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96)화 (331/486)

제96화

발레리는 내 무릎 위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내리 잤다.

장신의 교황은 비율이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덟 살 아이의 작은 무릎으로 어른의 머리통을 지탱하는 건 꽤나 버거운 일일 터였다.

해서 신관들이 몇 번씩 알현실을 드나들며 교황을 깨우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물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연한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부디 교황 성하를 깨우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성하께서 불면증을 앓고 계셨다 들었어요. 계속 힘드셨을 텐데 제 불편함을 이유로 깨우고 싶지 않아요.”

“아직 연치도 어리신 분이 어쩜 이리 상냥하신지….”

그러자 다과를 들고 알현실을 찾은 신관 한 명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본다.

“역시 루엘라 님께서 성하를 위해 보내 주신 고매한 소녀! 하차니아 공작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하.”

월계수 잎이 열 개.

그러니까 추기경 다음가는 고위급 신관처럼 보이는 여자가 곤히 잠든 발레리를 내려다보며 속삭인다.

‘그래, 바로 이 반응이야!’

최대한 신관들의 호감을 사서 공국으로 독립할 때 도움을 받겠다는 흑심을 숨긴 나는 루카스가 마나로 감싸 준 덕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무릎을 부러 통통 두드리며 힘든 티를 냈다.

“괜찮아요. 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다정한 아기 공녀님, 무릎이 아프신 게 뻔히 보이는 걸요. 여신 루엘라의 다섯 번째 종 디오리누스, 공녀님의 상냥함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응. 나도 네 이름 절대 잊지 않을게!’

나는 내게 잔뜩 호감을 품은 듯한 신관의 이름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팔랑였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하며 손이 심심해 습관처럼 원작을 펼쳐 들었던 나는,


“황녀 전하, 대신전에 심어 놓은 세작에게 전보가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교황 발레리의 불면증을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가 치료했다고 합니다!”

“…뭐?”

아이네스는 아멜리아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레리의 불면증은 나만 치료할 수 있는 저주였을 텐데?’

교황의 불면증은 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흑주술을 이용한 저주였다.

몇 번이나 반복된 아이네스의 생에서 그녀가 교황의 불면증을 돕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부러 도와주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둔 적 한 번 빼고는 말이지….’

“하차니아가 나를 방해하는 거, 더는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아멜리아.”

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미소를 입가에 매단 아이네스는 손에 쥔 세작의 전보를 북북 찢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생에서 나는 교황 발레리를 도울 생각이었어.’

아이네스의 계획에 교황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교황에게 저주를 거는 추기경이 누군지 아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데…!’

“레오노라, 였지? 막내 공녀의 이름.”

아이네스는 입안을 까드득 깨물며 막내 공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레오노라, 레오노라 하차니아라….”

늘 자신을 위해 마나를 공급하고 희생양이 되어 주던 하찮은 계집이 언제부터 제 걸림돌이 되어 버린 걸까.

“마나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아멜리아, 레오노라를.”


‘레오노라를! 레오노라를 뭐 어떡할 건데?!’

발작하듯 책을 붙들었다.

이 사이코패스 황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걸까.

뚝 끊겨 이어지지 않는 원작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할 수 없이 책을 덮었다.

“으하함. 개운한지고.”

마침 발레리가 잠에서 깨어난 덕에 원작을 더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까.

“아기 공녀야, 이 몸이 이렇게 깊이 잠든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다행이에요, 성하.”

“공작의 불면증도 네 덕에 나았다더니 공녀에게 신묘한 힘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발레리의 백안은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다정하고 자애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발레리가 루엘라의 가장 자애로운 종이라더니, 여태 난폭한 모습을 보였던 건 잠을 못 자 예민해서 그랬던 걸까.’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이 위대한 몸이 공녀에게 못 해 줄 것이 없겠구나. 내게 부탁할 일은 없는 것이냐?”

나는 인자한 웃음을 짓는 교황을 향해 예쁘게 눈을 깜박이다 알현실 소파 구석에 박힌 포대기를 발로 툭툭 쳐 꺼내 들었다.

“성하, 혹시….”

“아기야. 설마 살인을 저지른 게냐.”

누가 봐도 사람 몸이 든 포대기를 스윽 훑어본 발레리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진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원칙적으로는 루엘라 님을 섬기는 이 몸은 살인자의 죄를 사해 줄 수 없지만, 공녀에겐 특별히 면죄부를 주겠느니.”

“아, 안 죽였어요!”

불면증 좀 치료해 줬다고 살인까지 용서해 주겠다니.

나는 다짜고짜 내게 축복을 내리려는 발레리의 손길을 피하며 냉큼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 계세요, 성하. 멜리사 왕녀님의 지하실에서 제가 찾아낸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이에요.”

“…이게 루카스 황자라고?”

내 말에 발레리는 손끝으로 성력을 발휘해 루카스의 몸을 감싸고 있는 포대기를 벗겨 냈다.

허공에 붕 뜬 루카스의 은발이 나풀나풀 흔들린다.

멜리사의 광기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래의 루카스를 보니, 그녀가 왜 그토록 빠져들었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성하께서는 육신에 남은 흔적을 추적해 루카스 황자 전하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의식을 잃으신 건지 알아내실 수 있잖아요.”

몸을 보관하고 있던 멜리사가 루카스의 일에 어디까지 얽혀 있는지도 밝혀내야 했고, 가스파르의 의식은 왜 사라져 버린 건지도 알아내야 했다.

발레리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가스파르를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게 아파 오면서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루카스 황자 전하를 돕고 싶어요, 성하.”

그래야 우리 아빠도 의식을 찾을 테니까.

나는 루카스의 말에 따르면 늘 ‘의식 저 건너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가스파르를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투 쥔 주먹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기 공녀야, 신탁이 말했던 황자의 사생아가 정말 공녀가 맞았던 게로구나. 그러니 이리 마음을 쓰는 게지.”

쯧쯧,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찬 발레리가 나를 달랑 안아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힌다.

“루엘라 님의 사랑을 받는 황자였던 그를 지키지 못한 건 당시 추기경이었던 이 몸의 불찰도 있었던 게야. 내 대신전과 교황청을 대신해 사과하마.”

잔잔하게 떨리는 내 등을 찬찬히 쓸어내린 발레리는 내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효녀라는 착각을 단단히 한 듯싶었다.

“어찌 공녀처럼 착한 아이가 존재할고. 루엘라 님의 현신이라고 해도 이 몸은 믿겠구나.”

“과, 과찬이세요. 성하.”

동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발레리의 백안이 반짝이자, 나는 진심으로 부담스러워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자 교황이 내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루카스 황자의 몸은 멜리사 왕녀가 보관하고 있었던 게 맞구나. 아주 진득한 애욕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더러운지고….”

발레리는 혀를 짧게 차며 루카스의 몸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루카스의 몸을 감싼 새하얀 빛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발광한다 싶더니 콰쾅! 소리와 함께 발레리의 성력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허. 황자의 몸 자체에 저주가 걸려 있구나.”

“누가 걸었나요, 그 저주?”

내 물음에 조개처럼 딱 다물어진 발레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누가 저주를 걸었냐고 묻지 않나.”

그러자 소파와 멀리 떨어진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교황과 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루카스가 저벅저벅 걸어 나와 자신의 몸을 가리킨다.

“대답해.”

잔뜩 흥분한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제 몸을 살피고 있는 여자가 교황이라는 사실도 잊은 듯 보였다.

“…정확히 누군지는 추정할 수 없지만 성력이 저주의 근본으로 파악되는군.”

다행히 루카스의 분노가 황가에 대한 충정심일 거라 짐작했는지 발레리는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추기경급 성력이라 이 몸도 완전히 추적해 낼 수는 없겠어.”

“추, 추기경이요?”

나는 발레리의 말에 잔뜩 당황해 입을 벌렸다.

‘황실과 대신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황자를 직접 저주할 정도였다고?’

아니, 이건 그레고르와 손을 잡은 추기경급 신관이 있는 거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발레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추기경 중 배신자가 있는 거겠지. 내 불면증도 저주로 추정하고 있네.”

자신의 불면증이 저주의 여파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레리가 침중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제국의 공작과 공녀인 그대들에게 고백하긴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현 교황청과 대신전은 내부적으로 큰 분란을 겪고 있네. 추기경들이 이끄는 대신전은 내 통제를 듣지 않는데다 어떤 신관이 언제 교황인 이 몸의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어. 이 몸이 저주에 걸려 몸이 크게 약해진 이후로 분란이 더더욱 고조되고 말았지.”

“…….”

“그런 상황인지라 이 몸의 온전한 힘을 전부 보태 줄 수 없어 미안하군. 공녀는 이 몸에게 큰 힘이 되어 줬는데.”

발레리의 사과에 침을 꼴깍 삼킨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 놓은 원작을 매만지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성하, 만약 누군가 성하를 배반하고 저주한 그 추기경을 찾아낸다면 그 공을 어떻게 치하하실 건가요?”

“글쎄. 루엘라 님의 레갈리아 정도는 전부 넘기지 않을까.”

“지금 교황 대리의 권한을 누구에게 넘기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알현실에 들어선 누군가가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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