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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화 (243/486)

제8화

 

 

 

루카스 윌레닌은 희붐한 달빛이 침실을 비추는 아름다운 밤에 제 자아를 자각했다.

“…가스파르?”

눈을 뜬 그의 아래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누워 있었다.

황위 계승식을 겨우 하루 앞두고 있었던 황태자이자 귀족파와 손을 잡은 황족인 루카스 윌레닌이 그 여자를 모를 리 없었다.

노엘 이아론.

‘이아론 후작의 장녀였던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만 한 미인은 흔치 않았으니 헷갈릴 일은 없었다.

“헉.”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었다.

‘이 여자가 왜 내 침실에 있는 거지?’

루카스는 희디흰 살결을 자랑하는 노엘의 나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당황을 금치 못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미인계를 쓰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 기억은 없었다.

‘약이라도 쓴 거겠지.’

루카스 윌레닌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는 노엘의 목소리에 루카스는 숨을 헉 들이마시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단, 옷부터 입지.”

“…지금?”

“그래. 지금.”

이아론 후작은 그의 이복동생인 그레고르 윌레닌을 차기 황제로 미는 황제파 귀족 중 한 명이었다.

‘내 황위가 확정되었으니, 제 딸을 이용해 줄을 바꿔 잡으려는 건가.’

“내게 무슨 수를 써서 의식을 잃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내가 당신과 몸을 섞었다 해도 당신이 낳은 아이를 내 자식으로 인정해 줄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아 뒀으면 좋겠군.”

루카스는 성급하게 판단하며 주섬주섬 잠옷을 챙겨 입는 노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뚱한 얼굴을 빤히 주시하며 그녀가 천천히 다가온다.

퍽!

“억!”

노엘은 무정한 남편처럼 보이는 가스파르, 그러니까 루카스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메다꽂았다.

“너, 누구야. 내 남편 아니지.”

‘…그때와 다름없군.’

레오노라의 앙증맞은 두 손에 머리채를 쥐어 잡힌 채로, 루카스는 생각했다.

‘그 어미에 그 딸이야. 아주 지랄 맞아.’

“이거 놓지 못해!”

루카스는 제 목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레오노라를 기겁하며 떼어 냈다.

바닥에 쾅 엎어진 아이가 다쳤을까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레오노라는 울기는커녕 콧김까지 뿜어 가며 씩씩대기 시작했다.

“너 누구냐구! 너 울 압빠 아니자나!”

레오노라는 맹랑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루카스를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통통,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다리가 아프지는 않았으나 루카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이의 말이 그르지 않았으니까.

‘루카스 윌레닌’, 그러니까 자신은 가스파르의 몸을 잠시 빌리고 있을 뿐, 가스파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가스파르와 루카스는 평소 무뚝뚝한 성정과 어투까지 비슷해 자식인 레오노라보다 너덧 살은 많은 공자들조차 루카스가 가스파르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신탁을 생각하면 이 아이는 가스파르의 자식조차 아닐 텐데.’

제 친부도 아닌 가스파르의 변화에 어떻게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내가 네 아빠가 맞기는 할 거다.”

루카스 윌레닌이 가스파르의 몸에 ‘빙의’된 것은 노엘이 레오노라를 가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육체는 분명 가스파르였으나 계승되는 영혼의 마나는 대마법사 루카스 윌레닌의 것이었다.

‘그렇게 치욕스러운 황실의 사생아 따위가 탄생하게 된 거지.’

마나의 흐름에 기민한 신전은 루카스 윌레닌의 마나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채고 그의 사생아를 찾아 공표했다.

황위 계승식 직전, 갑작스럽게 사라진 황태자의 귀하디귀한 마나를 이어받은 아기가 태어났으니까.

그런 그의 사생아를 찾아 헤매던 신전은 하차니아 공작가에 황실의 피가 섞인 아이가 태어났다는 신탁을 받고 막내 공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머?”

자신이 제 딸이라는 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레오노라를 향해 루카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을 움직였다.

“네가 ‘레오노라’라는 계집아이라면, 넌 내 딸이 맞다고.”

몸은 모르겠지만 레오노라의 영혼에 담긴 마나에서 루카스 본인의 냄새가 났으니까.

“그러니 그만 매달리고 꺼져.”

하지만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아니, 여자와 몸을 섞은 기억조차 없는 자신에게 자식이 생겼든 말든 관심 없었다.

‘시간이 없어.’

루카스 윌레닌은 자신의 육체를 하루라도 더 빨리 되찾고 싶었다.

자신이 빙의한 몸의 주인이 가스파르 하차니아라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루카스 윌레닌’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유의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이 빌어먹을 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게 문제다.’

달에 단 한 번, 초승달이 뜨는 순간에만 루카스의 자아가 가스파르의 육체를 장악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초반 1년은 공작가에 적응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기 바빴다.

‘사람들의 의심을 너무 사게 되면 공작이 제 몸의 이상함을 눈치챌 테고, 그렇게 되면 그가 내 영혼을 잡아 꺼낼 방법을 강구해 내겠지.’

황제파의 귀족인 공작과 귀족파와 손을 잡은 루카스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 가스파르가 친히 제 육체를 루카스에게 빌려 줄 이유는 없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내게 저주를 걸었는지 밝혀야 된다.’

루카스가 지금 가장 의심하고 있는 인물은 저 대신 황위에 오른 그레고르였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는 그를 빤히 노려보던 레오노라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 니니 압빠 아냐.”

루카스는 확신에 가득 찬 아이의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밤톨 같은 게 죽고 싶어 환장했군.”

아이에게 제 마나가 새어 나간 것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참이었다.

‘이참에 흡수해야겠어.’

루카스는 레오노라의 작은 몸을 채우다 못해 넘실거리는 마나를 확인하고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누가 봐도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탐욕스러운 손짓에 흠칫 놀란 아이가 몸을 움찔한다.

“쩌, 쩌리 가.”

루카스가 마나를 흡입하기 시작하자 레오노라는 어린아이답지 않았던 당돌함을 잃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아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퍼억-!

* * *

가스파르의 얼굴을 한 괴한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몸 안에서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레오노라의 방대한 마나로 사고력을 유지하고 있었던지라 마나가 줄어들자 공포가 몸을 잠식한다.

‘어쩌지?’

소리라도 질러서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누가 봐도 가스파르였다.

그가 가스파르가 아니라고 주장한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

“압빠….”

완전한 아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스파르가 보고싶었다.

왜 이제와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 따위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 뺨을 작은 손으로 짓누르듯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압빠.”

“응.”

“니니 사댱해?”(리니 사랑해?)

언젠가, 전생을 떠올린 내가 가스파르를 붙잡고 같잖지 않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는 괜한 걸 묻는다는 듯 내 이마를 툭 건드리며 웃었다.

“내게는 너와 네 오빠들이 전부란다.”

나는 그가 덧붙이는 자상한 말에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었다.

‘노력한 적도 없는데….’

가스파르는 양부처럼 내가 뛰어나길 바란 적이 없었다. 똑똑한 아이가 되라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도 하지 않는다.

전생과 현생을 헷갈려 하던 내가 행패를 부릴 때도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고 그저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으니까.

전생의 내가 그토록 바랐던 가족의 사랑을 리니로 태어난 나는 너무 쉽게 얻어 버렸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랑받았다.

가스파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를 사랑했으니까.

마치, 으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아기는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런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느니 황궁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그제야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가스파르가 내게 차갑게 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황궁에 유폐되고 싶었다.

‘저 남자가 아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걸.’

나는 가스파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나의 냄새가 전혀 다른 남자를 피해 뒤로 물러나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쩌리 가! 쩌리 가라구!”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돌려받을 뿐이다.”

나는 남자의 손안으로 빨려 들려가는 오색찬란한 마나를 노려보며 숨을 헐떡였다.

내가 막 정신을 잃어 갈 무렵,

퍽!

“윽!”

남자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미친놈처럼 제 뺨에 주먹을 내리꽂기 시작했다.

퍼억! 퍽!

자해를 하는데 어찌나 거침이 없는지 잘생긴 아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다.

“도망쳐, 리니.”

미끈한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내게 익숙한 다정한 사람의 것이었다.

“…아빠?”

나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제 몸과 싸우는 가스파르를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내게 뻗어지는 오른손을 틀어쥔 그의 왼손이 쾅! 복도에 처박힌다.

“어서! 도망쳐!”

‘누군가’가 나를 해치는 것을 막으려는 듯, 검까지 든 가스파르의 손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닌 제 심장 부근이었다.

“앙대!”

나는 기겁하며 그에게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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