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룰루랄라에게 뽀득뽀득 씻겨진 나는 티에리가 공작성에 잔뜩 보내 놓은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응접실로 나섰다.
엄연히 공작가의 일원인 내가 들어서는데도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생긋 웃으며 나를 턱짓한다.
“많이 컸구나, 레오노라.”
“누구세요?”
마치 나를 잘 안다는 듯한 시선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맞은편 소파에 풀썩 올라 앉았다.
“네 어머니인 노엘의 사촌인 레이디 뮤리엘이란다. 뮤리엘 이모라고 편히 불러도 좋아.”
‘아빠가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건 정말 엄마의 사촌이라는 거겠지.’
나는 나와 비슷한 실버블론드의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양을 힐끔하며 입을 열었다.
“레오노라예요.”
“알고 있어. 이 아이들은 내 아들인 세르주와 딸 레티샤란다.”
“안녕, 언니. 저는 레티샤예요.”
나는 인형처럼 큼지막한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인사에 생긋 웃었다.
‘나보다 어린애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엄청 귀엽네.’
쁘띠 플뢰르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축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교계에서 나는 제일 어린 축이었으니까.
“세르주다.”
레티샤의 귀여움에 정신이 팔린 내 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듯 박힌다.
“소문만큼 예쁘지도 않네, 뭐.”
“세르주!”
세르주라는 남자아이가 투덜거리는 말에 뮤리엘이 타박을 주었지만, 아이는 꿋꿋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내 소문을 들어 봤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친척이라는데 굳이 공대를 해 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세르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데.”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실뱅 이아론이나 모드라면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었지만, 엄마에게 뮤리엘이라는 이름의 친척이 있다는 건 오늘 알게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공작성에는 무슨 일로 왔어?”
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깨달은 세르주가 입을 꾹 다물자, 뮤리엘은 제 아들의 어깨를 꾹 누르며 대신 대답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 중이었단다. 마침 북부 근처에 발길이 닿으니 노엘이 생각나서.”
나는 아련한 뮤리엘의 목소리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우리 엄마가 생각나셨다고요?”
“그래. 노엘과 나는 친자매 같은 사이였거든.”
‘그렇게까지 친했다고?’
근데 왜 나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걸까.
나는 뮤리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랑 친자매 같은 사이셨다면 실뱅 숙부랑도 친하시겠네요.”
“아니, 그 남자 얘긴 꺼내지도 마렴.”
내 말에 뮤리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늘 제 동생인 노엘을 시기질투하던 아둔한 오라비였지.”
‘흠. 실뱅 편은 아닌 건가?’
내가 뮤리엘의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동안 그녀는 레티샤를 달랑 안아 들며 말을 이었다.
“여동생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사람은 사촌 오라버니라고 여기고 싶지도 않구나.”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이 잘 안 가네.’
나는 전생에 특수 부대의 요원이었고, 미친개라고 불릴 만큼 발달된 감각의 소유자였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웬만한 사람들은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뮤리엘은 조금 헷갈린다.
‘외모는 엄마를 닮아서 호감이 가긴 하는데, 속내를 모르겠어.’
의심쩍은 얼굴로 자신을 관찰하는 나를 민망한 기색 없이 대응하던 뮤리엘은 레티샤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잠시 북부에 머물면서 노엘을 추억하고 싶은데, 네가 불편하다면 머무르지 않으마.”
“…아빠가 허락하신 거라면 괜찮아요.”
나는 뮤리엘의 말에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이아론 후작가의 사람을 내쫓았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자기네들을 모욕했다며 실뱅이나 모드가 공작성까지 쳐들어올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그러니?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네. 곧 귀환 연회도 열리니까요.”
북부의 가주들과 봉신 가문만을 초대한 소규모 연회였지만, 친척이라니 초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집사에게 이모님도 참석하실 거라고 말해 놓을게요.”
“…넌 정말 노엘을 많이 닮았구나.”
내 말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뮤리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안주인 자리가 공석인데 연회는 네가 주최하는 거니?”
“네. 오데뜨가 워낙 유능한 집사이기도 하고, 제가 또 올해 쁘띠 플뢰르로 선정되었거든요.”
연회 준비라면 이제 지긋지긋했지만, 북부의 가주들에게 하차니아가 건재함을 보여 줄 필요도 있었으니까.
“그래. 그래도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다오.”
레티샤를 꼭 끌어안은 뮤리엘이 내가 기특하다는 듯 내 손등을 다정히 두드린다.
‘…내가 너무 의심했나?’
“네, 이모님.”
그때까지 나는 그녀가 단순히 엄마를 조금 많이 닮은 수상한 친척이라고 생각했다.
뮤리엘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으니까.
* * *
‘앗. 여기 있었네!’
나는 인적이 드문 본성의 3층 서재 창가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카리를 발견하고 오도도 달려 나갔다.
어차피 아이네스와 사랑에 빠지면 가족을 배신할 서브 남주라고 생각하면 괘씸하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으니까.
또 혹시 모른다.
‘지금 엄청 꼬셔 놓으면 나중에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자카리 오라버니~”
최대한 귀여운 목소리로 자카리를 불러 보았지만, 무거운 그의 눈꺼풀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에녹은 막내, 실베스테르는 실비라는 애칭이 있는데 자카리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따까리?”
자카리, 내 따까리가 되어라! 는 마음을 듬뿍 담은 별칭으로 자카리를 호명하자 그제야 그의 눈이 느릿느릿 뜨인다.
“…뭐?”
“레오노라예요. 오라버니, 뭐 하고 있었어요?”
“눈이….”
“웅?”
“…없나.”
‘눈이 있으면 자기가 뭘하고 있는지 알아서 보라는 건가?’
나는 끊어질 듯 말듯 이어지는 자카리의 구박에 입을 삐죽였다.
‘말 한번 예쁘게 하네.’
“…왜.”
‘왜 자신을 찾았느냐고 묻는 거겠지?’
그래도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감도 잘 안 왔는데, 이제 나는 자카리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알아먹을 수 있었다.
“자카리 오라버니랑 놀려구요.”
“…….”
‘이건 눈으로 무슨 헛소리냐고 묻는 거겠고.’
“왜냐면, 리니는 자카리 오라버니랑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내 말에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자카리의 입술이 미세하기 달싹인다.
“경…….”
“그쵸, 경고. 오라버니가 분명 알짱거리지 말라고 경고하시긴 했죠.”
자신이 말을 끝내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내가 신기한 건지 기분이 나쁜 건지 자카리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나는 그의 살벌한 눈빛에도 기죽지 않고 어깨를 앞으로 쭉 편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치만 리니는 알짱거리고 싶은데 어쩌지!”
‘와, 눈 봐.’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은 자카리의 새까만 눈에 어깨를 으쓱하는데, 열린 문틈 사이로 에녹의 머리가 쑥 튀어나온다.
“뭐야, 리니. 왜 여기 있어?”
“자카리 오라버니랑 놀려고.”
“쳇. 나랑은 안 놀아 주면서.”
나는 내게 터덜터덜 걸어오는 에녹의 한량 같은 물음에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녹, 손 줘 봐.”
“왜?”
“얼른!”
내 재촉에 영문도 모른 채 팔을 내민 에녹이 전형적인 막내 도련님처럼 보송보송한 손을 쫙 펼쳐 보인다.
‘이 자식, 굳은살이 전부 없어졌잖아…!’
군기가 다 빠졌어!
“손이 참 예쁘네?”
“그래? 고마….”
내 말을 단순하게 칭찬으로 받아들이던 삼남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내 들끓는 분노를 알아차렸는지 뒤로 반보 물러난다.
“왜, 왜 그렇게 봐?”
“놀고 싶다고?”
“아니. 방금 안 놀고 싶어졌어.”
“아냐, 에녹. 우리 놀자.”
훈련 놀이!
이를 뽀득 갈며 에녹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언제 서재에 들어섰는지 모를 실비가 나를 달랑 안아 든다.
“나는.”
“응?”
“나도 같이 놀고 싶은데.”
“실비, 나 지금 훈련 놀이 말하는 거야.”
실비 손은 슬쩍 봐도 굳은살이 아주 빼곡했다.
“실비는 따로 특훈 안 해도 되잖아.”
내 말에 내가 무슨 나쁜 말이라도 했다는 듯 실비의 단정한 얼굴이 쿠쿵! 와르르 무너진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기라도 할 것 같은 실비의 목소리에 떨떠름히 입을 열었다.
“…그야 실비는 나 없이도 훈련 잘 받고 있으니까?”
“아니다. 지난 열흘 동안 놀았다.”
어제도 연무장에 출근하는 걸 봤는데 무슨?
실비의 뻔한 거짓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는데, 훈련받기 싫어 슬쩍 도망가려던 에녹이 슬금슬금 돌아온다.
“나 그냥 훈련할래.”
“아까는 훈련 싫다면서?”
“아 몰라! 나 오랜만에 리니랑 둘이 특훈할 거니까 형은 빠져!”
“너나 꺼져라.”
아웅다웅거리는 에녹과 실비의 목소리에 자카리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제 낮잠을 방해하는 이들을 죽이겠다는 살벌한 눈빛이었다.
‘아니, 시끄럽게 하는 건 쟤들인데 왜 나를 노려보고 그래….’
“너.”
“네, 네?”
저벅저벅 다가온 자카리가 당황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내게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