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내가 눈을 뜬 곳은 새까만 단상 위였다.
둥근 돔 형식의 천장은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지만, 어두침침한 회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어딘지 모를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 거지?’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내 머리 뒤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나는 재빨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 연기에 몰두했다.
“…아무리 ‘아스테르’라지만 이렇게 갑자기 납치를 해 오다뇨. 공작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겁니다, 뮤리엘 님.”
“나의 돌풍은 그 누구도 마나를 추적하지 못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분께서 직접 하사하신 힘이니까요.”
“하지만 방방곡곡 찾으려고 들 겁니다.”
“어머, 기욤. 레오노라가 사생아라는 소문을 듣지 못한 건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레오노라를 챙기고 있는 척한 것뿐이지. 사실 그는 레오노라를 증오하고 있을 거예요. 레오노라가 사라지면 가장 속시원해 할 사람이라고요.”
나는 뮤리엘의 말에 기가 막히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나 때문에 놀라 전전긍긍할 아빠가 떠올라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지만 일단 입을 꾹 다문 채 시체처럼 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가스파르의 친딸을 데려올 작정인걸요.”
“뮤리엘 님의 따님 말씀이신가요?”
“…안타깝게도 레티샤는 가스파르의 자식이 아니에요.”
뮤리엘의 목소리가 잠시 안타까움에 젖어든다 싶더니 그녀가 단상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돔을 울린다.
“가스파르가 혈기왕성했을 시절 실수로 태어난, 다른 여자의 딸이니까요. 나와 가스파르는 그런 천박한 관계는 아니었어요. 고고한, 서로의 영혼을 탐미하는 순수한 관계였죠.”
‘웃기고 있네.’
내가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하지 못할 진짜 어린애였다면 뮤리엘의 말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코웃음을 치고 넘길 수 있을 수준의 거짓말이었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미련할 만큼 순정파인데. 엄마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만났었다고?’
“아무튼, 아스테르를 교단에 데려오기 적기라고 판단해서 데려왔을 뿐이에요. 만약 그분이 레오노라의 마력을 흡수하기도 전에 아스테르의 힘이라도 각성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겠군요.”
“당연하죠, 기욤. 그러니 어서 그분께 내가 레오노라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전달해 줘요.”
“알겠습니다, 뮤리엘 님.”
뮤리엘의 하인인 듯한 남자가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그녀의 그림자가 감은 두 눈 위로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너 따위가 아스테르라니, 아무리 운명이라지만 정말 화가 나는구나.”
고요히 내려앉는 목소리에 들끓는 분노가 가득하다.
“그분이 네 힘을 축출하기만 하면, 내가 직접 네 목을 따 버릴 거야. 노엘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년은 이미 죽일 필요가 없어진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나는 뮤리엘의 혼잣말에 흠칫하며 뒤로 숨긴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엄마가 정말 살아 있는 건가? 뮤리엘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공작 부인에서 노예가 되어 버리다니. 죽음보다 그년에게 어울리는 삶이지!”
한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후후, 교활한 웃음을 흘리는 뮤리엘의 목을 잡아 그녀를 단상에 꽂아 넣었다.
“커억-!”
“우리 엄마, 어디 있어?”
“이거- 이거 놔아!!!”
나는 뮤리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부르기 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배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말해.”
“읏, 으읏.”
“난 널 정말로 죽여 버릴 수도 있어. 공명으로 말해. 너, 마법사잖아?”
내가 ‘미친개’였던 시절 적들을 제압했던 방법 중 하나였지만,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해도 여덟 살의 몸으로 무력을 유지하는 건 아무리 마나를 응축해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카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작 책이 존재하지.’
원리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색찬란하게 빛이 나는 원작 책에 박힌 카렌의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나는 카렌이 가진 무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청금의 기사라고 불렸던 그녀의 몸이 지닌 체력, 완력, 그리고 순발력까지.
그리고 나는 그 힘을 한계까지 끌어 쓰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뮤리엘의 목숨을 거둘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노엘, 나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를 노예로 팔아먹었다면.
“나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 뮤리엘 이아론.”
“…….”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네 아들까지 죽여 버릴 거야.”
내 협박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던 뮤리엘이 입술을 달싹이다 눈을 감는다.
“노엘을 노예로 만든 건 내가 아니야. 생트로페 해적단이 노엘을 노예 상인에게 팔았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지.”
“어떤 상인에게 팔았는지 말해.”
“그건 정말 몰라.”
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뮤리엘의 눈 속에서 진심을 보았지만, 그녀의 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살려 둘 필요를 난 느끼지 못하겠는데.”
시큰둥한 얼굴로 뜻을 전하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간다.
‘아마 내가 진심이라는 걸 느끼고 있겠지.’
사이비 종교-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에 심취해 여덟 살 사촌 조카를 납치해 제물로 삼으려는 인간을 굳이 세상 밖에 도로 내놓을 필요를 나는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사, 살려 줘…!”
제 목을 조르는 내 손의 힘이 점점 우악스러워진다는 걸 느낀 뮤리엘이 내 팔목을 붙잡은 채 애원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으면 그분이 누군지나 말해.”
교단에서 ‘그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교주일 거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기에 여덟 살 아이의 마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걸까.
“알레테이아 교단의 목적이 뭐지?”
“그분이 모든 힘을 되찾는 거야. 그러면 세상이 구원받을 테니까.”
“모든 힘이란 건, 내 마력을 말하는 건가?”
“아니, 네 힘으로는 모자라. 그분, 그분이 누군지는…!”
다급하게 공명으로 대답하던 뮤리엘의 몸이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한다. 손끝부터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현상.
그건 저주의 발현이었다.
‘그분이라는 인간에 대한 금제가 걸려 있었나 보네.’
나는 뮤리엘의 저주가 내 신체에 영향을 미칠까 황급히 그녀에게서 손을 떼 버렸다.
제게 금제가 걸려 있었다는 걸 뮤리엘 본인조차 몰랐는지,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퀴, 퀴리오스 님-! 퀴리오스 님! 저,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절박한 뮤리엘의 목소리가 천장이 높은 돔에 울려 퍼졌지만, 그녀가 애타게 찾는 그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퀴리오스라고 불리는 인간이구나.’
나를 아스테르라고 부르는 것처럼 가명이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머릿속에 단단히 집어넣으며 단상을 벗어났다.
“아스테르가 일어났다! 붙잡아!”
마침 돌아온 뮤리엘의 하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화들짝 놀라 나를 가리킨다.
나는 내게 우르르 몰려드는 교단 병사들의 검을 휙휙 피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결국 돔 구석에 갇히고 말았다.
“붙잡아서 금제구를 채워! 퀴리오스 님께서 아스테르를 기다리고 계신다!”
남자의 명령에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저벅저벅 걸어와 내게 손을 뻗는다.
무릎을 굽혀 도약해 순간적으로 그들을 피했지만, 다른 벽에 달라붙은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카렌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려면 검이 있어야 하는데….’
게다가 그녀의 힘은 여덟 살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대단한 완력이라 점점 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일단 검부터 뺏어야 해.’
빠르게 판단한 내가 가장 가까운 병사의 몸에 박치기를 하고 단검을 빼앗아 든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
나는 귓가를 울리는 소름끼치는 이명에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원작 책의 힘을 빌려 체내에 소환했던 카렌의 오러가 핏기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안 돼! 절대 안 돼!’
나는 스스로의 뺨을 내려치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정신 차려, 레오노라.’
이제 겨우 아빠와 조우한 참이었다.
‘내가 지금 죽으면, 가스파르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할 거야.’
나는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겪고 이세계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남겨진 사람이 끌어안을 고통만은 울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아스테르를 붙잡아!”
남자의 명령에 주춤하던 병사들이 내게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쿠쿵. 쾅!
“……?”
콰콰콰콰콰쾅-!
견고해 보였던 돔의 지붕이 한순간에 날아가며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잿더미에 파묻힌 듯한 흐릿한 회색의 머리칼.
그림자 아래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바다 같은 청안과 눈이 마주친 나는 가까이 다가온 병사의 가슴을 단검으로 찌르며 그에게 달려 나갔다.
“히스!”
“걱정 마십시오, 공녀.”
다가온 나를, 나와 비슷한 체구인 주제에 어렵지 않게 안아 든 히스가 제 왼손을 높이 치켜든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
히스는 대답 대신 왼손으로 허공에 거대한 인(印)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