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룰루와 랄라의 대화로 추측한 바로 공작가의 사정은 대강 이랬다.
노엘의 함선이 실은 물자 대부분은 노엘의 친정인 이아론 후작이 운영하는 상단과 거래할 물품이었고, 딸을 잃은 후작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까지 안기고 싶지 않았던 가스파르가 상단의 손실을 전부 메꿨단다.
‘그래서 명색이 5대 귀족에 속하는 명문가인데도 그렇게 재정이 하찮았던 거였어!’
가스파르는 물려받은 공작가의 재산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모자란 치는 아니었지만, 불릴 만큼 물욕이 있는 가주도 아니었던지라 지금 하차니아의 곳간은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와중에 황제가 예전에 하사했던 영지와 보물을 돌려받겠다고 나섰으니….’
떼잉, 쯧.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음 혀까지 차며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압빠. 황졔가 정말 돈 달라구 해써요?”
“네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어서.”
“말 돌리지 말구요.”
“그래. 하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아빠의 단정한 목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다.
“우끼고 인네. 압빠 돈 업스면서요.”
“…….”
내 날카로운 말에 가스파르가 날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나는 아빠를 위로하는 대신 조그마한 머리를 굴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압빠. 나 쪼꼬레.” (아빠. 나 초콜렛.)
당 떨어지면 머리 안 돌아간다.
내 말에 가스파르는 반질반질한 비닐에 감싸인 봉봉 하나를 까 입에 넣어 주었다.
‘일단 황제가 돌려달라는 땅과 재산은 절대 빼앗길 수 없어.’
물론 유서 깊은 공작가가 단순한 황제의 심술로 하루아침에 폭삭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상태로는 절대 독립을 노릴 수 없단 말이야!’
하차니아는 반드시 부유해야만 했다.
‘힘이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지, 어?’
“압빠. 니니가….”
“안 돼.”
“녜?”
“폐하께서 아무리 완강하게 나오셔도, 나는 절대로 널 황궁에 보내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널 보내고 재산을 지키라는 말은 하지 말아 다오.”
나는 답지 않게 내 말까지 끊어가며 단호하게 말하는 가스파르의 굳은 얼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니 항궁 안 갈꼰데요.” (리니 황궁 안 갈껀데요.)
“뭐?”
“미쳐따구 압빠 노코 가까 봐요?” (미쳤다고 아빠 놓고 갈까 봐요?)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절대 못 간다.
나 없으면 공작가가 얼마나 하찮게 굴러갈지 너무 뻔했으니까.
‘루카스는 툭하면 튀어나와 공작가를 어지럽게 할 테고, 에녹은 트리스탄 발닦개 노릇이나 하겠지.’
그리고 가스파르는 공작가의 남은 재산을 전부 퍼 날라 이아론 후작가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급급할 것이다.
‘그나마 믿을 만한 건 실비나 자카리인데….’
얼굴 한 번 못 본 자카리는 모르겠지만, 실베스테르는 내가 보기엔 망해가는 공작가를 일으킬 만큼 독한 애는 아니었다.
“아효…. 내가 지짜루 늘는다.” (에휴…. 내가 진짜로 늙는다.)
나는 허리를 콩콩 알밤 같은 주먹으로 때려 가며 내 눈치를 보는 아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니니 아르델 놀러 가구 시퍼요.”
“…아르델을? 갑자기?”
“우웅. 황졔한테 돈 다 빼끼면, 우리 가난해. 못 놀러 다녀요.”
내 풀죽은 말에 가스파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짐을 꾸리라 일러 놓으마.”
유흥과 향락의 도시, 아르델.
사시사철 생화 대신 금화가 꽃 피운다는 아르델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은 당연히 돈이 넘치도록 많았다.
‘그리고 그의 고명딸은 지금 매우 아픈 상태지.’
나는 아르델 백작 영애가 왜 아픈지, 어떻게 치료하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아, 생각해 보니까 아이네스가 회귀자였지.’
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스는 나보다 더 어려서 황궁에 꼼짝 못 하고 박혀 있으니까.’
“움후후.”
나는 조그마한 양 주먹을 모아 입을 가린 채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원작 여주 미안~! 언니가 선수 좀 칠게~’
* * *
‘쟤는 이 자리에 또 왜 낀 거야?’
룰루의 무릎 위에 달랑 안은 나는 맞은편에 앉은 트리스탄의 뚱한 얼굴을 마주보며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트리스탄 소공작님께서도 아르델에 볼일이 있으시대요, 아가씨. 같이 가시면 말동무도 하고 좋겠죠?”
내 마음을 귀신같이 읽은 룰루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준다. 나는 룰루의 설명에도 입을 열지 않는 트리스탄을 노려보다 미간을 좁혔다.
‘외전을 하도 들여다봤더니, 이제 저 얼굴만 봐도 속마음이 읽히는 것 같네.’
분명 귀여워, 귀여워라는 염불만 주야장천 외고 있겠지.
나는 허공 위에 팔랑이는 내 작은 발을 빤히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는’ 트리스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트리쯔딴.”
“왜.”
“왜 니니 마차에 타떠요?”
“…솔로아 공작가의 마차에 인원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누가 보면 공작가에 마차가 딸랑 하나 있는 줄 알겠네.
나는 트리스탄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기가 막혔지만, 애써 헛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글쿠나. 쏘로아두 가난한가 부네…. 하짜니아두 그런데.” (그렇구나. 솔로아도 가난한가 보네…. 하차니아도 그런데.)
“어머, 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하차니아도 결코 가난한 건 아니랍니다.”
요즘 내가 돈돈하며 돈 걱정하는 걸 봤는지 룰루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둥기둥기 어르기 시작한다.
“아가씨 드실 간식 같은 건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부(富)는 그 정도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룰루의 말에 반항하듯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폐하께서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셨다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나와 룰루의 대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트리스탄이 작게 중얼거린다.
“그렇군. 돈을 좋아하는군.”
나는 트리스탄이 들릴락 말락 작게 말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쌩쌩 달리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에게서 재산을 지키려면, 5대 귀족이 힘을 모아야 해.’
대귀족. 윌레닌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귀족들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가문은 총 다섯 개였다.
하차니아 공작가, 트리스탄의 솔로아 공작가, 브리넨 후작가, 발탄 자작가,
그리고 내가 지금 향하는 아르델과 제국 남부를 통치하는 아르델 백작가.
그레고르는 황권을 강화시킨 전형적인 황제파의 인물이었다.
폭력과 억압으로 귀족들을 찍어 누르니 지금 당장은 그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다들 품고 있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현 상태로는 아르델 백작이 가장 불만이 크겠지.’
불만 정도가 아니라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었다.
‘딸이 앓고 있는 유전병 치료제의 레시피를 황실이 알고 있는데도 일부러 알려 주고 있지 않으니까.’
아르델 백작 영애의 병은 타고난 마나가 불안정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대신 공격을 하게 되는 병으로, ‘마나 안정제’의 꾸준한 복용으로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아르델 백작을 압박할 카드로 이용할 심산이겠지.’
아르델 백작가는 5대 귀족에 속한 유서 깊은 명문가인데다 무역이 활발한 아르델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그의 권세를 경계하는 황제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애가 아픈데 부러 도와주지 않는 건 너무 치사했다.
“마차 속도가 느려지고 있어요. 다 왔나 봐요, 아가씨.”
룰루의 속삭임에 나는 멍 때리느라 살펴보지도 못했던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뺨을 스치고 떠나간다.
“우와아.”
나는 항구 도시다운 활발함을 품은 아르델의 전경에 트리스탄의 존재도 잊고 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새빨간 벽돌 건물이 눈에 띄는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수로를 통해 코가 뾰족한 작은 조각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다와 이어진 듯 보이는 푸른 강줄기에 맺힌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사람도 정말 많고.
아르델이 괜히 제2의 수도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한적한 하차니아의 영지를 떠올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에 턱을 벌렸다.
킁킁.
‘돈 냄새 나….’
나는 향긋한 금화 향기에 황홀해져 두 손을 맞잡았다.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이는 법이다.
“바다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
해롱해롱한 나를 힐긋한 트리스탄이 곧 내게 손수건 하나를 들이민다.
“코를 막으면 좀 나을 거다.”
아니, 돈 냄새 맡고 있던 건데.
나는 트리스탄의 손수건을 떨떠름히 받아들며 아르델 땅에 발을 내밀었다.
“리니, 이제 도착한 거야?”
먼저 출발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에녹이 룰루의 품에서 나를 받아들며 환히 웃는다.
“그건 뭐야?”
“트리쯔딴이 줫서.”
“나도 손수건 있어. 이건 버리자.”
“웅?”
어리둥절한 내 손에서 트리스탄의 손수건을 빼앗아 든 에녹이 웃는 얼굴 그대로 트리스탄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보통 여동생의 기사는 오빠가 하는 법이지.”
나는 에녹이 트리스탄의 손수건을 바닥에 떨구고 나서야 기사가 건네는 손수건의 의미를 깨달았다.
“뭔데 나대.”
우리 다정한 막내가, 특훈이 너무 힘들었는지 성질이 많이 더러워졌다는 사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