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35화 (135/486)

제135화

“너는 공작가를 앞세워 나를 돕지 말았어야 했다.”

이어지는 자카리의 말에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결 좋은 머리칼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지?”

내 행동에 가스파르 판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카리의 단정한 이마가 와그락 일그러진다.

“나를 동물 취급하는 건가.”

“어, 으음….”

나는 갑자기 말문이 트인 듯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 자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아뇨. 그냥 조금 기특해서요?”

“기특?”

내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 자카리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지만, 나는 정말로 그가 기특했다.

‘그래도 아직 가문 생각을 하긴 하는구나, 우리 첫째.’

자신과 흑랑의 대처 때문에 하차니아가 피해를 볼까 걱정하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단순히 외모만 가스파르를 닮은 게 아니었네.’

자카리와 가스파르 부자(父子)는 무뚝뚝한 외모와 달리 천성이 다정한 모양이었다.

‘둘째랑 셋째와 달리 딱히 내가 교육을 시킨 적도 없는데 말이야, 아주 장해.’

제 머리를 쓰담쓰담하는 내 손을 탁 쳐낸 자카리가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며 입술을 움직인다.

“날 조롱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하지만….”

내 대꾸에 반박하려는 듯 바로 튀어나오던 자카리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든다.

나는 다시금 예기를 잃고 탁하게 가라앉은 자카리의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숨을 삼켰다.

‘흑랑의 부단장이 이런 현상은 그림자 오러의 부작용이라고 설명해 줬어.’

일명 ‘침식’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쉐도우나이츠들은 다른 소울나이츠들과 비교해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지만, 개체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오러에 영혼이 오염당하기가 쉬웠으니까.

‘이능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침식될 확률이 높다던데 가스파르는 왜 자카리를 전장에 내보낸 걸까.’

이제 막 성인이 될락 말락 한 그는 소년 기사에 불과했음에도 가스파르 대신 흑랑을 통솔할 만큼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공작가의 후계자로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오라버니, 피곤하면 이만 쉬세요.”

“흔…적….”

“흔적 탐색이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나는 다시 나무늘보가 되어 버린 자카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퀴리에.”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투명한 빛에 가까운 내 마나가 스르륵 흩어지며 바닥에 스며든다.

사실 확인하지 않아도 고로나의 흔적이라면 반드시 남았을 거다.

‘증거를 잡아도 황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 게 뻔해서 문제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이미 반쯤 잠에 든 자카리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드레드, 미안하지만 우리가 잠시 쉴 곳이 있을까?”

“그럼요. 저희 집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밀드레드가 안내한 집은 전형적인 집시의 움막이었다.

‘그래도 촌장의 집일 텐데 천을 기워 만든 움막이라니.’

언제든 발 디딘 땅을 떠날 자유를 숭상하는 집시다운 선택이라면 선택이었다.

밀드레드가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발로 만들어진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아이네스를 떠올리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걔가 소르베를 타겟으로 삼은 건 단순히 이곳이 빈민촌이라서는 아닐 거야.’

황도는 황성이 위치한 제국 중앙인 만큼 계급사회가 가장 공고한 곳이었다.

내성 안에서도 귀족들이 사는 로열스퀘어는 따로 높은 담벼락이 세워져 있을 만큼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레고르가 일반 평민들은 완전히 외면하다시피하고 있어서 외성은 전부 빈민촌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사정이 좋지 못하지.’

그런데도 아이네스는 수많은 가난한 지구들 중에서도 소르베를 콕 집어 전염병을 퍼뜨렸다.

‘빈민촌 중에서도 소르베 지구의 특징이라면….’

자카리를 침대에 눕힌 후 밀드레드의 움막을 둘러보던 나는 바닥에 넓게 깔린 붉은 융단을 흘깃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윌레닌이 칭제할 당시에 제국에 흡수된 벨네르니인들이 모여 사는 지구였지.’

지금은 제국력 89년.

즉, 윌레닌이 칭제한 지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본시 윌레닌 사람이 아니었던 소수 민족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자카리가 국지전에 파견되었던 자브뤼켄 지역도 토호 세력이 장악한 곳이었고.’

창백한 자카리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네스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아버지인데….’

설마 희대의 살인마라고 불리는 역대 전범들과 비슷한 전략을 펼치겠어?

* * *

역시 펼칠 작정인 모양이었다.

‘미쳤네, 미쳤어.’

나는 자카리가 자브뤼켄에서 토호 세력과 손을 잡고 황성을 공격한 반역자이며 황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전염병의 원인이 벨네르니의 소수민족이라고 규명하고 있는 <일간특급>의 1면을 바닥에 내던지며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 폐하가 전국에서 학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황비 전하. 사실인가요?”

라비가 내온 특제 밀크티를 홀짝인 이본느 황비이자 정보길드 주목나무의 수장, 이베트 부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학술회를 열겠다는 핑계로 제국 학술원 교수란 교수들은 전부 황성으로 소환했단다. 마탑이나 연구원 소속의 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설마 유전학이나 우생학자들 위주로 모아들였나요?”

내 물음에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은 이본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돌아본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네 정보력이 주목나무의 정보원들보다 낫구나.”

이건 정보를 미리 습득해서 안 게 아니라 설마 설마하면서 예상한 거였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본 건데 그게 맞아 떨어지다니….’

“황제 폐하와 아이네스가 작금의 사태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생각해 봤어요.”

“그럼 아주 대단한 통찰력이구나. 네가 여덟 살 어린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이본느의 칭찬에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내건 채 말을 이었다.

“폐하가 연다는 그 학술회, 저도 참가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가택 연금이라면 내가 여는 티파티에 초대한다는 핑계로 하루쯤 풀어 줄 수 있겠지만, 학술회에 참가하려면 학자 자격증이 있어야만 한단다.”

“학자 자격증만 있으면 되는 거죠?”

나는 이본느의 설명에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학술회 당일에 황성에 초대해 주시겠어요?”

“그래. 공작가의 수색은 공작과 장남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니 괜찮겠지.”

신전에서 그대로 치안대에 붙잡혔을 루카스-지금은 가스파르일지도 모르지만-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힌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나저나 프레데릭은 잘 지내요?”

“그래. 레이디 이베트의 양자로 들이는 절차를 밟고 있단다.”

“지금이라도 프레데릭이 가족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구휼원의 아이들이 전부 가족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나는 마력과 이능을 소유한 구휼원 아이들 사이에서 늘 기가 죽어 있던 소년을 떠올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아이를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준 건에 관해서는 그 어떤 말로도 내 고마움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 같구나.”

“이베트 부인의 주목나무가 수집한 1급 정보를 저희가 선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표현해 주셨어요.”

일반적인 상단과 달리 정보 길드는 기반을 다지고 명성을 쌓아올리는 데 오랜 세월을 투자해야만 했다.

‘원작 정보를 활용해서 나는 키울 수도 없는 특급 정보 길드를 거저 먹은 거나 다름없는데, 뭐.’

“그래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나는 응접실을 나설 준비를 하려는 듯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이본느 황비의 말에 서둘러 엉덩이에 깔고 있던 봉투를 꺼내들었다.

“앗! 그럼 딱히 준비한 건 아니지만 오신 김에 이 서류를 한 번 살펴봐 주시겠어요?”

초롱초롱한 내 눈빛을 마주한 이본느가 떨떠름히 갈색 봉투를 받아든다. 나는 그녀의 가는 손목이 두툼한 봉투 덕에 휘청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민망한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 어마어마한 양이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나는 이본느의 말에 아이처럼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자르파라와 제가 새로 준비하는 사업에 필요한 정보 목록이에요. 되도록 빨리 알아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각국의 황제, 왕, 지배자, 그리고 권력자들의 비자금 목록을 도대체 어디에 쓸 생각인 건지 궁금하구나.”

아이네스가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전범들의 전략을 모방한다면, 나는 견고한 성벽을 지키며 나라를 보호했던 통치자들의 전략을 모방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나는 호기심 어린 이본느의 눈빛을 피하며 가스파르가 구금되었을 황성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렸으니 정말로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겠지.’

감히 흑랑이 황성을 공격했었다는 말은 입에도 못 올릴 만큼, 확실한 공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