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73)화 (408/486)

제173화

“콜록, 콜록-!”

동이 완전히 트기 전에 침실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쏙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병자를 연기했다.

‘아,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니까 기침을 할 필요는 없나?’

싶었지만, 침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주치의는 내가 깨어났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별다른 의심의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가씨! 깨어나셨군요!”

“으응. 사람들을 불러 줄래?”

“아가씨~!”

내 부탁에 의사가 방을 벗어나기도 전에, 기침 소리라도 들은 건지 용케 달려온 로제와 라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끌어안는다.

“일어나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엄청 걱정했어요…!”

나는 호들갑을 떠는 로제와 라비에게 폭 안긴 채 그들의 등을 토닥였다.

‘하긴. 내가 정말로 음독을 당하지 않았다는 건 힐다와 셀리아, 자르파라밖에 몰랐으니까.’

아이네스의 발목을 단단히 잡기 위한 내 작전은 물밑에서,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레오노라.”

내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주변이 소란해질 무렵, 막 집무실에 들어섰던 듯 펜촉을 쥔 가스파르가 급하게 침실에 들어선다.

‘얼마나 급했으면 펜을 그대로 들고 달려왔을까.’

나는 무뚝뚝해 보여도 잔걱정이 많은 아빠를 걱정시킨 게 미안해서 내게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리니가 정말 방금 일어난 게 맞는 건가.”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가스파르는 내 기대처럼 나를 바로 안아 들거나 이마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의구심이 깃든 가스파르의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든 나는 가늘게 찌푸려진 아빠의 눈에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서 의심하는 거지?’

단정하지만 매서운 검붉은 눈이 분명 내 행적을 의심하고 있었다.

‘몰래 창문으로 드나든 흔적도 제대로 지웠고, 노엘과 레이첼을 태운 마차는 자르파라가 하차니아와 관련 없는 상단을 통해 구해준 거라 아빠가 알 리가 없는데?’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린다.

“오른쪽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다. 왼쪽으로만 자는 아이라 이쪽 머리칼이 베개에 닿았을 리도 없는데.”

‘나랑 같이 자지도 않으면서 나도 모르는 내 잠버릇은 어떻게 아는 거야….’

내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데, 그를 따라 침실에 들어선 실비마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내 옷차림을 살핀다.

“그리고 어젯밤만 하더라도 레오노라는 분명 레이스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흰 양말입니다.”

‘그런 하찮은 거 눈여겨보지 마!’

나는 실비의 말에 울컥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어린아이처럼 양주먹으로 눈가를 비볐다.

“우웅….”

‘어쩔 수 없다. 필살기라도 날려서 둘 다 입을 다물게 해야 해.’

“실비, 나 안아 줘.”

나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기 때문에, 내 어리광에 차가운 차남의 눈매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얼른. 보고 싶었단 말이야.”

“눈을 뜨자마자 나부터 찾는 건가. 못 말리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비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출 줄 몰랐다.

‘자, 이걸로 실비 입은 일단 막았고.’

“나는-”

“리니, 눈꺼풀이 무거워서 계속 잠만 자고 싶었어.”

실비의 품에 쏙 안긴 나는 무어라 불만을 토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가스파르를 돌아보며 재빨리 세 치 혀를 놀렸다.

“그런데 그때 아빠 목소리가 들렸어. 지금 생각해 보면 꿈이었던 것 같아요.”

“…….”

“하지만 리니가 깨어나지 않으면 아빠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사정을 다 아는 힐다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대며 겨우 웃음을 참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콧망울을 움찔하며 아빠를 향해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냈다.

“아빠가 리니를 깨어나게 한 거예요.”

“…다들 들었나.”

내 말에 아주 잠깐 침묵을 지키던 가스파르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힐다를 비롯한 의사들을 돌아본다.

“사경을 헤매던 리니가 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는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목소리였다.

“리니가 의식을 찾지 못한 이유조차 규명하지 못했던 그대들의 무능력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역시 우리 아빠야. 이런 같잖은 애교로 합리적인 의심을 접지는 않겠다는 거네.’

가스파르의 힐난에 내가 어찌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제약 회사를 운영하며 상인에 가까운 눈치를 개발한 힐다가 재빨리 앞으로 나선다.

“그, 그런 게 아니라 각하에 대한 아가씨의 사랑이 그만큼 대단하신 거 아닐까요?”

“예, 각하! 이번 일은 아가씨와 각하의 각별한 관계가 일으킨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아가씨의 아빠 사랑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음유시인을 고용해 노래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힐다의 말에 제각기 살을 덧붙이는 의사들의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바보들. 아빠가 그런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

가스파르는 기본적으로 다정하지만 섬세한 만큼 의심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안 믿을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내가 상황 설명을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그렇군.”

가스파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들의 믿음에 부응해 버렸다.

“네, 각하! 아버지를 향한 아가씨의 사랑이 최신 의학 기술을 이길 정도입니다!”

‘…이 말을 믿는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가스파르를 올려다보는데 아빠가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나를 향한 내 딸의 사랑이 의학보다 대단하다는군.”

“예, 각하! 정말 부러워요~!”

“저도 아가씨에게 그렇게 사랑받고 싶은데요!”

“불가능하지. 리니는 아빠를 제일 사랑하니까.”

“…….”

나는 로제와 라비의 호들갑에 불퉁히 대답하는 가스파르를 지켜보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도 넘은 팔불출에 슬퍼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

“실비, 아빠 요즘 무슨 일 있어?”

원래도 나를 예뻐하긴 했지만 저 정도 팔불출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싶어 차남을 돌아보자,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 실비가 루비처럼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연다.

“내 꿈은 꾸지 않았나.”

“…….”

“나는, 꿈에 나오지 않았던 건가?”

“나 졸려. 리니 다시 잘래.”

나는 그만 현실을 외면하고 말았다.

* * *

“율리아 황비 전하가 공녀님을 뵙기를 청하는데 어찌할까요.”

내가 깨어났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만날게.”

오데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아침부터 내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있는 가스파르를 돌아보며 그를 안심시켰다.

“나 괜찮아요. 무리하는 거 아냐.”

내 말에 탐탁지 않다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가스파르는 굳이 율리아를 만나겠다는 내 의사를 반대하진 않았다.

“그럼 나도 같이 응대하마.”

“알겠어요. 그럼 아빠 먼저 가 있어요. 오데트, 소응접실로 내려가면 되는 거지?”

“네, 아가씨.”

오데트의 대답에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내의를 갈아입었다.

‘저택까지 찾아온 걸 보면, 아이네스가 레이첼이 사라진 걸 눈치채고 율리아를 보낸 거야.’

율리아는 칼리시만 제국의 황녀이자 아이네스의 최측근으로 그레고르의 비(妃)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름 결연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선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본비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공녀를 많이 걱정했는데 무사히 깨어났다니 다행이네.”

‘…언제 봤다고 나를 걱정해?’

먼저 응접실에 당도한 율리아가 아빠를 붙든 채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공작도 걱정이 많았을 것 같은데…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게다가 말하면서 자꾸 아빠를 흘깃하는 눈치가 의심스럽다 못해 요상했다.

“칼리시만 제국에서만 나오는 약초로 만든 보약이네. 기운 차리는 데 이만한 약이 없어 본비가 몸소 챙겨왔지.”

힐끔.

“레오노라를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비 전하.”

“…공작 먹으라고 가져온 약인데. 뭐, 공녀와 같이 먹어도 나쁘진 않겠지.”

힐끔힐끔.

‘아니, 우리 아빠를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꼭 무슨 아이돌 팬사인회라도 온 것처럼, 설레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게다가 뺨은 무슨 봄을 맞은 사춘기 소녀처럼 붉다.

“저, 전에 본비와 부딪혀 다치기라도 했을까 챙겨 온 것뿐이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하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멘트만 날리고 있잖아!

순진한 아빠가 율리아 황비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할까 호다닥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가스파르의 입술이 움직였다.

“황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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