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70)화 (305/486)

제70화

‘아니, 어차피 넌 내 아빠 아니잖아?’

나는 티에리의 발언에 잔뜩 성이 났다는 듯 거칠게 서류를 휙휙 넘기는 루카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민망한 턱을 긁적였다.

가스파르 몸에 오래 들어와 있다 보니 동기화라도 된 걸까.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집무실을 뒤집어엎을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난 내가 했다는 말이 도대체 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잠꼬대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루카스의 무릎에 앉아 그와 함께 서류를 보던 나는 데구르르 눈을 굴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반니… 화나또요?”

“아니. 내가 왜.”

그렇게 대답하는 루카스의 손안에서 서류가 와락 구겨진다.

나는 헨리가 ‘아이고, 황실에서 내려온 공문서를!’하고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크흥 헛기침을 했다.

“아님 말구….”

주눅 든 내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주름진 서류를 착착 펴낸 헨리가 책상에 다가선다.

“각하, 그리 열 내실 필요 없으십니다. 물론 아가씨께서 요즘 레이디 티에리를 부쩍 따르시긴 합니다만 아버지인 각하만큼 따르실까요.”

“……아버지라 나를 따른다라.”

“예, 예! 누가 뭐래도 아가씨의 하나뿐인 아버지는 가스파르 데지레 드 하차니아, 다름 아닌 각하 아니십니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헨리가 하는 말에 안 그래도 저조했던 루카스의 기분이 점점 더 가라앉았다.

‘입 닥쳐, 이 자식아!’

소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 된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헨리를 집무실 밖으로 내쫓았다.

“…루카쯔.”

“왜.”

“니니는 루카쯔도 조아해.”

손가락을 옴질거리며 내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루카스의 잘생긴 눈썹이 슥 올라간다.

“내가 이 몸에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넌 공작을 좋아하니까.”

“아냐. 니니는 언래 잘생기묜 조아해.”

나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루카스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가스파르만큼 잘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황가는 특출한 외모로 유명하니 루카스도 분명 잘생겼을 거다.

“넌 내 얼굴을 모르지 않나.”

그러자 내 말에 루카스가 뚱하게 반기를 든다.

“루카쯔는 마나가 잘생겨떠. 마나가 예뿌면 얼굴도 예뽀. 구래서 니니가 예뿌자나.”

루카스의 마나가 나의 마나였으니까.

나는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진주빛 마나를 흩뿌리며 루카스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슬슬 입매가 허물어진 그가 마지막 반격이라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흠. 언제는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라면서.”

“구니까, 루카쯔 조은 파뜨너라구. 니니의 하나뿌닌 파뜨너.”

“하나뿐인 파트너?”

“우웅.”

“하나뿐인, 이라고.”

“웅!”

붕- 붕-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카스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아휴, 어른 다루기 드럽게 어렵네.’

나는 그제야 제대로 서류를 보기 시작하는 루카스의 어깨를 도닥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 * *

황제의 오촌 조카라는 여자들을 돌려보낸 후, 이아론 후작가에서 서신이 한 통 날아왔다.

‘공작가를 걱정하는 척 엄청 훈계하는 내용이네.’

실종된 노엘은 죽은 게 틀림없으니 더는 궁상 떨지 말고 서둘러 공작부인을 들이라- 는 내용의 편지를 주욱 살핀 나는 종이를 북북 찢어 화로에 던져 버렸다.

‘이아론 후작이라….’

원작 내에선 거의 비중이 없긴 했지만, 그는 그레고르 황제의 충복이긴 했다.

‘그래서 황제와 친밀한 관계의 여자들을 공작부인 자리에 앉히려고 드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제 사위에게 재혼을 독촉하다니, 딸인 노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노인네였다.

가늘게 접힌 눈으로 화드득 타오르는 종이쪼가리를 노려보던 나는 방문을 두드리는 단정한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가씨, 코제트입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드러와.”

나는 방문조차 소리 없이 열면서 완벽한 몸가짐을 선보이는 코제트에게 붉은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아가씨?”

“니니 선무.”

훈련용 선글라스가 막 필요했던 시점, 가난한 아기에 불과했던 나는 코제트의 안경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완전범죄였지.’

그 누구도 내가 코제트의 안경을 훔쳐 선글라스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리라.

하지만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안경을 가져가 버린 탓에 불편한 외알 안경을 쓰고 다니던 코제트가 그간 은근히 마음에 걸렸었다.

“어머… 안 돌려주셔도 되는데.”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코제트가 상자의 리본을 풀어헤친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운 안경이에요. 이렇게 값진 안경을 제가 받아도 될까요?”

내가 코제트를 위해 제작한 안경은 테두리에 무려 사파이어가 장식된 고급품이었다.

“코졔뜨, 곤자까를 위해 열씨미 일해 주니까.”

게다가 자르파라가 열심히 일해 준 덕에 나는 이제 엄청난 부자였다.

내가 콧잔등을 손끝으로 스윽 쓸며 하는 말에 감동받은 코제트가 울망울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코제트, 상냥한 아가씨와 공작가를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웅!”

나는 씩씩하게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는 코제트를 향해 방싯 웃었다.

“이아론 후작가에서 일손을 돕겠다며 사람을 보내겠다는데 지금 같은 기분이면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네요!”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방글방글 웃으며 코제트가 하는 말에 나는 그녀 몰래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아론 후작가에서 공작가에 사람을 보낸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혹시 아이네스가 알고 있는 건 없으려나.’

코제트를 내보낸 나는 서둘러 원작을 펼쳐 들었다.

내용에 진척이 없어 들여다보지 않았더니 그간 아이네스는 꽤나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하긴, 나도 이제 곧 네 살이 되니까.’

황궁 여기저기를 뽀짝뽀짝 걸어 다니며 온갖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다니는 그녀의 행보를 훑은 나는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을 손끝으로 짚어 냈다.


‘아무리 압박을 가해도 절대로 마나통을 내놓지 않고 있단 말이지.’

아이네스는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다르게 행동하는 하차니아 공작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멸문할 하찮은 공작가 주제에 짜증 나게 신경을 건드려.’

아빠인 그레고르를 꼬시는 것을 제외하면 제 뜻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투자건도 번번이 다른 상단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이야.’

기막힌 일이었다.

회귀자인 자신보다 미래를 잘 아는 것처럼 한발 앞서서 사업 아이템을 가로채는 상단이라니.

‘상단주 이름이 자르파라라고? 죽여 버리겠어.’

검지로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아이네스는 의자에서 내려와 설렁줄을 흔들었다.

‘푸른 독수리를 움직일 때야.’

아이네스가 내탕금까지 전부 털어 꾀어낸 ‘푸른 독수리’는 지금 이아론 후작의 품에 있었다.

‘불륜을 즐기는데다 허영심만 그득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유일한 수족이니까.’


‘푸른 독수리’를 움직인다고?

푸른 독수리는 윌레닌 황가를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첩보 단체이자 노예에 가까운 종복이었다.

‘뭔 놈의 아기가 벌써부터 세작을 부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책을 덮은 나는 이제 막 세 살이 될락 말락 한 아기에 불과한 아이네스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족의 말만 듣는 수족이 있다는 건 확실히 유용하겠지만… 아이네스가 원래도 푸른 독수리를 사용했었나?’

아이네스는 브리넨 구휼원을 박살 낼 만큼 인권을 생각하는 여주가 아니었나.

내게도 코제트나 헨리, 자르파라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푸른 독수리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푸른 독수리의 심장에는 황족의 말을 거역할 수 없게 하는 아티팩트가 심어져 있으니까.

‘그런 끔찍한 억제를 받는 일꾼 따위, 나는 사양이야.’

히스를 병기로 쓰던 브리넨 후작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불륜 따위를 즐긴다니 더더욱 사양이었다.

질색하며 원작을 노려보던 나는 아이네스의 세작이 이아론 후작의 품에 있다는 문장을 떠올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만. 레이디 티에리가 이아론 후작과 이혼한 이유가 뭐지?’

불륜을 즐긴다는 세작이라더니 설마.

“에이. 아니꼬야.”

노엘은 이아론 후작이 느지막이 본 늦둥이 딸이었다.

‘그 사람 나이가 몇인데?’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나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사실을 바로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오랜만이에요, 마님.”

“…….”

“어멋, 제 실수! 이제 레이디 티에리라고 불러 드려야 하겠군요. 후작님은 제가 잘 보살펴 드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쥘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호호 웃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티에리의 얼굴이 답지 않게 굳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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