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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3화 (218/486)

제233화

그러나 히스가 말하지 않는다고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나는 둔하진 않았다.

점점 더 주기가 짧아지는 병의 고통이 찾아오는 다음날이면 히스가 어김없이 몸살을 앓았으니까.

‘어쩐지 원작에서 묘사된 루에르병의 통증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견딜만 하다 싶었어.’

히스가 나대신 아파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진 내가 원체 건강 체질이거나 원작의 아이네스가 극심한 꾀병을 부렸던 거라고 생각했었다.

“제가 가져가게 해 주십시오.”

내가 제 행동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히스는 내 고통을 가져가겠다며 나서곤 했다.

“저는 당신보다 훨씬 더 고통에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가볍게 흘릴래도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고통에 익숙하다고 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럴 수 없어.”

나는 고집스레 앙다문 히스의 입술을 노려보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감내해야 될 고통이야. 내 병 때문에 아픈 건데, 히스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아.”

“당신이 아픈 걸 보는 게 내게는 백 배, 천 배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벌써 내 고통을 흡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히스의 예쁘장한 미간이 잔뜩 일그러진다.

나는 피가 번진 입가를 소매로 대충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누구한테 배웠대.”

내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척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문지른 히스가 뒤늦게 한숨처럼 입을 연다.

“이상한 말입니다.”

“응?”

“저는 원래 당신보다 몇백 살이 많습니다.”

자신을 어린아이취급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싶었지만, 내려다본 히스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눈앞의 소년이 세월이 흘러도 녹지 않는 만년산처럼 평생 아름다울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히스는 거친 풍랑에도 잔잔한 천년의 호수처럼 기품 있었으나,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었다.

“사람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나의 시간을 쫓아오지 못하고 아주 더디게 성장하고 있는 히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히스가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어.”

“당신이 당부한 대로 잘 먹고 있습니다.”

히스가 덧붙인 당근도 오이도 빼먹지 않고 먹는다는 말에 나는 고통도 잊고 배시시 웃어 버렸다.

‘마음이 성장하는 만큼 몸도 자라는 것 같긴 한데…….’

막 주워 왔을 때의 히스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짐승에 더 가까웠었다.

사람에게 쉬이 곁을 내주지 못하고 잔뜩 날이 선 채 사방을 경계하는 야생 동물.

나는 예외인 듯싶었지만, 나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는 히스의 세상을 제한할 뿐이었다.

‘마음을 나눈 사람이 없으니까 내게만 매달리는 거겠지.’

그래서 육체가 산산이 조각나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내 아픔을 가져가려고 드는 것이다.

“히스, 나 정말 괜찮으니까 도와줄 필요 없어.”

나는 내 단호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소년을 두고 복도를 벗어났다.

* * *

어지러운지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코 히스의 도움을 거절한 레오노라가 복도 너머로 사라진다.

키는 훌쩍 컸지만 여전히 가는, 아니, 전보다도 더 가늘어진 인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히스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히스가 작게 중얼거린 말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소년은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자신과 레오노라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트리스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트리스탄은 히스와 레오노라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이 조금 무안하다는 듯 턱을 긁었다.

“무슨 이유를 말하는 건지 질문을 똑바로 해야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년이었을 때의 날카로운 미성은 온데간데없는 트리스탄의 목소리는 느른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했다.

밀도가 높은 트리스탄의 목소리를 자각한 히스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돋았다.

“공주님은 어째서 공작의 도움은 거절하지 않으면서 내 도움은 거절하는 겁니까.”

“공주? 아, 레오노라 말인가.”

트리스탄은 레오노라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글쎄……. 레오노라가 너보다 날 더 좋아해서가 아닐까 싶은데.”

약을 올리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히스의 고요한 청안은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트리스탄은 히스의 확신에 찬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다라….”

“네. 공주는 절대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그녀는 공평하고, 공평해서 차가운 사람이니까.”

애석하게도 트리스탄은 히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히스가 말하는 레오노라의 성격을 자신도 요즈음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 레오노라에겐 첫 번째란 없지.’

지금의 레오노라에겐 눈앞에 놓인 대의가 있을 뿐이었다.

멸망을 앞에 둔 이 세계를 반드시 구해 가족들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과 함께.

“그리고 공주는 내게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씁쓸한 트리스탄의 미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히스는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레오노라가 네게 사랑을 맹세했다고?”

언뜻 들으면 결혼이라도 약속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잔뜩 일그러진 트리스탄의 얼굴을 마주한 채 짧게 고개를 끄덕인 히스가 담담히 대답한다.

“네. 날 사랑해 주겠다고 맹세했으니, 그녀는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날 사랑할 겁니다.”

트리스탄은 그제야 지척에 다가온 히스가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새하얗고 작은 손.

조각상의 부품을 똑 떼 놓기라도 한 것처럼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손에서 뻗어 나온 오러가 트리스탄의 급소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레오노라의 사랑을 자랑하더니 이제는 내 목숨을 노리는 건가.”

“아뇨. 죽이려면 벌써 죽였습니다.”

기가 막힌 트리스탄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히스는 느릿느릿 손을 거두며 고개를 들었다.

“경고하는 겁니다.”

여름 바다처럼 새파란 청안.

언뜻 맑아 보였지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오묘한 히스의 눈에 트리스탄은 잠시 숨을 참았다.

“제가 당신이 숨긴 그 저열한 욕망을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열하다라, 말이 심하군.”

트리스탄은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네가 말하는 그 속내, 감출 생각도 없었는데.”

“…….”

“내가 레오노라에게 도움을 주는 건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 게 맞으니까.”

단순히 어릴 때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트리스탄은 이제 5대 귀족에 속하는 솔로아 공작가를 이끄는 수장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속한 제국과 대립하는 왕국의 공주를 돕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마음을 흑심이라고 표현하는 거라면, 너도 그 더러운 마음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트리스탄의 말에 와락 인상을 찡그린 히스는 먼지라도 묻었다는 듯 손을 거두며 제 팔을 탈탈 털었다.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다르지. 그래서 네가 어른이 되지 못한 거다.”

트리스탄은 제 마음을 부정하는 히스를 비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런 상태로는 넌 영원히 레오노라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테고, 그녀를 가질 수도 없겠지.”

가질 수 없다.

트리스탄의 선고 같은 말에 히스는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선 채 이를 악 물었다.

“넌 평생 천진한 꼬마처럼 레오노라를 사랑할 테니까.”

* * *

쿵!

‘천진한 꼬마처럼?

방으로 돌아온 히스는 트리스탄의 말을 떠올리며 벽을 내려쳤다.

움푹 파인 벽이 꼴 보기 싫어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린 소년이 작게 헛웃음을 짓는다.

‘그럼 나보고 저처럼 발정난 개같이 주인님을 보라는 말인가.’

트리스탄이 레오노라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챈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물론 레오노라를 탐하는 사람은 트리스탄만이 아니었다.

마구간지기의 손주, 공방에서 일하는 일꾼들, 그리고 간혹 왕국을 찾는 왕후귀족들이나 가신들까지.

‘더러운 새끼들.’

할 수만 있다면 눈을 전부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른 소년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쥔 채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너도 다르지 않을 텐데.”

‘아니, 나는 다르다.’

히스는 제 머릿속을 잠식한 트리스탄의 말을 애써 부정하며 신음을 흘렸다.

‘나는 주인님을 안고 싶다거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어.’

절대.

단언코.

단 한 번도…….

‘나는 그런 욕심까지 내서는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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