿기도 전에 실비에 의해 허공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실비, 그 말은 너무 빨라서 위험하다고 여태 안 태워 줬잖아?”

실비의 종마는 길들이기 힘든 걸로 유명한 말이지만 매우 빨라서 내가 늘 타보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탐스러운 갈기를 뽐내는 암갈색 말을 힐끔하며 묻자 실비가 무뚝뚝한 입술을 움직인다.

“오늘은 괜찮다. 내가 함께 탈 거니까.”

“좋아! 나 그럼 실비랑 함께 갈래.”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팔이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어딘가에 안착시킨다.

‘자카리?’

나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말랑말랑한 거위 깃털 쿠션 안장에 앉은 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형님! 리니 허락도 없이 형님 말에 태우는 게 어디 있어요!”

에녹이 항의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자카리가 자신의 말-단순히 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했지만-을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입술을 벌린다.

“내 말은… 마물이다. 실베스테르의 종마보다 빠르지.”

평소와 달리 나를 설득하려는 말이 길었다.

“마물이라고요?”

자카리의 말에 나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검회색의 털을 쓰다듬은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말치고 너무 크다 했다.

'그런데 자카리에게 테이머의 능력이 있었나?'

원작에서 언급된 서브남주의 능력은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뿐이었는데.

“오라버니, 이 마물… 직접 길들이신 거예요?”

설마 아이네스의 도움을 받았나 싶어 의문스러운 입을 열자 자카리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다.

“아니.”

“?”

그럼 길들이지도 않은 마물을 어떻게 타고 있다는 말이지.

“힘으로 잡고 있다.”

“…….”

“너 태우려고… 어제 잡았는데.”

반쯤 감긴 자카리의 눈이 내 눈치라도 보듯 느릿느릿 깜빡인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망했다.

이 집안은 장남도 글렀다.

* * *

결국 자카리의 말-마물-을 타고 사냥터에 도착한 나는 우수수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두 주먹을 야무지게 쥐었다.

‘내 옷차림 때문인가? 아니면 자카리가 끌고 온 마물 때문에?’

싶어 얼굴을 붉히는데, 사람들이 주목한 건 내 옷차림 따위가 아니었다.

“하차니아 공작가의 말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명마로군요.”

“둘째 공자가 타고 있는 말은 에르멘의 종마 아닌가요? 제국에 단 두 마리만 진상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하차니아의 손에 있었군요.”

“경매에서 사들였다고 들었어요.”

“어머. 부유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아티팩트 공방과 자르파라 상단으로 부를 축적하긴 했지만, 아직 솔로아 공작가나 아르델 백작가처럼 명성을 쌓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차니아를 알아보는 귀족들이 꽤 늘어난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들….”

“외모가 휘황하죠?”

“네, 어쩜 다들 저렇게 훤칠한지.”

‘그래, 우리 애들이 조금 잘생기긴 했지.’

나는 귀부인들의 연이은 칭찬에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공자들 중에 혼처가 정해진 사람이 있나요?”

“제 기억에는 없어요. 막내 공녀님도 마찬가지고요.”

“아, 레오노라 공녀! 똘똘하고 용기 있는 아이죠. 수도에서의 활약이 눈에 띄는.”

“눈독을 들이는 가문으로 줄을 세우면 국경에 닿을 정도라던데요.”

‘아니, 여덟 살-이제 곧 아홉 살이긴 하지만- 어린아이 혼처를 벌써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야?’

어쨌든 제국에서 우리 가문의 입지가 넓어지긴 넓어진 것 같았다.

형제들에 이어 내 이름까지 입에 올리는 귀부인들의 말에 낯간지러워 고개를 숙이는데, 나를 내려주기 위해 등자를 붙든 자카리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진다.

“오라버니.”

“…….”

“그러다 등자 끊어지겠어요.”

“아…. 미안….”

내 경고에 자카리가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이며 등자를 손에 놓는 대신 귀부인들을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른 귀족들을 노려보는 것도 실례예요.”

사람이라도 한 명 도륙 낼 것처럼 희번득 빛나는 자카리의 눈을 감추기 위해 허리를 내민 나는 실비와 에녹과 달리 정돈되지 않아 덥수룩한 자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들 이상한 소리를 해서 기분이 상한 거예요? 헛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 말에 잔뜩 굳어 있던 자카리의 몸이 그제야 조금씩 풀어진다.

“보통 귀족들은 일찍 혼처가 정해지긴 하니까요. 우리들은 아빠가 막고 있어서 혼담이 오고 가는 집안은 없는 거고.”

나는 자카리의 신경이 왜 이리 곤두섰을까 생각하며 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오라버니, 설마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으세요?”

“그런 거….”

“그런 건 아니라고요? 그럼 왜 그렇게 노려보세요.”

“네 얘기를….”

귀부인들의 대화를 떠올린 듯 등자를 붙든 자카리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간다.

찌직. 찌익.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진 등자가 종잇조각이라도 되듯 찢어지고 있었다.

“넌, 너무 어리니까.”

'나 때문에 화가 난 거였어?'

나는 도통 읽기 어려운 자카리의 속내를 가늠하며 떨떠름히 대꾸했다.

“…그렇죠. 제 혼담이 오고 가려면 5년은 이르니까요.”

“50년.”

내 말을 툭 자르듯 튀어나온 자카리의 말이 답지 않게 또박또박 이어진다.

“아니, 500년.”

이 집안은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잠식하기 전에, 나는 허둥지둥 아이들이 모여 있는 가제보로 뛰어들었다.

* * *

“레오노라, 어서 와.”

멀리서 나를 발견한 아이네스가 천사처럼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무슨 꿍꿍이지?’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이네스를 힐끔하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이번 대회는 가족이 함께 즐기는 사냥 대회인 만큼 아이들이 즐길 만한 오락거리도 준비했는데 어때?”

아이네스의 말에 가제보 아래 준비된 작은 티테이블, 가지각색의 인형들과 파스텔톤의 종이, 그리고 거대한 인형의 집을 발견한 나는 아이처럼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재밌어 보이는 놀이가 많은 것 같아요, 전하.”

“응. 우리는 아이들이니까, 귀족원의 대회의니 반정이니 신경 쓰지 말고 놀자.”

이미 다른 아이들은 알지도 못할 대회의를 언급하는 순간에 아이다움은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아이네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저도 그런 복잡한 일은 잘 모르는걸요.”

탕!

내 대답과 동시에 사냥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숲속을 울린다.

“사냥 대회가 시작된 모양이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새떼를 묘한 시선으로 살핀 아이네스는 곧 표정을 감추고 나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아이네스가 몸소 준비한 놀이들이니까 다들 천천히 즐겨 주길 바라!”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구석에 숨어든 나는 어느샌가 사라진 아이네스의 기척에 황급히 로렐라인을 찾았다.

“로렐라인, 황녀 전하 어디 갔는지 알아요?”

“글쎄요. 오늘은 시녀도 대동하지 않고 오셨던데.”

영문을 모르는 물빛 눈을 깜빡이는 그녀 뒤로 익숙한 얼굴의 영애가 발랄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황녀 전하라면 아까 산책하고 온다고 하셨어요!”

‘황녀가 혼자서 산책을 하다니,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혹시 숲에서 길을 잃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가 볼게요.”

놀이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을 둘러본 나는 나를 따라오려는 로렐라인을 제지한 뒤 빠르게 숲에 들어섰다. 바스락 소리를 내는 잎들이 가득한 풀숲을 지나치자 곧 나무가 우거진 사냥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빠!”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아이네스의 것이었다.

“아빠!”

다행히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금세 아이네스의 마나를 감지한 나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무 밑동에 몸을 숨겼다.

“흐음. 아이네스였구나.”

그레고르를 찾아 숲에 들어왔는지, 아이네스의 부름에 황제가 대답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숲 근처에서 놀지 않고 뭐하러 들어왔느냐. 이곳은 네게 위험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아이네스 심심해서, 아빠랑 숨바꼭질하고 싶어졌는걸요.”

그레고르에게 속삭이는 아이네스의 목소리는 무척 상냥하고 달콤해서, 정말로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것처럼 들렸다.

“숨으세요, 아빠.”

아이네스가 순간적으로 숨긴 살기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말로 그레고르와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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