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69)화 (304/486)

제69화

“에노끄, 검슐 섭 안 가?” (에녹, 검술 수업 안 가?)

“응. 오늘은 안 가.”

“시삐눈?”

“나도.”

실비와 에녹은 내가 아픈 몸으로 오리 세자매에게 시달리는 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는 게 무척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나는 완전히 몸을 회복할 때까지 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들을 올려다보다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니니 이졔 다 나았눈데… 가두 대.”

“싫어. 오늘은 절대 안 나가!”

내 말에 에녹이 떼를 쓰듯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우리가 없는 동안에 리니 네가 아프게 되는 건 싫어!”

“우리가 곁을 지킨다고 해도 네가 아픈 건 싫다. 그러니까 오늘은 푹 쉬어, 레오노라.”

“…우웅. 아라또.”

솔직히 조금 귀찮은데다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울망울망한 형제들의 눈망울에 나는 그들의 고집을 칼같이 자를 수가 없었다.

‘실비는 그렇다 쳐도, 에녹은 바뀐 검술 스승에게 푹 빠져서 하루도 수업을 거르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트리스탄과 사사건건 비교하며 후려치는데다 제대로 검술을 알려 주지도 않던 바리스탄과 달리 에녹의 새로운 스승 무명(無名)은 그에게 검사로서 가져야 할 신념까지 가르치는 참스승이었다.

그런 무명과 완전히 사랑에 빠진 에녹은 전과 달리 검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아효. 어쩔 수 업찌. 구롬 우리 오늘 하루만 쉬까~?”

원래 애들은 놀면서 크는 거니까.

‘실비와 에녹도 요즘 내 특훈 스케줄에 따라 주느라 무리하기도 했고.’

나는 침대에 누운 내 양옆에 꼬물꼬물 파고드는 실비와 에녹을 번갈아 바라보다 동화책 한 권을 협탁에서 집어들었다.

“니니 책 일거 조.”

내가 집어 든 책은 ‘신데렐라’였다.

“내가 읽어 줄게!”

“아니, 내가 읽겠다.”

에녹과 실비는 고풍스러운 푸른 양장 표지의 동화책을 서로 빼앗기 위해 다시금 아웅다웅했다.

“…번갈아 가면서 일그면 대자나.”

내가 눈앞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는 활자를 손으로 붙잡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실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첫 문장을 손으로 짚는다.

“옛날 옛적에 신데렐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소녀가 살았습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엥. 사람 이름을 뭐 그따위로 짓는대?”

작게 투덜거린 에녹이 실비의 뒤를 이어 입을 연다.

“신데렐라는 계모와 못된 의붓 언니 두 명에게 구박을 받게 됐어. 사업하겠다고 집을 나선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서 집안이 완전히 계모 손에 떨어졌거든.”

나는 에녹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삐죽였다.

“압빠가 나뿌네.”

“어? 왜?”

“애 혼쟈 냅두고 혼자 사어븐 무슨 넘의 사업?” (애 혼자 냅두고 혼자 사업은 무슨 놈의 사업?)

계모에게 독박 육아를 시키겠다는 심보 아닌가.

게다가 계모와 의붓 언니들이 사실은 신데렐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집안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가스파르라면 단박에 알았을걸.’

“암튼, 계속 일거 바.”

내 투정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에녹과 실비가 ‘신데렐라’를 읽기 시작한다.

“신데렐라는 요정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무도회에 갈 수 있게 됐대.”

내가 알고 있는 진부한 스토리가 아이들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어지자 눈꺼풀이 조금씩 더 무거워진다.

“……해서 신데렐라는 왕자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내 목 뒤에 실비가 베개를 받쳐 주었다.

나는 점점 몰려오는 수마에 허우적거리다 한쪽 손으로는 에녹을 잡은 채 실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니니는, 시삐랑 에노끄랑 행복하게 살래.”

내가 작게 웅얼거리는 말에 실비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그러자.”

“할머미두.”

“레이디 티에리를 말하는 건가?”

“웅. 니니 할머미, 언마의 언마니까…. 언마 업어져서 슬포해.”

신데렐라를 잃은 계모는 어쩌면 외로웠을지도 몰라.

나는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서성이는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공녀님의 예법 교육을 맡으시겠다고요.”

공작성 내부를 총괄하는 행정관이자 가주의 오른팔인 헨리 마사드는 레이디 티에리의 날카로운 지팡이 끝이 제 목을 향할 때마다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의 예법 선생님이라, 레이디 티에리께서 맡으시기엔 너무 하찮은 직책 아닐런지….”

레이디 티에리는 한미한 자작가이긴 하나 봉토까지 있는 가문의 가주였다.

하지만 티에리는 헨리의 에두른 거절을 알아듣지 못한 양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내가 공사가 다망하긴 하다만, 꼬질꼬질한 망아지 같은 꼴로 공작성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걸 도무지 지켜볼 수가 있어야지.”

“공녀님이 아직 연치가 어리셔서 그렇지 매우 똘똘한 아기님입니다. 황도에서 쓸 만한 가정교사 찾아 붙여 놓으면 금세 예법을-”

“지금 나, 레이디 티에리가 황도에 굴러다니는 가정교사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레이디 티에리는 한때 황실의 너서리 메이드(아이들을 돌보는 시녀)를 총괄했을 만큼 유모들의 세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티에리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미간을 모으자 헨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아뇨, 당연히 아닙니다. 예, 레이디 티에리께서 공녀님의 예법 선생님을 맡아 주신다면 감읍할 따름이지요.”

“흥. 자네, 일처리가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더니 소문만큼은 아니구먼.”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행정실을 빠져나가는 티에리에게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그러니까 날고 기는 황족과 귀족들이 전부 저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어 안달을 냈던 거겠지.’

헨리는 자신도 참석했었던 이아론 후작과 레이디 티에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턱을 쓸었다.

후작과 나이 차가 꽤 나는지라 모두 세기의 사랑이라고 숙덕였지만, 티에리는 이아론 후작을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다.

‘마님의 생모 되시는 분이 레이디 티에리의 오랜 친우이셨다고.’

레이디 티에리가 죽은 친구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후작과 결혼했다는 건 최측근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뭐, 아가씨에게도 좋은 일이지. 저런 훌륭한 선생님이 아가씨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 주신다는 건.’

* * *

개뿔.

전혀 좋은 일 아니었다.

“히잉.”

나는 나를 당장이라도 찌를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티에리의 지팡이를 힐끔하며 울상을 지었다.

‘저 루비 지팡이, 무슨 아티팩트라도 되는 거야? 어떻게 티에리가 호통을 칠 때마다 반짝이는 거지?’

“어허, 울먹이지 말고! 등을 꼿꼿하게 세우래도!”

“세워또요!”

“이게 뭐가 세운 거야! 아직 대나무에 완전히 등이 붙지 않지 않았느냐!”

엉덩이가 빵실빵실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아직 짜리몽땅하기만 한 내 몸을 사방으로 쭉쭉 잡아당기며 꼿꼿하게 펴라고 강요하는 티에리를 노려보며 입술을 삐죽했다.

“니니 안 할래~! 니니 힘드러~!”

“이 녀석이 어리광은-!”

나는 다시금 호통을 치려는 티에리의 다리를 답삭 껴안으며 도리질을 쳤다.

“니니 아직 아가라서 모태, 할머미.”

“하, 할머니?”

“할머미~ 요거 그만하구 니니랑 쪼꼬 먹자~!”

나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양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룰루와 랄라가 준비해 준 다과 테이블을 가리켰다.

‘몇 번의 예절 수업을 진행해 본 결과, 티에리는 할머니 소리에 약해.’

처음에는 기분 나빠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감정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 대하는 건 이제 익숙하다고.’

나는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트리스탄의 얼굴에 어깨를 으쓱했다.

“흥.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지.”

나는 티에리가 초콜릿 쿠키 하나를 내 입에 쏙 집어 넣어 주면서 하는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빡세다, 빡세.

“아효.”

“어린애가 무슨 한숨이냐.”

“니니 요즘 할머미 때메 사눈 게 사눈 게 아냐.”

내 말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이 된 티에리가 내 콧잔등을 꾹 누르며 입을 연다.

“지금은 힘들어도 배워야 한다. 같잖은 놈들이 엄마 없이 자랐다고 손가락질을 하려고 들 때, 네가 얼마나 기품 있는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그것이 약점이 될지 아닐지가 결정될 테니까.”

나는 티에리의 설명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을 한 번 키워 본 경험담이구나.’

하긴, 황가놈들이나 중앙 귀족들은 어떻게든 서로의 약점을 헐뜯기 위해서 안달이었으니까.

“아라또요.”

내 얌전한 대답에 티에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레오노라.”

교육실의 문을 열어젖힌 루카스가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요즘 왜 집무실에 오지 않는 거지.”

나는 그의 뚱한 목소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간 티에리에게 교육을 받느라 공작가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네.’

루카스 혼자 일처리를 하는 게 버거운 모양이었다.

“우웅. 이졔 다 끈나서 가려구 해써요.”

루카스의 말에 의자에서 내려온 내가 걸음을 떼는 순간, 티에리가 나를 달랑 들어올렸다.

“가주, 공녀가 나를 두고 한 말을 들었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치 자랑하듯 나를 앞으로 내세운 티에리가 루카스의 떨떠름한 물음에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이 할미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네.”

그런데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더군.

그녀가 작게 덧붙인 말에 루카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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