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율리아 황비가 죽었다고? 귀찮게 되었구나. 그녀는 만프레드 황제가 제법 아끼는 딸이었는데.”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실종된 거니까요.”
율리아가 완벽하게 숨을 거두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네스는 뻔뻔하게 촘촘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모른 체 대답했다.
“만프레드 황제 쪽이 걱정되시면 궁인들을 시켜 찾아보게 할까요?”
“뭐, 됐다. 어차피 딸들이야 시집을 가면 남이니 그쪽도 크게 걸고넘어지진 않을 거다.”
“…그렇죠. 남이 되는 거였죠.”
“황궁에 잘 박혀 있던 여자가 어떻게 사라졌다는 건지…. 허, 참. 요즘 피곤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아이네스는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까지 짚은 채 인상을 찌푸리는 그레고르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떨떠름히 입을 열었다.
“요즘 아빠가 피곤하실 만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긴 했죠.”
“그래, 아이네스 네가 드디어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그러자 그레고르가 조금 환해진 얼굴로 제 딸을 돌아보며 한숨짓는다.
“나라 하나를 보살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아이네스.”
‘보살핀 적도 없으면서 무슨.’
아이네스는 그레고르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티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제 아빠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일이 힘에 부치세요, 아빠?”
“서부는 내전을 앓는다고 난리지, 동부는 제대로 된 영주가 없다고 우는 소리지, 남부는 해적들을 해결해 달라고 툭하면 항소를 올리질 않나….”
그레고르는 아이네스가 깔아 준 판에 옳다구나 누워 떠들기 시작했다.
“골머리가 아프다 못해 빠개질 것 같은 상황에 그나마 북부가 군말 없이 조용해서 마음에 들더구나.”
역시 그레고르는 문제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북부가 지금 섭정을 세우겠다고 난리인데?‘
아이네스는 그레고르에게 핀잔을 주려다 꾹 참고 생긋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아이네스도 아빠에게 쉬는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네스가 말을 하게 되자마자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여 준 그레고르였다. 아이네스는 그간의 노고를 헤아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레고르의 어깨를 슥슥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아빠는 사냥을 좋아하시죠. 이참에 사냥 대회를 여는 건 어떠세요?”
귀족원이 대회의를 열어 그레고르를 제위에서 끌어내리겠다 난리를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분명 아이네스가 한 소리, 아니 열 소리는 할 거라고 예상했던 그레고르는 그를 책망하는 대신 사냥 대회를 권유하는 딸을 바라보며 모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냥 대회?”
“네. 늘 혼자서만 사냥을 하시잖아요. 아이네스, 사람들을 잔뜩 불러모아서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냥꾼인지 보여 주고 싶어요!”
그레고르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아이네스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그레고르를 껴안았다.
“흐음. 그래. 내 사냥 실력을 보고 나면 귀족들도 마음을 바꿀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구나.”
그레고르의 빼어난 사냥실력-사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다-과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그의 폭정은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네스는 제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동물들만 사냥하면 심심하니까 마물까지 풀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위험하지 않겠느냐?”
“아이네스가 얼마 전에 테이머(tamer)의 능력을 각성했잖아요. 제 마나로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거예요.”
제 딸이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그레고르는 자신이 늪에 발을 빠뜨렸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래. 그러자꾸나. 아이네스, 네가 놀 만한 적당한 평원을 낀 사냥터를 찾아봐야겠구나.”
“역시 아빠가 최고예요!”
아이네스는 그레고르의 말에 만개한 벚꽃처럼 환히 웃었다.
* * *
트리스탄이 나서 준 덕분에 귀족들의 의견을 통합하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본느 황비를 섭정으로 세우느냐, 사뮈엘 대공을 앞에 내세우느냐인데….’
제국을 생각하면 학식이 뛰어나고 윌레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뮈엘 대공이 섭정을 맡는 게 낫겠지만, 내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 줄 사람은 분명 이본느였다.
‘하지만 아이네스처럼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고 싶은 건 아니니까, 역시 사뮈엘 대공에게 부탁해야겠지.’
톡, 톡.
가스파르가 직접 목재까지 골라 제작을 맡긴 널따란 너도밤나무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던 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
“저예요, 로제요.”
“응. 들어와.”
내 허락에 장미향이 묻어나는 응접실에 빼꼼 고개를 들이민 로제가 사치스러운 붉은 봉투에 감싸인 편지 한 장을 내민다.
“황성에서 초대장이 날아왔어요, 아가씨.”
“젠나일 선황비가 무도회라도 여는 거야?”
“무도회가 아니라 사냥 대회 초청장이던데요?”
“…사냥 대회? 갑자기 무슨 사냥 대회를 연다는 거야?”
“황제 폐하가 주최하시는 건데 아가씨와 도련님들에게 전부 초대장이 왔어요.”
나는 로제의 대답에 떨떠름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초대장을 펼쳐 들었다.
'무슨 꿍꿍이지?'
그레고르는 여태 단 한 번도 사냥 대회를 열어 귀족들과 어울린 적이 없을 만큼 사회성이 떨어지는 황제였다.
‘그러니 이번 사냥 대회는 속내가 의심스럽다 못해 찜찜해.’
“혹시 황제 폐하의 청문회 날짜는 잡혔어?”
귀족원에 속한 귀족이라면 단 한 가문도 빼놓지 않고 섭정을 세우는 데 동의했으니 청문회 날짜는 빠른 시일 내에 잡힐 수밖에 없을 터였다.
“네. 사냥 대회 바로 다음 날이 청문회예요.”
내 물음에 로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달력을 내민다.
“정말이네. 사냥 대회가 내일모레, 폐하의 청문회는 바로 그다음 날이구나.”
나는 로제의 손에서 달력을 받아 들며 자그마한 미간을 찌푸렸다.
'사냥 대회를 안 가겠다고 하면 곧 폐위되는 그레고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귀족들이 동의한 건 딱 그레고르의 폐위까지였다. 기득권층인 그들은 상황이 크게 바뀌는 걸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해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윌레닌 황실이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길 바랐다.
‘그러니 하차니아가 황실을 증오하거나 무시해서 그레고르를 끌어내린다는 인상을 남기는 건 곤란해.’
가라앉은 시선으로 초대장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곧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아. 의상은 로제랑 라비가 알아서 준비해 줘.”
“그럴까요?”
“응. 사냥 대회에서 입는 옷은 티에리의 전문은 아니니까.”
로제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나는 내 유모도 아닌 로제나 라비에게 시킬 만한 일은 아닌가 싶어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혹시 귀찮아? 그러면 그냥 티에리한테-“
“아니에요! 저희가 준비할 수 있어요! 라비가 바쁘다고 하면 저 혼자서라도 준비할게요!”
그러자 기겁하며 인상을 찌푸린 로제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을 반짝인다.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사냥 대회에서 가장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 자리를 놓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사냥 대회는 참가자의 의상 센스를 겨루는 미인 대회도 아니고, 하물며 사교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도 아니었지만 만류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열의였다.
“으응. 고마워, 로제.”
“맡겨만 주세요!”
나는 열정적인 로제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응접실을 벗어났다.
* * *
어쩐지 너무 열의를 보인다 했다.
‘말렸어야 했나.’
나는 하늘하늘한 연두색 실크 원피스에 달린 날개를 만지작거리다 거울 속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작은 멜리다이아를 수놓은 레이스 밑단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아무리 사냥 대회 전통이라지만 너무 과하잖아.'
로제와 라비의 말에 따르면 수도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구경 나온 아이들은 전부 요정 옷을 입는다지만, 내 옷은 요정 옷을 흉내 낸 정도가 아니라 지나가는 팅커벨을 잡아다 옷을 벗겨 입은 수준이었다.
‘잠깐만. 그럼 에녹과 실비도 요정 옷을 입는 건가?’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중정으로 내려오는 형제들의 옷은 승마복에 가까운 무난한 차림이었다.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머리를 위로 올린 탓에 단정한 미모가 더더욱 돋보인다는 점을 빼면 딱히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뭐야! 실비랑 에녹은 왜 요정 옷 안 입었어?”
가까이 다가온 에녹의 팔목을 붙들며 내가 불만을 터뜨리자 삼남이 씨익 웃으며 내 볼을 꾹 잡아 누른다.
“우리는 사냥에 참가할 거니까 안 입었지. 그나저나 오늘 엄청 귀엽다, 리니.”
“나, 나도 참가할래!”
“넌 위험해서 안 돼.”
나는 흰 손으로 셔츠깃을 매만지며 대꾸하는 실비를 노려보며 동동 발을 굴렀다.
“하지만 이런 옷 입고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 나도 실비나 에녹처럼 차라리 승마복을-!”
“아가씨, 설마 저희가 구해 온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언제 뒤에 와 있었던 거야.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망울망해진 로제와 라비의 눈에 솟구치는 수치심을 참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긴 하는데,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아서.”
“아! 그럼 드레스 아래에 속바지를 입으시겠어요? 요정 속바지예요!”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제와 라비가 활짝 웃으며 연분홍색 시폰 속바지를 내민다.
“으응…. 고마워.”
나는 그녀들이 만족하며 사라지고 나서야 에녹과 실비를 돌아보며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우습게 보면 어떡해? 나 이제 곧 아홉 살이라고.”
다 컸다는 듯한 내 말에 웃음을 참으려는 듯 모호하게 인상을 찌푸린 에녹이 나를 번쩍 안아 들며 입을 연다.
“뭐가 어때서? 예쁘기만 한데.”
“그래. 공주 같다.”
“응. 엄청 귀여워. 숲속에 사는 요정님처럼 반짝거려.”
“그래. 눈이 멀 것 같군.”
나는 에녹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맞장구를 치는 실비를 돌아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얘네들은 이미 오래전에 객관성을 상실했어.'
그렇다면 역시 늘 차분하고 이성을 잃지 않는 가스파르의 판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아빠. 나, 너무 어린애같지 않아요?”
내 물음에 이제 막 중정에 다다른 가스파르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좁힌다.
‘보기 안 좋나 보다.’
“역시 조금 더 차분한 복장으로 갈아입을까요?”
그의 떨떠름한 반응에 손가락을 옴질거리자 나를 꼼꼼히 살핀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누구지.”
“네?”
“내 딸은 어디 가고 꽃의 정령만이 저택에 남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