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97)화 (332/486)

제97화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신관들의 모습을 훑으며 눈을 가늘였다.

어깻죽지에 달린 월계수 잎으로 추정하건대 추기경들이었다.

‘발레리아누스가 교황으로 발탁되었으니 현 시점의 추기경은 네르바, 카라칼라와 마크리누스겠네.’

하차니아는 신전과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들의 권력 구조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엘라드교의 최고 기관인 교황청을 이끄는 수장이 교황, 그리고 그런 교황청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권력의 중심 대신전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추기경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추기경은 루엘라드교의 심의회와 국무원을 이끄는 것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는데 루엘라드교의 추기경은 총 네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비밀 추기경이라 누군지는 교황만 알고 있겠지만….’

“여신 루엘라의 레갈리아를 넘기겠다뇨! 그건 교황의 대리 권한을 저 조그마한 계집아이에게 넘기겠다는 말씀 아니신지요?!”

일단 교황에게 득달같이 소리를 치며 달려드는 괄괄한 여자는 비밀 추기경은 아니었다.

“네르바. 골 아프니 목소리 높이지 말거라.”

“성하!!!”

“이 몸이 언제 당장 레갈리아를 아기 공녀에게 넘기겠다 했느냐? 신전 내 배신자를 색출해 내는 자에게! 상으로 내리겠노라 한 말이다.”

교황의 말에 네르바라고 불린 추기경의 안색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배신자를 색출만 하면 루엘라 님의 레갈리아를…? 그럼 저는 교황의 자리에 한 계단 더 가까워지겠군요!”

아주 대놓고 야망이 드글드글한 사람이었다.

‘뭐, 추기경 정도의 자리에 오르려면 보통 야망이 없진 않겠지만.’

나는 그런 네르바와 달리 유순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린 여자와 나를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레오노라예요.”

아이답게 인사하자 유순한 인상의 여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인다.

“추기경 카라칼라입니다. 편히 카라라고 불러 주세요, 공녀님.”

“마크리누스다. 불편해도 마크리누스 추기경 예하라고 부르도록.”

‘얘네도 성격이 다 다르네.’

나는 소심한 카라와 오만한 마크-내 마음대로 줄여서 부를 거다.-를 번갈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성하께서 설명하셨다시피 제게 레갈리아를 주시겠다고 하신 건 아니었어요. 다만 루엘라드네(교황청이 위치한 지역)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 성하께 감히 저주를 건 추기경이 있다니 신자의 한 명으로서 분개할 수밖에 없네요.”

나는 어린 마음에 분노를 숨길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름 추기경들에게 경고를 날리기 위해 악당다운 표정을 지은 것인데 마크와 카라, 그리고 네르바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하아. 아기 공녀가 이 몸을 이리 생각해 주니 저주가 싸악 가시는 것 같도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교황이 나를 인형처럼 꽉 안아들더니 내 뺨에 제 까슬까슬한 뺨을 부빈다.

“공녀, 이 몸의 시동 자리를 정말 거절하겠느냐? 다음 대 추기경을 노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리거늘.”

“…….”

“나처럼 잠들지 못하는 네 아비가 걱정이라면 공작의 처소도 교황청 내에 마련해 줄 수 있단다.”

교황청이 존재하는 루엘라드네는 제국 내에서 독립성을 인정받은 또 다른 왕국과 마찬가지였다.

추기경들은 그런 루엘라드네에서 교황 다음가는 권력자들이었으니 확실히 혹할 만한 제안이다.

“아뇨, 성하. 저는 추기경이나 교황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요.”

하지만 나는 발레리의 말에 느릿느릿 고개를 저은 후 아무 욕심도 없다는 듯 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그저 성하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뻐요.”

“아이고, 기특한지고. 세상에 어쩜 이리 상냥하고 다정한 아기가 있는지.”

잠 한 번 재워 준 걸로 내게 푹 빠진 발레리가 나를 보는 얼굴은 거의 룰루랄라급 팔불출의 것이었다.

‘물론 당신 권력과 힘에는 관심 많지만.’

추기경이나 교황이 되어 버리면 하차니아를 공국으로 독립시키겠다는 야심을 접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하, 제가 또 필요해지신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매일이라도 재워 드릴 수 있으니까요.”

“바쁜 공녀의 시간을 어찌 그리 빼앗겠느냐. 이틀에 한 번만 찾으마.”

“……아. 네.”

‘이틀에 한 번 씩이나?’

귀찮긴 했지만 교황의 환심을 사면서 동시에 루엘라드네의 동태를 살필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뚱한 얼굴로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제 몸만 노려보고 있는 루카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의 몸은 안전하게 지켜 주실 거죠?”

“그래. 이 몸의 성력으로 저주를 어느 정도 파훼시키긴 했다만 완전히 정화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상냥한 아이처럼 공손하게 읍한 후 교황청의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 * *

“얼굴이 도대체 왜 그래? 몸을 두고 나온 게 불만인 거야?”

수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도통 표정을 풀지 않는 루카스의 무릎을 붙든 채 휘둥그레 눈을 떴다.

“아니.”

내 약지를 장식하고 있는 페리도트 반지를 흘깃한 루카스가 느릿느릿 말문을 연다.

“어차피 아티팩트가 지키고 있지 않나. 그 여자 말대로 나도 파악할 수 없는 저주가 얽혀 있어 당장 몸을 되찾을 수도 없겠더군.”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네가 이틀에 한 번 그 여자를 재워 주러 오겠다고 약조했지 않나.”

“으응. 그랬지.”

“그럼 난 이틀에 한 번씩이나 혼자 자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뚱하다 못해 심술 맞은 루카스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애도 아니고 혼자 왜 못 자는데?”

“난 불면증 환자다.”

“그거 내가 만든 꾀병이잖아!”

“진짜로 생겼다.”

아니, 이 인간들이 정말 내가 숙면을 위해 존재하는 죽부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루카스와 내가 같이 잔다는 핑계로 에녹, 실비, 최근에는 히스까지 침대로 기어 들어와서 이러다 쪄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침대 두 개를 붙여 달라고 할까….’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나를 죽부인처럼 쓰기 위해 엉겨붙는 가족들을 내보낼까 고민하는 와중, 마차는 성실하게 달려 수도 저택에 당도했다.

“아가씨! 각하!”

저택에 들어서는 나를 오데트를 위시한 고용인들이 현관에서 맞이한다.

‘아니, 보통 가주를 먼저 찾지 않나?’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고용인들의 무관심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 휘적휘적 제 집무실을 찾아갈 뿐이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교황 성하의 불면증을 치료하셨다면서요?!”

그런 루카스에게 공손하게 읍한 후 황급히 몸을 돌린 오데트가 나를 안아들며 눈을 반짝인다.

“…아니, 치료까지는 딱히.”

뭐 한 게 있어야 치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아이네스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어쩜 우리 아가씨는 상냥하고 다정하고 능력도 좋으신데 겸손하시기까지!”

하지만 내가 모종의 능력을 숨기고 있어 교황의 불면증을 치료했다고 믿는 건 아이네스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는 아가씨도 모르는 치유계 이능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아가씨가 요즘 저택을 자주 비우시는 통에 고통을 호소하는 고용인들이 늘었거든요.”

나는 호들갑을 떠는 하녀들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고용인들이 아프다고?”

수도 저택은 공작성과 달리 의료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상주하는 의사가 한 명뿐이라 고용인들이 한꺼번에 아프게 되면 안 되는데.’

“어디가 아파? 힐다라도 불러와야 하나?”

“네! 저만 해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꼬박 18시간 39분 정도 아가씨를 보지 못했더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과 함께 미열과 홍조, 의욕 상실 증상이 생기던 걸요!”

“저도요. 아가씨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도저히 일할 맛이 나지 않던데요.”

“전 아가씨가 저택에 계시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요….”

“음. 다들 건강해서 다행이네.”

나는 두 손을 꼭 붙잡은 채 울망울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하녀들을 스윽 지나쳐 나만을 위해 마련된 작은 서재에 들어섰다.

‘이제 슬슬 멜리사가 루카스의 몸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 때가 됐는데.’

잠들어 있는 루카스의 몸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은 교황만이 아니었다.

‘추기경과 신관들도 목격했으니 금세 황도까지 소문이 퍼지겠지.’

멜리사가 어떻게 나올까.

나는 움후후, 악당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 * *

“아. 루카스의 몸을 은폐하라고 명한 게 짐이라는 사실을 발설한다면 혓바닥이 잘릴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거다, 멜리사.”

애인인 그레고르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황성까지 달려왔던 멜리사는 실크 이불을 꼭 움켜쥔 채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맞아 주는 그레고르의 태도가 평소와 다름없었기에 당연히 루카스와 관련되어 꼬여 버린 자신의 일을 해결해 줄 줄 알았다.

“지, 지금 뭐라고…. 저를 도와주지 않으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짐이 도와줄 게 뭐가 있지? 의식을 잃은 황자의 몸을 여태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다니. 듣기만 해도 귀가 더러워지는 범죄인데.”

“폐하! 절 귀애하신다면서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짐의 앞길을 방해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레고르는 비뚜름히 웃으며 제 날카로운 턱을 쓸었다. 멜리사 왕녀는 확실히 아름다웠지만, 제국에 미인은 넘치도록 많았다.

“결혼한 여자라도 짐이 원한다면 황성에 들어와야 하는 법을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도 짐에게 여자는 넘치게 많을 테니 이제 왕녀는 필요 없어.”

그레고르의 말에 황망한 얼굴을 일그러뜨린 멜리사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다 그 망할 계집애 때문이야.’

눈앞의 황제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어린 공녀에게 원한을 품는 게 쉬웠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