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후우움.”
기분이 상한 듯 보이는 트리스탄을 피해 호텔방으로 쏘옥 들어온 나는 원작 책에 달린 외전 부록을 펼쳐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바리스탄 경이 에녹 몰래 트리스탄의 검술 대회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
“설마 조무래기에 불과한 에녹에게 밀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트리스탄.”
바리스탄이 엄한 얼굴로 지쳐 쓰러진 트리스탄을 노려보자, 소년은 떨궜던 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
휙-!
“다시!”
휙-!
종에서 횡으로, 횡에서 종으로 검을 긋기를 수천 번. 소년의 손바닥에서 핏방울 섞인 진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바리스탄은 그를 재촉했다.
“하차니아 따위에게 밀리는 솔로아는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주저앉은 소년의 배를 걷어찬 그의 스승은 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시선을 내비쳤다.
◈
“이거 완죤 미찐넘이었네.”
착- 소리가 나게 외전을 덮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리스탄의 곰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 좋은 척은 혼자 다하더니, 이 정도면 아동 학대 아닌가?’
트리스탄의 훈련은 과거 내가 견뎠던 훈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이긴 했지만, 도무지 청소년이 견딜 만한 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툭하면 에녹을 들먹이면서 사람을 무시하잖아.’
바리스탄은 하차니아 공작가를 무시함과 동시에, 그런 에녹보다도 옅은 오러를 타고난 트리스탄을 깎아내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열등감에 돌아 버린 사람처럼.
‘설마 고고하신 솔로아 공작가의 도련님을 질투라도 하는 걸까.’
뭐, 질투에 미쳐 어린 남자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은 흔해 빠진 클리셰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세계가 단순히 책 속이 아니라는 거지.’
에녹도, 나도 <아.황.장>에서는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생생한 삶을 살아 내고 있지 않는가.
단순히 글 몇 줄로 표현되는 남자 주인공의 시련도, 어린 트리스탄이 견디고 있을 끔찍한 시간이었다.
“아효.”
별수 없지.
에녹과 트리스탄의 검술 스승을 자처한 바리스탄 경은 어차피 자꾸만 에녹의 자존감을 팍팍 후려쳐서 처리해야 할 목록에 있던 사람이었다.
‘바리스탄 경이 적랑을 이끄는 현 단장이긴 하지만, 어차피 솔로아 공작가를 이끌 사람은 트리스탄이야.’
지금 당장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과 미래에 잡을 사람 중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잡을 꼬투리가 있어야 내쫓을 수 있을 텐데….’
바리스탄은 현 솔로아 공작의 오른팔인데다 봉신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단순히 트리스탄을 학대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터.
‘게다가 트리스탄의 아버지는 트리스탄의 학대를 주도하는 사람이니까.’
바리스탄이나 현 솔로아 공작이나, 아동학대에 솔선수범하는 인물인 건 도긴개긴이었다.
◈
“쓸모없는 놈.”
솔로아 공작은 바닥에 엎어진 트리스탄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자카리 하차니아와 실베스테르 하차니아는 네 나이 때 오러소드를 자유자재로 구현했다. 네 무능함으로 가문에 먹칠을 할 셈이냐.”
◈
이런 말을 제 어린 아들에게 서슴없이 하는 인간이 바리스탄의 학대 행위가 밝혀졌다고 해서 그를 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에구구.”
한숨을 푹 내쉬며 쑤셔 오는 허리를 밤톨만 한 주먹으로 콩콩 두드린 나는 원작 책을 꼭 안아 든 채 호텔 방을 나섰다.
‘다행히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은 전형적인 클리셰를 따라가는 로판이었어.’
그러니 남주 괴롭히는 놈은 필연적으로 비열하고 나쁜 놈이었다.
‘바리스탄은 뒤가 구린 짓을 하고 다닐 게 뻔해.’
* * *
‘이럴 줄 알았지.’
마나를 운용해 기척을 숨긴 채 트리스탄과 바리스탄을 따라나선 나는, 바리스탄이 트리스탄, 그러니까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을 데리고 들어가는 곳을 확인하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락가?!’
아니, 아무리 아르델이 유흥의 도시라지만 저 미친놈이?
“썬 씨게 넘네.” (선 세게 넘네.)
쫑쫑.
룰루랄라와 숨바꼭질할 때나 쓰던 투명 망토를 둘러쓴 나는 바리스탄이 열어젖힌 문이 닫힐세라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트리스탄, 너도 이제 이런 데 발을 들일 때가 됐지.”
외전에서 묘사되던 때와 달리 걸쭉하게 취한 듯한 바리스탄은 껄껄 웃으며 트리스탄을 붉은 조명이 내리쬐는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르델에 방문한 귀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와 봐야 하는 곳이라고.”
웃기고 있네.
아빠가 나를 위해 준비해 준 아르델 관광 가이드에는 이렇게 화려한 카지노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바리스탄 경, 오랜만입니다! 잠깐, 이분은?”
“무려 솔로아 공작가의 직계 도련님이네. 내가 아주 귀한 도련님을 모시고 왔으니 다들 알아서 대접하라고.”
“아이고, 솔로아 공작가의 도련님이셨군요. 오늘 바리스탄 경께서 지갑을 여는 일은 없으셔야겠습니다!”
고작 트리스탄의 이름을 팔아 술값을 굳히기 위해 저 어린애를 도박장에 데려왔단 말인가.
‘덕분에 나도 생전 못 보던-딱히 보고 싶지 않은- 구경하게 생겼잖아.’
“도박과 여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 어서 판을 준비해.”
바리스탄이 털썩 앉은 벨벳 소파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신발의 개수를 속으로만 헤아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혼쯀 낼 넘이 솃.” (혼쭐 낼 놈이 셋.)
바리스탄, 도박장의 지배인처럼 보이는 남자, 그리고 지배인의 호위처럼 보이는 덩치 한 명.
지배인은 바리스탄의 말에 고개를 까딱이며 방문을 열며 작은 종을 흔들었다.
그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온 시종이 술과 함께 무희를 방 안으로 들인다.
“자, 일단 위스키를 한 병 대령합죠.”
“안녕하세요, 셀리아입니다.”
나는 발목에 차그랑차그랑 소리가 나는 수갑 비슷한 장식품을 찬 여자를 힐끗했다.
‘발목 뒤에 낙인이 찍혔네.’
그건 저 여자가 노예라는 뜻이었다.
‘일단 꼬투리 한 개 확보 완료.’
그리고 윌레닌 제국에서 노예의 존재는 불법이었고.
노예 제도가 불법으로 지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암암리에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긴 했지만, 고위 귀족이 대놓고 노예를 부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솔로아 공작가에서는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이겠지.’
나는 실실 웃으며 여자 노예의 어깨를 더듬는 바리스탄의 모습에 헛구역질을 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어서 녹화해야지.’
하차니아 공작가의 수석 대장장이 제랄드는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였다.
룰루를 통해 군모를 주문 제작할 때 나는 통신용 마도구에 녹화 기능을 추가해 달라 부탁했었다.
‘마도구 제작 단가는 무척 비싸지만, 가스파르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으니까.’
아니, 그 누구에게도 돈을 아끼지 않는 호구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건가.
나는 그가 이아론 후작가의 손해를 몽땅 떠안은 사실을 떠올리며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스레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이제 술과 여자를 준비했으니 사업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요.”
지배인의 은밀한 속삭임에 바리스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지. 솔로아 공작가를 대리해 내가 이번에 미네 상단에 납품할 수 있는 오러석은 무려 서른아홉 개네.”
무희를 물건처럼 만지작거리던 바리스탄은 미리 준비해 둔 상자를 꺼내 지배인 앞에 펼쳐 들었다.
등급 높은 루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붉은 오러석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지배인이 바리스탄 옆에 인형처럼 앉아 있는 트리스탄을 힐끔한다.
“그런데 공자님이 계신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 겁니까?”
“아, 걱정 말게나. 어리지만 워낙 꽉 막힌 녀석이라 데려오기 전에 최면을 걸어 놨네.”
어쩐지!
아무리 바리스탄이 강압하는 상황이라지만, 트리스탄이 너무 얌전했다.
“잠깐만요, 바리스탄 경. 준비해 오신 오러석은 서른다섯 개뿐인 것 같은데요.”
“내가 괜히 이 녀석을 데려온 게 아니라고. 오러석 네 개는 이 자리에서 추출할 기회를 주겠네.”
“설마 공자님의 오러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선한 오러를 뽑아낼 기회니 값은 열 배는 더 쳐주겠지.”
“당연히 그래야죠! 무려 솔로아 직계의 오러인데, 스무 배로 값을 매기겠습니다!”
바리스탄의 경악스러운 발언에 지배인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기구를 꺼내 들었다.
‘설마 저게 오러 추출기인가?’
오러나 마나를 사람 몸에서 추출해 만드는 오러석은 마도구를 만들 수 있었기에 쓰임새가 꽤 다양했다.
‘그래서 돈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울나이츠의 몸에서 오러를 뽑아내면 그만큼 수명이 줄어들 텐데?’
“제 손으로 5대 귀족의 오러를 추출할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영광입니다, 바리스탄 경.”
“후후. 이번 건으로 저번에 내가 진 도박 빚은 전부 탕감할 수 있겠구먼.”
‘……어쩔 수 없지.’
힘을-마도구를- 숨긴 아기님인 내가 움직일 수밖에.
나는 넋을 놓은 트리스탄의 이마에 이상한 깔대기를 붙이는 지배인과 시종이 가져다준 금괴의 개수를 세며 실실 웃는 바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보다 몸을 움직였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