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36화 (136/486)

제136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전하. 특히 저택 밖을 나서실 때요.”

나는 응접실을 나서는 이본느를 배웅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악의 소굴 하차니아.

귀족의 수치, 열등한 공작가!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의 광장에 저열한 단어가 수놓인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으니까.

‘저게 다 선전의 힘이라는 거지.’

믿을 만한 미디어, 아니, 신문사 자체가 몇 개 없는 제국 내에서 발렌타인사가 가지는 위엄은 어마무시했다.

‘이번 <전염병 특집>은 특별히 황가의 인장까지 찍혀서 나왔으니 다들 믿을 수밖에.’

황제가 기사의 신빙성을 보증한다는데,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 일간특급을 믿지 않을 제국민은 많지 않았다.

“계란 세례 따위를 말하는 거라면 이미 마차를 수도 없이 때리고 터졌단다.”

나는 이본느가 한숨처럼 내뱉는 말에 민망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없지. 황제인 그레고르가 나서서 군중을 선동 중이니.”

붓꽃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은 그녀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나를 다독였다.

“기운 내렴. 네 잘못은 없으니까.”

“…감사해요.”

꼬마 악녀, 더러운 사생아 레오노라 하차니아.

나는 황성을 공격했다는 누명을 쓴 채 반역자로 지목된 자카리보다도 더 많이 보이는 내 이름 넉 자에 멋쩍은 턱을 긁으며 이본느를 따라 현관에 발을 디뎠다.

“퉤엣! 저 계집이 전염병을 몰고 왔다는 그 공녀잖아!”

그러자 멀리서 확성기라도 쓴 듯 침을 뱉는 소리가 맹렬하게 꽂혀 들려온다.

“차기 사교계의 꽃이라더니, 지금 보니 눈꼬리가 올라간 게 희대의 악녀가 될 상이로군!”

나는 수도 저택을 에두른 새하얀 울타리 너머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흘깃했다.

“관상가 납셨네, x발.”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이본느 황비를 태운 마차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언제 현관 밖으로 나왔는지 모를 에녹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울타리에 다가선다.

“얼마 남지도 않은 그 머리, 다 태워 버리기 전에 내 눈앞에서 꺼져.”

황도 내에서는 위급 상황이 아닌 이상 오러나 이능을 발동할 수 없다는 제약까지 잊었는지 그의 손 위로 새빨간 불길이 일렁인다.

“허, 참! 기가 막혀서!”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머리털이 조금 빈약한 남자-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수도 귀족 중 한 명이었다.-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에녹!”

“하지만 쟤들이 내 욕도 아니고 네 욕을 하잖아!”

흥분해 숨까지 씨근거리는 에녹의 팔을 붙들자 금세 주눅이 든 셋째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니, 잘했다고. 홀라당 다 태워 버려!”

태울 머리가 몇 가닥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정말?”

내 말에 반색하며 눈을 반짝인 에녹이 손바닥을 맞부딪치자 화르륵 소리와 함께 작은 태양처럼 빛나는 써머나이츠의 오러구가 불타오른다.

“화, 황도 내에서 오러를 사용하다니! 역시 역모를 꾸민 반역자 집안답구먼!”

그러자 남자는 자신이 몰고 온 무리를 내버려 둔 채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쳤다.

“우리 막내 눈이 얼마나 예쁜데, 저 개자식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휙 등을 돌려 내게 다가오는 에녹이 툴툴대는 말에 내 옆에 시립해 있던 로제와 라비가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그럼요. 살짝 올라가서 더 예쁜 눈인데! 저 자식들 눈깔이 다들 삐었나 봐요!”

“왜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쓸모도 없으니까 다 뽑아 버리는 게 낫겠어요.”

‘우리 로제랑 라비,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네.’

나는 수도 저택의 수석 하녀답게 기품 있던 그들의 첫인상을 떠올리며 뺨을 긁었다.

‘뭐, 사람들이 우리 욕을 하면 할수록 나중에 더 유리해질 테니까 난 괜찮지만.’

사람들이 저택에 몰려와 돌을 던진 열의를 보인다는 건 하차니아가 그만큼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르파라랑 카렌을 불러 줘. 황성 방문 준비를 해야겠어.”

나는 그레고르와 아이네스가 본격적으로 소수 민족과 우리에게 전염병의 근원이라며 덮어씌울 학술회를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 * *

“오늘따라 유난히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나의 태양이시여.”

“정말 하늘에서 별이 똑 떨어진 것처럼 어여쁘세요.”

“…그만들 해.”

황성 방문의 목적은 학술회였지만, 외출 허락은 이본느 황비의 티파티 명목으로 받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갖춰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아이처럼-아이 맞지만- 보일 만한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티에리에게 부탁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리본과 레이스로 나풀나풀한 드레스를 준비해 줄 줄은 몰랐다.

오버스커트의 뒤를 양쪽으로 걷어서 귀여운 퍼프를 만든 형식의 드레스였다. 나는 가슴을 장식한 커다란 흰색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사람들의 악의적인 말에 기죽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잖아. 다들 내가 어린애 주제에 악녀처럼 생겼다고 욕하니까.”

나도 내 뾰족한 인상에 이런 귀여운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고.

“악녀는 무슨 악녀예요! 우리 아가씨,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여쁘시기만 한걸요?!”

나는 내 말에 발작하듯 소리를 높이는 로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나, 착하게 생겼어?”

“예쁘게 생겼어요.”

“됐어!”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린 나는 실비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로제나 라비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다는 것쯤은 알아.”

“콩깍지라니. 객관적으로 무척 동감하고 있었다.”

“…….”

나는 객관적이긴 개뿔 객관적인 둘째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주제를 돌렸다.

“황제 폐하께서 학술회에 대귀족들도 소집하셨대.”

‘소수 민족을 학살할 정책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위해서겠지.’

“자카리 오라버니나 실비가 아빠를 대신해 참석해야 할 텐데, 둘 중 누가 갈 거야?”

“내가 가겠다.”

“……나.”

나는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 둘의 대답에 놀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자카리 오라버니가 가시겠다고요?”

당연히 귀찮아서 안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

느릿느릿 대답하는 자카리의 말에 실비가 답지 않게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툭 밀치듯 앞으로 나선다.

“지금도 밀려오는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제에 황성에서 열리는 대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나서는 건가.”

“백랑….”

그러자 실비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연주홍빛으로 예쁘게 빛나는 자카리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단장도… 못 단….”

‘지금 실비는 백랑(白狼)의 단장직도 못 달았다고 욕하는 거지?’

“…한심.”

늘 그렇듯 말을 제대로 끝마치진 않았지만, 자카리의 말뜻을 알아들은 실비가 냉소를 머금는다.

“네가 흑랑의 단장직을 맡은 건 아버지가 공작가를 돌보기 위해 일선에서 물러나셨기 때문이다.”

“…….”

“수년 만에 돌아와서 이제 와 공작가의 일원 노릇을 하려는 꼴이 우습군, 자카리 하차니아.”

실비의 말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린 자카리의 눈빛이 한순간 매섭게 돌변했다.

“내가 책임질 일을 책임질 뿐이다.”

느른하게 처졌던 눈매가 또렷해지자 자카리는 정말로 가스파르처럼 엄격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서 넌 빠져, 실베스테르.”

나는 점점 과열되는 자카리와 실비의 대화에 끼어들 듯 몸을 앞으로 기울며 실비와 얼굴을 마주했다.

“실비, 이번 대회의는 자카리 오라버니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쨌든 황성을 공격했다는 혐의가 있는 사람도 자카리 오라버니잖아.”

나는 이번 학술회를 통해서 전염병의 원인이 아이네스가 불러들인 고로나라는 걸 아예 낱낱이 파헤쳐 밝힐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실비보다는 마물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카리가 도움이 되겠지.’

계속 나무늘보처럼 늘어진 상태라면 제대로 발언이라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설득이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 실비의 옷소매를 붙든 채 귀엽게 두 눈을 깜박였다.

“조심해서 다녀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실비.”

원래도 딱히 권력이나 지위에 욕심이 없는 실비가 갑자기 가주 대리 권한이 탐이 나서 대회의에 참석하려고 들 리는 없었다.

황성에서 내가 위험해질까 걱정하는 게 훤히 보이는 둘째의 예쁜 마음이 기특해 그의 손등을 도닥이는데 나와 자카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둘째가 답지 않게 와락 인상을 찡그린다.

“…나는.”

“응?”

“나는 왜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지 않는 거지?”

“…….”

“내가 저 자식보다 부족한 게 무엇이기에.”

‘가문이 모반을 꾀했다고 몰려 가주까지 구금된 상황에 지금 그딴 걸 신경 쓴다고?’

아무래도 군기가 빠진 듯해 실비의 특훈 일정을 늘릴 마음을 단단히 먹은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자카리 오라버니는 실비처럼 나랑 친밀하지가 못하잖아. 그러니까 손윗사람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게 당연하지.”

내 말에 자카리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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