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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21)화 (356/486)

제121화

“참가 자체를 제외시켜야 해요! 공녀는 쁘띠 플뢰르의 자격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슈발리에이자 참가자인 레오노라가 무기를 사용해 다른 참가자들이 깃발을 점거하지 못하도록 막은 게 반칙인 것이냐 아니냐’를 주제로 한참 논쟁을 벌이던 운영 위원들은 유독 공녀의 행동이 부당하다 주장하는 심사 위원을 흘깃했다.

“지금 너무 편파적으로 나오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수도의 전통이나 마찬가지인 쁘띠 플뢰르의 운영을 3대째 맡고 있는 로덴드론은 비밀 심사 위원의 표식인 검은 나비 브로치를 어깨에 단 카라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쁘띠 플뢰르의 심사는 공정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심사 위원님.”

‘따분한 목소리에 지루한 말투, 로덴드론이네.’

네르바 휘하의 신관인 로덴드론의 정체를 파악한 카라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가면을 미세하게 위로 추켜올리며 입을 비틀었다.

“당신, 월계수 잎이 몇 장이나 되는 신관이지?”

자신이 신관이라는 사실을 비밀 심사 위원이 파악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로덴드론이 흠칫 놀라 어깨를 떤다.

“난 대신전의 뿌리를 이루는 자. 훗날을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카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로덴드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그를 협박했다.

“허, 쁘띠 플뢰르의 비밀 심사 위원들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정체를 감추는 게 원칙이라는 걸 잊은 겁니까?”

그런 카라를 말리듯 또 다른 심사 위원이 앞으로 나서며 헛웃음을 짓는다.

“지금 이분께서 부러 가면을 들춘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사뮈엘 대공 각하가 이번 쁘띠 플뢰르의 비밀 심사 위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나요?”

카라는 사뮈엘 대공의 말에 반박하며 대놓고 제 목소리를 드러냈다.

“왜 대공께서는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고, 저는 안 되는 거죠? 소속의 문제일까요?”

선황의 동생인 사뮈엘 대공은 황실 소속, 추기경인 카라는 대신전 소속의 사람이었다.

“이건 명백한 차별 행위입니다!”

카라는 신전과 황실이 평소 알력 다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 내며 항의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대공께서는 부러 정체를 드러내신 게 아니라,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워낙 티가 나시는 분이시라….”

카라의 공격적인 언행에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사뮈엘 대공을 감싸듯 운영 위원 몇몇이 나서서 대신 그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예. 풍채도 풍채시고, 가면으로도 도무지 가려지지 않는 카리스마가 있으시니까요.”

운영 위원의 말마따나 사뮈엘 대공은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북부 출신 기사들보다도 한 머리가 큰 장신인데다 희귀한 은발의 소유자였다.

멀리 떨어져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인영만으로 사뮈엘 대공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심사 위원의 가면은 정체를 감추는 데는 별 소용이 없었다.

“허. 그대 행동이 기가 막혀 정체가 알고 싶어질 정도군.”

그레고르가 황위에 오른 뒤 황실 뒷방에 틀어박혀 은둔하다시피 지내는 사뮈엘이었지만, 그의 오랜 친우이자 쁘띠 플뢰르 운영 위원장인 세릴이 한 번만 심사를 맡아 달라 애원하고 또 애원해 올해 겨우 심사에 참가한 참이었다.

“그토록 정체를 알리고 싶은 거면 가면이라도 벗게.”

대공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카라를 내려다보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싫습니다. 다만 대신전을 이끄는 월계수의 뿌리라고만 말씀드려 두죠.”

추기경이라는 뜻이었다.

카라의 폭탄선언에 화들짝 놀란 운영 위원들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그녀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허억! 추, 추기경 예하께서 직접 심사를 맡아 주신 겁니까? 올해 쁘띠 플뢰르는 참으로 각별하군요!”

카라는 단번에 안색을 바꾸고 제게 호의를 보이는 운영 위원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도 수도 출신 신관으로 전통 있는 대회이자 축제인 쁘띠 플뢰르를 매우 아낀답니다. 그래서 참가한 거고요.”

“추기경 예하께서 직접 심사 위원으로 나서 주셨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쁘띠 플뢰르는 앞으로 점점 더 주목받는 대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잔뜩 흥분한 운영 위원에 말에 고개를 까딱한 카라는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쁘띠 플뢰르의 본질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요.”

“본질이요?”

“네. 쁘띠 플뢰르는 차기 사교계를 이끌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잖아요.”

카라는 제 말에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간의 화합을 이루어 내고 인맥을 쌓는 게 특기인 영애가 쁘띠 플뢰르로 선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그건 그렇지요, 예하.”

“자신을 지켜 줄 슈발리에조차 데려오지 못한 레오노라 공녀가 과연 쁘띠 플뢰르로서의 자격이 있는 걸까요?”

정체를 드러내기 전과 달리 카라의 말에 운영 위원들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대공을 제외하곤 내게 넘어온 것 같아.’

비밀 심사 위원들 중에서 운영 위원들이 각별히 신경 쓸 인물은 추기경인 카라와 대공인 사뮈엘, 둘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카라는 날카로운 사뮈엘 대공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운영 위원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깃발잡기의 승패는 무효로 하고, 정말로 쁘띠 플뢰르다운 주제로 다시 본선을 치르도록 해요.”

“어떤 주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쁘띠 플뢰르 참가자들이 직접 싸우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었으니까요. 슈발리에를 통한 명예 결투로 쁘띠 플뢰르를 선정하는 게 좋겠어요.”

깃발잡기를 본선 주제로 해야 한다고 우길 때는 언제고, 카라는 깃발잡기가 격 떨어지는 주제였다며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본디 레이디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사가 슈발리에인 법이니까요.”

“하지만 레오노라 공녀는 슈발리에가 없지 않습니까?”

운영 위원들 중 한 명이 의아한 목소리를 높이자, 카라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공녀는 자동 탈락이 되는 거죠.”

소매 끝으로 입매를 가린 카라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를 만들어 내면서도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어요.”

“…슈발리에만 구해 오면 저도 계속 쁘띠 플뢰르에 참가할 수 있는 건가요?”

뒤따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로 일그러지고 말았지만.

“공녀!”

카라는 레오노라의 목소리에 발작하듯 입술을 짓씹었다.

“레오노라 영애, 참가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운영 위원회의 회의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요. 스텔라도 모드도 모두 대회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는걸요.”

레오노라가 큼지막한 보라색 눈을 느릿느릿 깜박이며 어린아이처럼 대답하자, 그녀에게 목소리를 높였던 운영 위원이 입가까지 허물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죠. 참가자인 공녀가 대회 결과를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하니.”

“네에.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운영위원은 샐쭉 웃으며 귀엽게 사과하는 레오노라를 더는 혼내지 못하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지금 깃발잡기는 무효로 처리하고, 명예 결투로 본선을 치르자는 말이 나온 참입니다.”

“명예 결투라면… 슈발리에가 꼭 필요하겠네요? 저, 사실 슈발리에로 생각해 놓은 기사님이 계세요.”

레오노라의 말에 운영 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세 치 혀를 놀리던 카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연다.

“잊었나 본데, 본인이 속한 가문 출신의 기사는 슈발리에로 선정할 수 없어요.”

“네. 저희 가문의 기사는 아니에요. 스텔라 영애처럼 ‘같은’ 가문이 아니라는 핑계로 방계 가문의 기사를 슈발리에로 삼지도 않을 거고요.”

레오노라의 말에 찔리는지 솔로아 출신의 운영 위원이 헛기침을 쿨럭인다. 스윽, 그에게 눈치 아닌 눈치를 준 아이는 종종 앞으로 달려 나와 양팔을 높이 펼쳐 들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제 슈발리에를 소개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녀의 말이 신호라도 되었는지 군중석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곧 인영 셋이 허공에서 착지하며 운영 위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레오노라의 슈발리에는 접니다.”

“아냐, 나야! 나예요!”

“나입니다.”

가면을 뒤집어쓴 소년 둘은 누가 봐도 레오노라 공녀의 오빠들인 실베스테르 하차니아와 에녹 하차니아였다.

“공녀, 아까도 말했다시피 가문 소속의 기사는 슈발리에로 선정할 수가….”

“전 공작가 소속이 아닙니다.”

운영 위원의 말을 자르듯 나선 소년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될 정도로 휘황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햇볕을 받아 새하얗게 부서지는 회색 머리칼 아래, 잿빛 하늘의 오묘한 빛을 담은 회청안과 눈이 마주친 운영 위원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그렇다면 이쪽이 공녀의 슈발리에…!”

“아니에요!”

운영 위원의 말에 화들짝 놀란 레오노라는 앞으로 튀어나와 소년의 팔뚝을 붙잡아 뒤로 밀어냈다.

“내가 히스 너, 나오지 말랬지! 오빠들도!!”

“…….”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진짜! 너네 다 내 슈발리에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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