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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2화 (217/486)

제232화

아이네스는 레오노라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아.황.장>의 등장인물인 레오노라 하차니아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고.

“레오노라는 절대로 그 소년을 병기로 사용하지는 않을 거예요.”

사건이 뒤죽박죽 섞이고 전개가 어긋나는 일이 같은 삶을 수십 번 반복하는 동안 아예 없진 않았으니까.

레오노라가 끼어든 탓에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은 당황스러웠지만, 회귀자인 아이네스가 이 세계에 대해 유일하게 깨달은 점이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설정값을 벗어나진 못할 거야.’

바로 캐릭터의 설정값.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약한 레오노라라는 인물에게 주어진 설정값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아트로페나 찾아와요!”

이를 부득 갈며 아이네스가 외친 말에 퀴리오스는 곤혹스럽다는 듯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좋아요. 교단원을 풀어 진짜 아트로페 백작을 찾아보도록 하죠.”

흥분해 숨을 몰아쉬는 아이네스에게 천천히 다가간 퀴리오스는 짧게 혀를 차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크레아인이라면 특유의 마나를 탐지할 수 있을 테니 어렵진 않을 겁니다. 다만.”

“다만?”

“당신의 주제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헬리오스.”

아이네스에게 경고하는 퀴리오스의 목소리에는 교단의 1인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한 건 이해하지만, 교단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번에는 아이네스의 고집을 들어주겠지만,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다음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 모든 건 알레테이아의 영광을 위해서.”

아이네스는 서늘한 퀴리오스의 얼굴에 움찔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알레테이아의 영광을 위해서.”

그녀는 퀴리오스를 따라 알레테이아의 영광을 입에 담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아이네스는 퀴리오스가 나가자마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를 걷어찼다.

“그놈의! 빌어먹을! 알레테이아!”

아주 지긋지긋하다 못해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네스는 자신의 첫 번째 삶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알레테이아 님.”

“…….”

“제가 걸린 루에르병은 당신의 반대자인 루엘라의 저주가 틀림없어요!”

그때의 아이네스는 병에 걸린 제 몸을 원망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죽고 싶지 않았고,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여신 루엘라가 원망스러웠다.

주신인 루엘라와 달리 사특한 힘을 부린다고 알려진 알레테이아는 그런 아이네스에게 영원한 젊음을 약속했다.

‘그게 이런 식의 영원일 줄은 몰랐지만.’

바닥을 짚은 아이네스는 핏줄이 선연하게 떠오른 제 손등을 노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패인 대리석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회귀를 거듭하며 축적한 힘이야. 지금의 내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아크레아의 소년왕이 아무리 강대한 마법사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에티모스가 부활하면 그녀에게 영겁의 저주를 안긴 후 자취를 감춘 알레테이아가 깨어날 것이다.

아이네스는 알레테이아의 힘을 모조리 빼앗아 새로운 세계를 열겠다는 욕망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게만 되면 모두 다 추방이야.’

알레테이아든 레오노라든, 전부 다 쫓아내고 온전한 제 삶을 누릴 것이다.

‘내가,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될 거라고.’

* * *

내가 ‘진짜’ 아트로페 백작을 숨긴 곳은 공작령이었던 하차니아도, 북부의 다른 지역도 아닌 서부의 솔로아령이었다.

“이제 슬슬 아이네스 쪽에서 아트로페의 행방을 찾으려고 들 거예요.”

‘아이네스가 노엘의 연기에 속아 넘어갈 때는 걱정 없었지만, 황제가 찾으려고 나선 사람을 숨겨 주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텐데…….’

내가 차를 홀짝이며 하는 말에 트리스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잘 숨겨 두고 있으니 걱정 마라.”

눈만 데구르르 굴리던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트리스탄이 숨겨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제가 책임질게요. 모두 제 탓으로 돌려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생각 없이 돕겠다고 나선 건 아니니까.”

무뚝뚝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한가득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어느새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먼저 어른이 된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웃었다. <아.황.장>의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인 아이네스를 배신하고 나를 도우리라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네스가 나만 원작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 건 이런 의미였을까?’

원래대로라면 트리스탄은 하차니아, 그러니까 내 적이 되었을 인물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매끈하게 잘생긴 트리스탄의 얼굴을 힐끔한 내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는 당황스럽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손까지 저었다.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굳이,”

“아니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감사의 인사는 꼭 필요한 거지.”

그런 트리스탄의 말을 툭 자르고 끼어든 에녹이 껄렁하게 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다.

“응? 너 우리 리니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남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듯 다른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린 에녹은 불안한듯 입술을 짓씹었다.

“왜, 왜 대답이 없어? 리니, 너 설마 트리스탄이랑-!”

“시끄러워.”

내가 에녹의 말을 쌀쌀맞게 자르며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내게 들이민다.

“아, 아무 사이 아닌 것 맞지?”

“방해하지말고 나가!”

“리니, 너 연애하기엔 아직 10년은 일러. 아니, 20년!”

그럼 마흔이 되고 나서야 첫 연애를 시작하라는 말인가.

에녹의 말에 기가 막힌 나는 허락도 없이 멋대로 집무실에 쳐들어온 그에게 축객령을 내린 뒤 문까지 잠가 버렸다.

“미안해요. 요즘 백수라서 할 일이 없나 봐요.”

왕국이 건국되자마자 감투를 전부 내려놓은 에녹은 한량이 제 체질이라며 백수 생활을 매우 충실히 영위 중이었다.

‘그 핑계로 남몰래 엘릭서를 찾아다니고 있는 거겠지만…….’

에녹이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지 트리스탄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루에르병은, 여전히 진행 중인가?”

“최대한 억누르고 있긴 하지만 치료제가 없는 병이니까 어쩔 수 없죠.”

나는 내 대답에 트리스탄의 얼굴이 슬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자카리는 아직 못 찾은 건가요?”

“그래. 완전히 증발해 버린 것 같다.”

엘릭서를 찾아 나선 사람들 중 여태 돌아오지 못한 건 자카리뿐이었다.

“……그래요.”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아니에요. 어쨌든 알아봐 줘서 고맙, 읏! 자, 잠시만요!”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트리스탄을 뒤로한 채 복도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손님 앞에서 피를 토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얀 창가에 후두둑 번지는 핏방울이 소름 돋을 정도로 새빨갛다.

남들이 귀신으로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모습이라 서둘러 입가를 닦는데 작은 손수건 하나가 눈앞에 팔랑인다.

“하지 마.”

작고 보잘것없는 들꽃이 수놓인 손수건의 주인은 히스였다.

이제는 내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작은 소년이 또다시 내 고통을 흡수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하지 마, 히스.”

그가 나 몰래 루에르병의 통증을 내게서 가져가고 있었음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한밤중에 누가 창문을 넘어 들어오길래 암살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병의 증상이 너무 극심하게 찾아와 정신이 반쯤 혼미한 상태였다.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온몸이 저릿저릿해 누워만 있는 내게 살수의 손이 뻗어졌다고 믿었던 그 순간,

“아프지 마십시오.”

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아픈 걸 지켜보려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작게 속삭인 소년의 손이 내 이마에 닿자 마구잡이로 폭주하던 마나가 이내 잠잠해졌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압박하던 마나의 흐름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이다.

“……?”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린 내가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식은땀으로 범벅된 소년의 작은 몸이 기우는 장면이었다.

툭.

호수 위로 떨어지는 조각달처럼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놀란 내가 입만 벙긋하는 사이, 히스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다 이내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얼마나 아프면 감각이 그토록 예민한 아이가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이튿날이 되어서도 회복하지 못한 히스는 내게 지독한 감기에라도 걸린 것 같다며 자신이 아픈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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