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7)화 (242/486)

제7화

나는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살금살금 침대 근처로 돌아왔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일단 황궁으로 끌려가는 일부터 피해야 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공작가 내에서는 내가 사생아라는 소문이 벌써 퍼지고 있는 듯싶었으니까.

‘가주인 가스파르의 결정이 가장 중요하겠지….’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 그가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황궁에 가지 않는 게 영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가스파르는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고 해도-게다가 아내가 바람을 피워서 낳아 온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배신감에 치가 떨릴 테고- 기른 정에 흔들릴 만큼 나약한 인간이었으니까.

“후움.”

애가 넷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준수한 가스파르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작은 가슴에 양손을 올린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 나이 세 살, 전생을 자각한 지는 어언 반년.

여태 나의 아빠 노릇을 해온 가스파르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나이였다. 그리고 가스파르는….

‘귀여운 걸 좋아하지, 젠장.’

그건 소위 ‘미친개’로 불리며 돌격소총이나 갈겨 대던 내가 제일 자신 없는 분야였다.

“죄송하지만, 지금 각하께서는 자리에 안 계십니다.”

“그럼 니니 여기서 압빠 기다리께.”

“보안상의 문제로 집무실 복도에는 아가씨가 머무르실 수 없습니다.”

나는 남자의 말에 조금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내가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스파르의 집무실을 침실처럼 드나들며 놀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따지고 드는 건 손해겠지.’

남자는 가스파르의 부관이자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인 헨리였다. 직책이 제법 높은 그에게 막무가내로 떼를 쓸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별채에서부터 본관까지 꽤 먼 길을 걸어온 나는 헨리가 딱딱하게 덧붙인 말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밤새 예쁜 짓 준비했는데.’

손발이 말리다 못해 뒤틀리는 것을 감내하며 거울 앞을 떠나지 않고 맹연습에 임했던 나는 아쉬운 마음에 오동통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헨니.”

“네, 아가씨.”

헨리가 내 손짓에 허리를 숙인다.

나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차가운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펼쳤다. 밤새 연습한 필살 초롱초롱 눈빛을 발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요고 주께.”

아기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 안에 든 것은 사탕 두 알이었다. 별채로 거처를 옮기는 와중에도 내가 악착같이 챙겼던 간식 바구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깝긴 하지만, 먹을 거만큼 사람을 현혹하기 쉬운 물질이 없지.’

내 예상대로 사탕을 건네받은 헨리는 아까와 달리 조금 허물어진 얼굴이었다.

그는 내게 냉랭했던 제 태도가 뒤늦게 무안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게 왜 이런 걸 주시는 겁니까. 제가 뭐가 예뻐서.”

“헨니 예뽀.”

나는 헨리의 불퉁한 목소리에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헨니, 압빠 도와주느라 힘드러.”

헨리의 물음에 배시시, 밤새 연습한 무구한 미소를 지은 나는 수줍다는 듯 얼굴을 푹 숙였다. 정수리 위로 부관의 시선이 슬며시 내려앉는다.

“네, 아가씨.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웅. 사탕 하나는 압빠 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헨리에게 팔랑팔랑 작은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등을 돌렸다.

‘그래도 내일이면 가스파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아,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 * *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몸이 세 살이라고 정신까지 세 살처럼 굴 수 없는 상황인데, 정신 똑띠 안 차릴래?’

“아효….”

나는 어김없이 굳게 닫혀 있는 집무실의 거대한 문을 노려보며 폭 한숨을 내쉬었다.

3일.

오늘은 내가 사탕 두 알을 들고 가스파르의 집무실을 찾은 지 무려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어마어마할 텐데 가주인 그가 3일 내내 집무실을 비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이건 명백히 가스파르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오늘도 빼꼼 고개만 내밀고 나를 맞이한 헨리의 멋쩍은 얼굴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신탁이 내려오자마자 나를 별채로 보내 버리긴 했지만, 아픈 나를 살피러 오기에 아직 ‘레오노라’에 대한 정이 남아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어찌 됐든 공작가에 속한 상태니까 그냥 크게 아픈 건지 확인하러 왔던 거였을 수도 있겠어.’

고작 사탕 두 알-헨리랑 나눠 먹었을 테니 한 알-로 공작가를 통솔하는 가스파르를 꼬시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룰루랑 랄라는 내가 웃어 주기만 해도 대륙 반절을 뜯어 올 기세였는데!’

한숨과 함께 뒤를 돈 나는 아장아장 걸어 본관과 연결된 뒤뜰로 나섰다.

‘어찌 된 일인지 에녹과 실비도 보이질 않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 대던 룰루와 랄라도 없었으니 털썩 풀밭에 주저앉은 나는 들꽃을 줄줄이 엮어 작은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탕으로 안 된다면 다른 뇌물을 먹여야 했는데, 아기인 나는 돈이라곤 쥐뿔도 없는 신세였으니까.

“움… 이러케 하는 거 아녔나.”

룰루가 알려 준 대로 하긴 했는데, 막상 완성하니 흰 꽃과 노란 들풀이 엮인 화관은 가스파르의 머리통에 씌우기엔 턱없이 작아 보였다.

‘팔찌로 쓰라고 하지 뭐.’

가스파르는 내가 가져다주는 거라면 빻은 풀떼기를 받아 들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건 좋아하겠지?’

가스파르가 나를 고의적으로 만나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퍽 원망스러워 나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는데, 막상 화관을 완성하고 나니 조금이라도 빨리 보여 주고 싶어졌다.

웃는 게 보고 싶어졌으니까.

가스파르는 겉보기엔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레오노라, 그러니까 나에게는 곧잘 웃어 주곤 했다.

나는 살짝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가스파르는 정에 약해.’

지금은 배신감에 휩싸여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보면 마음이 약해질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니까 하차니아가 하찮은 엑스트라 가문에 머무는 것이라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내심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야겠어.’

벌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나는 풀물이 잔뜩 든 드레스 차림 그대로 집무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복도에 들어선 내가 막 코너를 돌려던 순간이었다.

쿵!

“아코.”

돌처럼 딱딱한 다리에 이마를 박은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뭐지.”

이마가 쓰라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머리 위로 차가운 시선이 쓰라리게 내리꽂힌다.

나는 익숙한,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눈썹을 모았다.

“통행에 방해가 되니 비켜.”

처음 듣는 차가운 어투였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가스파르였다.

“…압빠?”

나는 제 바짓자락을 붙잡은 내가 매우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누가 네 아빠라는 건가.”

그래, 따지고 보면 가스파르는 ‘나’의 아빠는 아니었다.

‘그래도 실비의 오러에 당했을 때는 아빠라고 부르지 말란 말은 안 했었는데.’

나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에 눈을 부릅떴다.

‘괜찮아, 별일 아냐.’

그가 내게 화를 내는 것 정도는 기실 예상한 일이 아니던가.

“놔. 난 지금 할 일이 매우 많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가스파르가 차갑게 내뱉는 말들에 쿡쿡 가슴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 저러는 걸거야. 노엘이랑 내게 화가 난 상태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핏기가 싸악 가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가기만 했다.

“압빠…. 아니, 가둔니.” (아빠…. 아니, 가주님.)

“뭐?”

“니니가, 요거, 요거 주께.”

넘어진 그대로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가스파르의 냉랭한 얼굴에 더듬더듬 바닥을 짚었다.

‘앗, 벌써 시들었네.’

오후 내내 고사리 손으로 주물거린 덕인지 바닥에 나동그라진 화관은 벌써 고개가 꺾인 상태였다.

나는 쓸모를 잃은 화관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가스파르가 허리를 숙여 화관을 집어 든다.

‘말만 나쁘게 했지 결국 받아 줄 건가 봐.’

‘그래. 가스파르는 양부랑 다른 사람이었잖아.’

전생의 나와 달리 ‘레오노라’는 형편없을 정도로 쓸모없었다.

특히 전생을 자각하기 이전에는 그저 평범한 아기에 불과했기에 이용가치라곤 전무했다.

‘가스파르는 그런 쓸모없는 아기조차 아끼던 사람인걸.’

스스로를 세뇌하듯 머릿속으로만 중얼거린 나는 자리에서 발랑 일어나 그가 손에 든 화관을 손끝으로 콕 짚었다.

내 손짓에 그가 고민하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다.

“요거, 압빠 선물.”

화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설명하자 가스파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가주에게 쓰레기를 주는 건가.”

‘쓰레기…?’

“공작가에 이런 관습이 있는지 몰랐군.”

나는 가스파르가 짧게 중얼거린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무리 노엘에게 화가 났다지만, 딸로 키운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지만 도무지 가스파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말이었다.

내가 놀라든 말든 무감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가스파르가 툭 화관을 집어 던진 다음 나를 지나쳤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차갑게 복도를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구둣발에 짓눌려 꽃잎이 반 정도 떨어진 화관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 얘 안대겐네.”

아무리 내가 아기라도 구둣발은 못 참지.

탁, 탁!

재빠른 발놀림으로 복도 벽을 걷어찬 나는 가스파르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악!”

바로 그의 머리채를 붙잡기 위해서.

“지금, 뭐 하는!”

“야.”

“?”

“너 내 압빠 아니지.”

나와 눈이 마주친 가스파르, 아니, 누군지 모를 놈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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