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47)화 (382/486)

  

제147화

  

  

  

‘하여간 의심스러워.’

굳이 레티샤가 보낸 쪽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뮤리엘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헨리.”

“네, 아가씨.”

“뮤리엘 이아론에 대해 아는 건 다 말해 봐.”

내 말에 멀뚱멀뚱 서 있던 헨리가 책상 근처로 다가와 비스듬히 몸을 숙인다.

“음…. 마님의 사촌이시고, 조카지만 이아론 후작의 예쁨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유일한 후계라고 볼 수 있는 실뱅이 탕아라고 불릴 만큼 쓰레기니까요.”

나는 헨리의 거침없는 언사에 늘 술 냄새가 났던 실뱅을 떠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이아론 후작이 세르주를 다음 대 후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뭐, 제일 좋은 건 새로 들인 정부나 후작 부인에게서 아이를 보는 거겠죠. 그게 안 될 경우를 생각한 보험 같은 거 아닐까요?”

나는 헨리의 말에 딱히 놀라는 기색도 없이 깃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이아론 후작이 정부였던 카멜리아를 내쫓고 더 어린 코르티잔을 끼고 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봤으니까.

‘코르티잔을 후작 부인으로 삼지는 않을 테고, 새로운 여자를 찾고 있긴 하겠지.’

“고마워, 헨리. 혹시 이아론 후작 부인 후보 명단 같은 게 있으면 알아봐 줄래?”

“예. 그 너구리 같은 늙은이라면 정치적인 이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죠.”

헨리는 가스파르가 루카스였던 동안 가주 대리격으로 자신과 함께 일했던 내게 제법 신뢰가 쌓인 참이었다.

내 명에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터억 소리를 내며 얹힌다.

“…지금 내 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각하.”

“지금 내 딸에게 무슨 더러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냐고 물었다, 헨리 마사드.”

헨리는 으름장을 놓듯 단단히 화가 난 가스파르의 얼굴에 당황해 뒤로 물러났다.

“아뇨, 각하. 저는 그게 아니라….”

“레오노라는 여덟 살 아이에 불과하다. 아무리 작은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선별해서 정보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건가?”

가스파르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게 정부니 후작 부인 후보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그를 엄하게 꾸중했고, 헨리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각하. 중요한 일은 여태 전부 아가씨와 상의하셨잖습니까.”

“내가?”

“아빠! 일단 들어와서 앉으세요.”

나는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가스파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헨리에게 턱짓했다.

“헨리는 이만 가 봐.”

공손하게 읍한 뒤 물러나는 헨리가 완전히 복도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문을 쿵 닫고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아빠.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주변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할 거예요.”

“내가 없는 동안 네가 가문의 일처리를 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나는 여전히 잘생긴 미간을 좁힌 가스파르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무릎에 폴짝 뛰어들었다.

‘역시 내 정체를 의심스러워할까?’

나라도 여덟 살 응애가 가주의 빈자리를 메꾸고 있었다고 하면 어린아이의 정체를 의심할 것 같았다.

“공작가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그를 대신해 네가 안간힘을 써서 가문을 돌본 거겠지.”

“…….”

“기특은 하다만 여덟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가스파르의 단호한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에녹과 실비에게는 내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영혼이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그건 내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순진한 에녹에게만 먹힌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실비도 내 말을 안 믿어 주는데 가스파르라면 내 정신을 치료하겠다며 의사나 신관을 붙일지도 몰라.’

그건 여러모로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일이라 곤란했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고민하는 순간,

“역시.”

입술을 달싹인 가스파르가 내 하늘하늘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다.

“내 딸은 천재였어.”

“…네?”

“아니, 천재라는 표현은 모자랄 수준이다. 천 년에 한 명 나올 법한 품재, 인간의 양능을 벗어난 천골 정도는 되는 거지.”

“아아, 응. 맞아요, 아빠….”

‘그래, 가스파르는 팔불출이었지.’

나는 제멋대로 납득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빛이시여, 시키신 임무를 다 하였나이다.”

나는 아빠의 눈치를 보게 된 헨리 대신 이본느 황비의 정보 길드인 ‘주목나무’에 뮤리엘 이아론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나는 헨리가 준 단편적인 정보와는 차원이 다른 어마무시한 서류의 양에 기가 질려 혀를 쯧쯧 찼다.

‘도대체 얼마나 뒤가 구린 짓을 하고 다니면 주목나무가 캔 정보의 양이 이 정도나 되는 거야?’

“읽는 데 시간 꽤나 걸리겠네.”

한숨을 푹 내쉬며 서류로 손을 뻗는 내 손에 도톰하긴 하지만 한 손에 잡히는 종이더미를 쥐여 주며 자르파라가 씨익 웃는다.

“나의 태양께서 이 서류를 전부 다 훑게 되면 별보다 반짝이고 자수정보다 아름다운 그 눈이 상할까 염려되어 제가 정보를 좀 정리해 봤습니다.”

“자르파라, 역시 최고야!”

물건만 잘 파는 게 아니었다.

자르파라는 상단주-대외적인 상단주이긴 했지만- 역할도 아주 훌륭히 해냄과 동시에 내 전용 보좌관 역할도 충실히 해 주고 있었으니까.

“자르파라 없었으면 엄청 힘들었을 거야. 고마워.”

“저, 그럼…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실지.”

나는 머뭇머뭇거리는 자르파라의 모습에 의아한 고개를 기울였다.

“뭐길래 그렇게 망설여?”

자금을 융통할 일이 생겼거나, 군사력이 필요해졌나?

“돈 문제면 편하게 말해도 좋아.”

공작가의 군사를 움직이는 건 나도 조금 힘을 써야 하는 일이지만-아빠에게 애교를 부려야 하니까- 돈이라면 썩어 넘치게 많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코코다이아를 활용한 사업도 슬슬 확장해야겠네.’

“나의 태양이시여, 제게 재물은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나이다.”

“그러면?”

“…송구하지만 며칠 전 빛께서 하녀들에게 입맞춤을 선사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내가 룰루랄라의 억지에 못 이겨 뽀뽀를 해 준 걸 말하는 건가?’

아크레아는 무척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라고 들었다.

‘음, 뭐 보기 싫을 수 있지.’

“알았어, 자르파라. 앞으로는 조심-”

“저도.”

“응?”

“저도 해 주실 수 있을지….”

나는 태양처럼 번쩍이는 자르파라의 금안에 입술만 달싹이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내 대답에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자르파라가 제 왼뺨을 내민다.

쪽.

그녀의 푸석푸석한 뺨에 가볍게 뽀뽀하는 순간,

쿵!

어디선가 날아 들어온 검은 바람이 자르파라의 몸을 휩싸기 시작한다.

‘마력?’

공작성의 결계가 발동된 수준의 엄청난 마력이었다.

대마법사인 루카스에게 직접 마법을 배운 나조차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르파라!”

위험에 처한 자르파라를 구하기 위해 내가 손을 뻗어 보았지만, 검은 바람은 그녀를 창밖으로 날려 보내고 말았다.

‘잠깐만. 이 장면, 언젠가 본 것 같은데?’

나는 자르파라를 날려 보낸 검은 바람의 원인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또 히스인 거야?”

취미가 제 왕국인 날려 보내기라도 되는 걸까.

나는 걸핏하면 자르파라를 창문 밖으로 날려 버리는 히스를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긴, 공작성 내에서 이 정도로 마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히스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공격이라도 받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정원 수풀에 쓰러진 듯한 자르파라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가 정리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레이디 뮤리엘 이아론

33세

자녀: 세르주 이아론

  

나는 뮤리엘의 가장 기본적인 신상 정보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레티샤의 이름이 빠져 있지?’

의아함에 다음 장을 넘기자, 그녀가 학술원 출신이라는 점과 현재 무슨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 소상히 서술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직업: 제국 학술원 교사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직업: 알레테이아 교단의 지부장

  

‘알레테이아 교단…?’

제국은 자애로운 여신 루엘라를 섬기는 루엘라드교가 국교인 나라였다.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교단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단이라는 건가?’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듯 자르파라가 정리해 준 다음 서류에는 알레테이아 교단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선구자 에티모스를 섬기는 교단. 선구자를 중심으로 열세 명의 현자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 아래 지부장들이 교리의 포교를 위해 힘쓰고 있다.]

  

주목나무라도 알레테이아 교단을 전부 다 파악하지는 못했는지, 현자와 지부장의 명단은 대부분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개중 기재된 이름 중에 익숙한 철자를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칼리시만에서 건너와 그레고르의 비(妃)가 된 율리아가 지부장, 아이네스가 열세 명의 현자 중에 한 명이잖아?’

“이게 무슨….”

입을 쩍 벌린 내가 기함하는 순간, 자르파라를 휘감았던 검은 돌풍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