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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2)화 (247/486)

제12화

두동강 난 원탁을 바라보는 가신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그렇게나 끔찍하셨던 건가.’

좀 무뚝뚝하긴 했어도 점잖은 축에 속했던 가스파르의 과한 반응에 여태 레오노라를 황실로 보내야 한다 주장했던 원로들조차 끄응,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빠 구하겠다고 저 작은 몸으로 검 앞에까지 뛰어든 아가씨이신데.”

누군가가 총대를 메듯 말문을 열자,

“아무리 자진을 시도할 정도로 마님의 외도에 충격을 받으셨다 해도, 어린 아가씨 앞에서 저런 반응은 좀….”

“그러게나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가씨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요.”

뒤따라 나온 목소리는 하나같이 매정한 공작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오노라를 황실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던 회의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판세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눈치챈 레오노라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루카스를 힐끔 쳐다보며 둥근 뺨을 부풀렸다.

“끅.”

사과같이 발그스레한 뺨 위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린다.

가는 실가닥같은 백금발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나붓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히잉. 아바아-”

늘 명랑한 얼굴로 아장아장 공작저를 누비는 레오노라의 밝은 모습만 기억하던 원로들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행동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가씨 우시는데요.”

“저렇게나 각하를 좋아하는데 슬프실 만도 하죠. 오늘 회의는 이만 합시다.”

원로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너진 원탁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폐하께서-!”

황궁 행정관이 당황한 얼굴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원로들을 말려 보았지만, 노에베 백작이 엄한 얼굴로 일갈했다.

“어허! 아직 어리신 공녀님이 얼마나 무리하기를 바라는 건가.”

“백작님!”

“오늘은 이만 물러가게. 폐하께는 공작가에서 따로 서신을 보낼 테니. 그렇지 않은가, 헨리?”

백작의 말에 여태 그와 언쟁을 높이던 헨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희가 직접 서신을 보낼 테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레오노라의 눈물 한 방울로 공작가의 원로들과 가신들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 * *

‘저 영감탱은 애들 눈물에 약하구먼.’

나는 꽤 사연이 깊어 보이는 노에베 백작의 근심 어린 얼굴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힐끗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졔 구만 정신 차리지?” (이제 그만 정신 차리지?)

헨리까지 전부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나는 잔뜩 얼어붙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뽀뽀 몇 번 했다고 언제까지 얼어있을 셈일까.

‘결벽증 환자라도 되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허벅지를 콕콕 찌르자 얼음 인형 같던 그의 몸이 움찔한다.

“리니.”

“웅? 애?” (응? 왜?)

나는 루카스의 부름에 무심코 대답하다 입을 다물었다.

“……?”

뽀뽀 몇 번 했다고 소름이 돋는다는 듯 원탁까지 부숴 버린 루카스가 나를 ‘리니’따위의 애칭으로 부를 리 없었으니까.

“압빠!!!”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다감한 검붉은 눈동자에 벌떡 일어나 그의 목을 껴안았다.

“아빠아…….”

방금 흘렸던 거짓 눈물이 아니라 진짜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루카스 윌레닌이 내 몸속에 들어오다니.”

루카스 윌레닌이 가스파르의 몸을 차지한 지 벌써 4년이나 됐지만, 그가 ‘루카스’의 존재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가스파르는 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사라진 황태자가 죽지 않았던 건가.”

“허엉.”

그러나 루카스 윌레닌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압빠아-!”

나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겨워 퐁퐁 샘솟는 눈물을 훌쩍이며 삼켰다.

“뚝. 울지 말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내 콧물을 소매 끝으로 닦은 가스파르가 나를 가볍게 안아 든 다음 등을 토닥인다.

“내가 너무 늦게 정신을 차려 너를 힘들게 했구나.”

나는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서러움을 토해 냈다.

루카스에게 마나를 빼앗긴 상황에 잔뜩 긴장한 채 사고를 유지했더니,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뚜욱. 착하지.”

그러나 가스파르는 ‘진짜 어린애’ 같았던 나도 사랑해 준 사람이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엉엉 우는 나를 안아 들고 둥기둥기 어르기 시작했다.

“이리 울면 나중에 머리가 아프게 된다.”

“흐엉… 아바, 나 징짜 항궁 보내 꼬에요?” (아빠, 나 진짜 황궁 보낼 거예요?)”

나는 그의 만류에도 고개를 붕붕 저으며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니니 아바 딸 아니라소?” (리니 아빠 딸 아니라서?)

루카스의 설명을 듣고 나니 작금의 상황이 더 억울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정말 바람을 핀 것도 아니잖아!’

저주로 인해 탄생한 사생아가 무슨 사생아라고.

“버리 꼬에요?” (버릴 거예요?)

“헛소리.”

가스파르는 내 물음에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끌어안았다.

“누가 뭐라 해도 넌 내 딸이다. 아무데도 못 보내.”

“…….”

“신이 네가 내 딸이 아니라고 벼락을 친대도 보내지 않을 거다.”

나는 아빠의 다정한 말에 눈물을 꾹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녜.”

“부모 자식 사이는 핏줄로만 맺어지는 게 아니다.”

눈물을 쏟아 내느라 여린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볼썽사나울 텐데도 가스파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엽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으며 내 볼 살을 꾹 눌렀다.

“설사 리니 네가 정말로 나와 혈연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버리지 않을 테고, 아이는 그런 걱정을 하며 자라서는 안 돼.”

“녜.”

제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가스파르는 나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뒤적였다.

그가 서랍에서 꺼낸 봉투는 뜯은 흔적조차 없이 말끔하게 밀봉된 것이었다.

“이게 신전에서 보내 온 서신이다. 누가 ‘황실의 사생아’인지 적혀 있다고 하더구나.”

나는 여신 루엘라를 섬기는 루엘라드교를 뜻하는 열두 개의 십자가가 겹쳐진 문양을 밉살맞게 내려다보았다.

‘망할 놈의 신전 같으니. 왜 그딴 쓸데없는 신탁을 내려서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거야!’

루엘라는 가정의 평화를 수호하는 온후한 신이 아니었던가.

나는 하릴없이 평화로워 보이던 그녀의 조각상을 떠올리며 조그마한 미간을 모았다.

그런 내 미간의 주름을 길쭉한 손끝으로 꾹 눌러 핀 가스파르가 말을 잇는다.

“나는 뜯어볼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뜯지 않을 테고.”

“애요?” (왜요?)

“네 명 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스파르의 대답은 언뜻 다짐 비슷하게 들리기도 했다.

“너희 중 하나라도 황궁에 보내느니 폐하께 반기를 들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겠다.”

‘제 핏줄이 아니어도 품겠다는 말이구나.’

나는 마음이 약하다 못해 순두부 수준인 가스파르의 다정다감한 인성에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도, 눈물을 찔끔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주먹이 운다.

‘당신이 이러니까 가문 못 지키고 망하는 거 아니야~!’

황제가 황실의 사생아가 공작가에서 태어났으니 보내 달라고 하면 넙죽 엎드려 보내야지.

말도 제대로 안 듣는 데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방법도 모르니 폭군의 화를 돋우고 멸문이나 당하는 거 아닌가.

‘원작에서도 레오노라 못 보내겠다고 뻐팅긴 거 아닐까.’

그러다 찬찬히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루카스 때문에 책 확인을 제대로 못 했어.’

나는 다시 한 번 원작을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를 아직도 둥기둥기 어르고 있는 가스파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압빠. 니니 별째로 도라갈래요.” (아빠, 리니 별채 돌아갈래요.)

“…그래. 내가 너를 별채로 보냈었지.”

내 말에 가스파르의 눈빛이 흐려진다.

그는 내가 상처받았을까 염려된다는 듯 보기 좋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늦게 설명하는 것이겠지만, 폐하에게서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별채는 결계로 감출 수도 있는데다 실비나 에녹과 달리 넌 제 몸을 지킬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으니까.”

“우웅. 아랏서요.” (응. 알았어요.)

이제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더니 가스파르는 내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말이다. 아빠를 믿어다오, 리니.”

“우웅. 아랏다니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손끝을 맞부딪히는 가스파르를 힐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본관으로 옮겨 주랴.”

“웅?”

“그래. 옮기는 게 낫겠다. 아무래도 나와 가까운 곳에 널 두는 게-”

“앙대!”

나는 가스파르의 중얼거림에 질색하며 팔을 붕붕방방 내저었다.

‘별채에 원작 책이 있단 말이야!’

가스파르가 쳐 뒀다는 결계 덕분인지, 별채 안에서는 작은 몸으로도 마나를 운용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책을 마나로 숨길 수 있었던 건데, 본관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별채의 천장에서 원작 책이 뚝 떨어졌으니, 다른 좋은 아이템이 떨어질지 또 어찌 알아.

“니니 압빠랑 떠러지고 시퍼요!” (리니 아빠랑 떨어지고 싶어요!)

“……뭐?”

“먼니먼니! 아쥬 먼니!!” (멀리멀리! 아주 멀리!!)

내가 아득바득 목소리를 높일수록 가스파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지만, 잔뜩 흥분한 나는 영문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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