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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1)화 (246/486)

제11화

타고난 마나는 있었어도 신기는 없는 모양인지, 내 퇴치 주문에도 루카스의 뚱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에효…. 소욘 업네.” (에휴…. 소용 없네.)

“내가 공작의 몸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네가 처음이다. 레이디 이아론을 빼면.”

“례디 이아논?” (레이디 이아론?)

“이름이 노엘이던가.”

아, 우리 엄마 말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루카스가 이 꼴이 된 지도 최소 4년은 지났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다른데 그동안 다들 왜 못 알아본 거지.’

아무리 가스파르의 얼굴이라고 한들 느낌부터가 완전히 달랐는데.

나는 눈썹을 사납게 추켜세운 루카스를 향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로니까, 너눈 그레고르 황제가 실켄네.” (그러니까, 너는 그레고르 황제가 싫겠네.)

“싫은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 새끼의 내장을 전부 꺼내 씹어 먹고 싶을 정도거든.”

“애기 아페서 참 조은 말 한다.” (애기 앞에서 참 좋은 말 한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도로록 머리를 굴렸다.

루카스 윌레닌은 황제 그레고르의 원수였다.

‘그레고르는 언젠가 공작가를 멸문시킬 인간인데다 원작 여주인 아이네스의 팔불출 아빠였지.’

게다가 아이네스는, 내 마나통에 빨대 꽂을 생각뿐인 맹랑한 애기였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나는 오랜 격언을 떠올리며 루카스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로타면 나랑 손잡지 아늘래? 우리 가치 그레고르를 무찌르쟈.” (그렇다면 나랑 손잡지 않을래? 우리 같이 그레고르를 무찌르자.)

내 첫 번째 목표는 황실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황궁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하차니아 공작가의 멸문을 막는 것이었다.

‘루카스 윌레닌이라는 남자는 잘만 하면 쓸 만한 패가 되겠어.’

어떻게 보면 가문을 지키는 데 마음 약한 가주인 가스파르보다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흐음.”

내 제안에 남자가 고민하듯 작은 신음을 흘린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빠르게 사족을 덧붙였다.

“이미 느끼고 잇게찌만, 니니는 평범한 애기가 아냐.”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리니는 평범한 아기가 아니야.)

“어느 부분에서 평범하지 않다는 거지?”

“니니 또또캐.” (리니 똑똑해.)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데다 빙의까지 했다는 걸 알려줄 필요까진 없겠지.’

나는 내가 조금 똘똘한 편임을 강조하며 남자 앞에 불쑥 내민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

갓 떨어진 애기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을 잠시 바라보던 루카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손을 잡도록 하지.”

“너가 언래 몸을 되찾을 때까지, 글구 하차냐가 동닙할 때까지?” (네가 원래 몸을 되찾을 때까지, 그리고 하차니아가 독립할 때까지?)

“독립?”

“웅.”

나는 남자의 기가 찬 듯한 물음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트라 악역 신세를 벗어나려면 아무래도 공국 정도는 세워줘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나는 그 누구도 나나 아빠를 건들 수 없는 치외법권령을 꿈꿨다.

“지금 황제가 될 이 몸 앞에서 공국의 건립 따위를 논하는 건가. 건방지기 짝이 없군.”

루카스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나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웅. 그치만 이미 늦엇서.”

“…뭐?”

“방굼 니니랑 계약햇서, 너.” (방금 리니랑 계약했어, 너.)

내 말에 그제야 내 손과 맞닿은 자신의 손등에 푸른 오망성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카스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마법사의 맹약인 건가?! 어린애 주제에 어떻게 이런 흑마법을 아는 거지!”

움후후.

나는 하얗게 질린 루카스의 얼굴을 마주하며 보란 듯이 웃어 주었다.

“니니, 또또카다구 해짜나.” (리니, 똑똑하다고 했잖아.)

이제 그가 나를 배신하면 그의 마나는 전부 내게 흡수된다.

나는 꼬마 악마처럼 웃으며 깡총깡총 방을 벗어났다.

* * *

꼬박 하루가 지나 정례 회의 날이 밝았는데도 가스파르의 정신은 되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가 가스파르의 영혼이 육체 속에 곤히 있다고 말해줬지만, 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훔.”

설마 영영 못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되면 저 자식을 두드려 패서라도 쫓아내야지.’

나는 가스파르인 양 가주의 자리에 자연스레 앉아 있는 루카스를 노려보다 원로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제국의 영광된 그림자를 뵙습니다.”

“각설하고 자리에나 앉지.”

노에베 백작을 위시한 가신들의 인사에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는 그들의 허례허식을 일축하며 팔을 내저었다.

“예, 각하.”

“오늘 안건은.”

“저, 공녀님의 처분에 대해 황제 폐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원탁의 끄트머리에 보일 듯 말 듯 앉은 나를 힐끗한 노에베 백작이 망설이며 말을 잇는다.

“신탁대로라면 공녀님이 사라진 루카스 윌레닌 전하의 딸이라는 뜻인데, 신력으로는 부친 없이 확인이 불가하니 루카스 전하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 황궁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건 어린 공녀님을 황궁에 유폐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어불성설이라는 양 가스파르의 부관인 헨리가 기겁하며 앞으로 나선다.

“신탁의 진위도 불분명한데다 ‘황실의 피가 흐르는’ 공작가의 일원이 정말 공녀님인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는 거대한 원탁에 가려져 정수리만 빼꼼 보이는 나를 제 몸으로 완전히 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탕 먹인 값을 하는구먼.’

헨리는 가스파르-그러니까 지금은 루카스-가 황제의 뜻에 따라 나를 황궁으로 보내버릴까 봐 퍽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헨리 당신은 공자님들을 의심하는 것이오?”

“공자님들을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공작가의 원로회에서 제법 입김이 센 노에베 백작이 언성을 높인다.

“아가씨가 있는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공자님들은 누구 한 명 빼먹을 것 없이 전부 가주님을 빼닮지 않으셨소?”

‘백작의 말도 일리는 있지.’

나는 눈곱만큼도 가스파르를 닮은 구석이 없었다.

나와 그나마 머리색이 비슷한 실비조차도 아빠의 뚜렷한 색채만은 물려받았는데 내 연보라색 눈은 햇볕에 부서질 것처럼 흐렸으니까.

“진정으로 각하를 위한다면 아가씨를 공작가에서 내보내는 게 맞소.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쓰리실지.”

쯧쯧, 혀까지 차며 나를 노려보는 노에베 백작의 눈초리에 나는 손가락만 옴질거리다 어깨를 으쓱했다.

‘백작은 가스파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 했지.’

제 자식인 줄 알고 애지중지 키웠던 후계자가 알고 보니 제 조카였다던가.

하지만 백작이 암만 열심히 주장해 봤자 가스파르의 몸에 들어온 루카스는 나를 절대로 황궁에 보내지 않을 거다.

‘나와 마법사의 맹약을 맺은 데다, 내가 황제와 마주치면 자신이 지금 무슨 꼴에 처했는지 전부 일러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너나 할 것 없이 언성을 높이는 가신들에게는 영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턱을 괸 루카스를 힐끔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흠. 공작가 내에 상황이 이러하다면 각하의 의견 없이도 공녀님을 황궁으로 데려가야겠습니다.”

황궁에서 나온 행정관이 이런 뚱딴지같은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조금 방심한 상태였다.

‘엥?’

보호자 허락도 없이 애를 어디로 데려간다는 건가.

나는 앞이 보이지 않게 나를 막고선 헨리의 등을 양팔로 치워내며 행정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녀님이 더는 공작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신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황실의 일원일 수도 있는 공녀님이 이런 비참한 대우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거짓말.

제 딸도 외면하는 폭군 그레고르가 제 조카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아이의 안위를 챙길 리 없었다.

‘분명 속셈이 있는 거야.’

아이네스처럼 내 마나를 노리는 것이거나, 나를 이용해 루카스를 노리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가주님께서 힘든 결정을 내리실 필요 없습니다. 공녀님은 황실에서 모셔가는 것으로,”

“누구 마음대로.”

멋대로 주절주절 떠드는 행정관의 말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운데도 힘이 있었다.

“나는 공녀를 황실에 보낼 생각이 없다.”

루카스의 단호한 거절에 행정관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외람되지만 황실에서 알아본 바로는 각하께서 공녀님과 사이가 퍽 좋지 못하시다 들었습니다.”

“좋아.”

“신탁이 내려온 이후로는 공녀님과 데면데면하신다고-”

“좋다고.”

행정관의 말을 엿가락 자르듯 툭툭 자르며 루카스가 내게 팔을 뻗는다.

‘사이좋은 척하라는 거구나.’

가스파르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꾹 누르며 그에게 도도도 달려가 무르팍에 뛰어들었다.

“아반니.” (아버님.)

“……그래.”

저가 오라고 해 놓고 막상 내가 가까이 다가오니 떨떠름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불편해하면 어떡해!’

행정관이 우리가 안 친하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일그러진 루카스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쪽.

“…….”

쪽쪽.

“…….”

“아반니, 조아!”

쾅!

쩌저적- 쾅!

루카스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탁을 쪼개지만 않았어도 완벽한 연극이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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