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교황의 선물을 품에 안은 채 집에 돌아온 나는 현관 문턱을 밟자마자 히스를 찾았다.
“히스.”
그저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을 뿐인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소년이 내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네.”
교황이 선물로 준 셉터는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내가 브리넨 후작저에서 발견한 아크레아의 셉터와 너무 흡사했다.
‘그 셉터에서 느껴졌던 음험한 저주는 걸려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나는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주먹만 한 다이아가 백금 지팡이 끝에 박힌 모양을 보고 가느스름히 눈을 떴다.
‘보석은 다르긴 한데 모양이 완전히 똑같은 것 같단 말이지.’
붕붕.
허공에 셉터를 휘두른 나는 커다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받아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는 다이아를 힐끔하며 입을 벌렸다.
“히스, 앉아.”
셉터를 들고 명령하자 내 앞에 저벅저벅 다가온 소년이 냉큼 무릎을 꿇는다.
“히스, 일어나.”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소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히스, 손.”
착.
그러자 히스의 손이 내 작은 손바닥 위에 냉큼 올라온다.
“…이거 아크레아의 셉터 맞는 것 같네. 히스를 조종하던 그거.”
함선에서 발견했던 셉터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아크레아 왕가는 히스의 행동을 억제하는 아티팩트를 몇 개나 만들어 놓은 걸까.
“어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셉터를 파괴해야 하는 거야.”
히스에게는 무척 참혹했던 아크레아 역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셉터를 손에 든 채 붕붕방방 고개를 내젓는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자르파라가 들어선다.
“나의 태양이시여-!”
상단 일로 황도에 방문할 일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은 게 어제였는데 일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운 모양이었다.
“그간 무척 그리웠나이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새빨간 머리칼을 나풀나풀 휘날리며 내게 달려든 그녀가 나를 꼭 껴안은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빛을 쬐지 못해 죽어 가는 꽃의 심정을 절절하게 느꼈나이다~!”
자르파라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아크레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아크레아인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왕이었던 히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는데, 요즘은 날 더 찾는 것 같단 말이야.’
“수, 숨 막혀. 자르파라.”
“앗. 죄송합니다.”
잃어버린 보물이라도 되찾은 양 나를 꼭 끌어안았던 자르파라가 내 호소를 듣고 나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제야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히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왕께서도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인사했으면 나가. 나는 공녀와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저의 빛과 태양이신 아기님께 인사를 올린 참인데….”
히스의 축객령을 따르고 싶지 않은 건지 머뭇머뭇대던 자르파라의 눈이 내가 손에 든 셉터를 확인하고 휘둥그레 커진다.
“아크레아의 유물 아닙니까? 처음 보는 셉터인데요.”
“응. 역시 알아보네.”
“제가 아기님을 도와 유물을 유통하고 박물관을 운영한 지 이제 어언 5년 차 아니겠습니까.”
내 칭찬에 기뻐 죽겠다는 듯 얼굴을 붉힌 자르파라가 손을 뻗어 셉터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다.
“확실히 아크레아의 유물이긴 합니다만… 태양께서 지니고 계셨던 셉터와는 다른 아티팩트인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이 셉터를 이용해서 히스를 통제할 수 있는 것 같았어.”
“네? 어떻게요?”
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자르파라를 힐끔한 후 내 앞에 무감한 얼굴로 서 있는 히스를 돌아보았다.
“히스, 공중제비.”
휘익.
“히스, 이번에는 뒤로 공중제비!”
휘이익.
내 명령에 서커스 동물이 묘기라도 부리듯 소년은 허공에서 몸을 두 번씩이나 굴렀다.
“태양이시여, 이건 그냥 당신의 명을 왕께서 따르시는 것 같습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한 히스의 모습을 떨떠름한 눈으로 지켜보던 자르파라가 미간을 좁힌 채 말을 덧붙인다.
“왕께서 싫어하는 짓을 시켜 보시지요.”
“히스가 싫어하는 거?”
‘…히스가 뭘 싫어하더라.’
히스는 정말 어린 양처럼 순하고 착해서 눈에 띄게 싫어하는 것도 없는 애였다.
‘당근이나 먹일까?’
“아!”
잠시 고민하던 나는 셉터를 한 손에 쥔 채 히스의 회청안을 마주했다.
“나 안아 봐, 히스.”
히스는 유독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 했다.
‘다른 사람과 몸이 스치기라도 할까 봐 늘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걷는 것 같았어.’
내가 이동하기 위해 손을 잡거나 어깨를 붙잡을 때 흠칫흠칫 놀라던 걸 생각하면 나와의 접촉도 꺼리는 게 분명했다.
“응? 방금 자르파라가 안은 것처럼 안아 봐.”
갑자기 셉터가 작동을 멈추기라도 한 걸까.
다시금 명령했지만, 얼어붙은 히스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근데 귀는 왜 빨개졌지. 부작용인가.’
의아한 눈을 찡그리는 내게 삐걱삐걱 다가오는 히스의 움직임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제 말이 맞다니까요. 일전에 태양께서 발견하셨던 셉터와는 완전히 다른, 억!”
내게 다가온 히스는 셉터를 관찰하며 무어라 종알거리던 자르파라를 뒤로 휙 밀어 버렸다.
바닥에 철푸덕 넘어진 그녀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히스가 내게 엉거주춤 팔을 뻗는다.
“으음. 히스, 따르기 싫은 명령이면 따를 필요 없어.”
나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히스의 팔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셉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명령을 수행하는 데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네. 이거 불량품인가.’
어차피 히스를 조종하는 아티팩트라면 파괴해야 할 물건이니 불량품이어도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방금 한 명령은 취소야.”
셉터를 손바닥에 탁탁 내려치며 내가 입을 벌린 순간,
“……늦었습니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히스가 나를 확 끌어안는다.
‘음? 불량품 아닌 건가?’
나와 엇비슷하다고 생각했던 히스의 키는 생각보다 컸다.
‘날이 따뜻한데도 몸이 차갑네.’
남들보다 조금 서늘한 체온이 느껴져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아까 자르파라가 열어 둔 응접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힌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의 몸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보겠다며 한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있던 루카스였다.
저벅저벅 빠르게 다가온 그가 히스의 목덜미를 휙 잡아 뒤로 끌어당긴다.
“떨어져.”
그러나 히스가 나를 끌어안은 팔의 힘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나까지 그쪽으로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공녀에게서 떨어지라고.”
이내 루카스가 히스를 탈탈 흔드는 통에 내 몸까지 달달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인상을 찡그리며 루카스를 노려본 나는 셉터를 손에 쥔 채 내 정수리에 코를 박은 히스를 밀어냈다.
“히스, 이제 그만 안아도 돼.”
“…….”
“히스, 그만 안으라니까?”
명령을 반복했지만, 나를 꼭 안은 히스의 팔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셉터.”
기가 막혀 자신과 셉터를 번갈아 바라보는 나와 눈을 마주한 히스가 느릿느릿 입을 벌린다.
“불량품인 것 같습니다.”
변명하듯 작게 중얼거린 히스는 그 작은 몸으로 괴력을 발휘해 제 목덜미를 붙든 루카스를 떨쳐냈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뭔 소리야. 날 껴안고 지내겠다는 말이야?’
“밥은 어떻게 먹고 화장실은 어떻게 가고 잠은 어떻게 자려고?!”
“전 밥 안 먹고 화장실 안 가고 잠 안 자도 됩니다, 공녀.”
인간보다 병기에 가까운 히스다운 대답이었지만, 나는 아무리 방대한 마나를 지녔어도 육체의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너는 그래도 되겠지만 난 아니야!”
내가 질색하며 빽 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히스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다.
“놓으라니까!”
“못 놓겠습니다.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왜!”
“셉터가 불량품이라서.”
나는 히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손에 든 셉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니, 아까까지는 잘 작동하더니 왜 갑자기 말을 안 듣는 건데?’
“자르파라, 이 셉터 좀 고쳐 와. 제랄드에게 가져다주면 방법이 있을 거야.”
“불량품 따위가 아니라 애초에 왕을 조종하는 아티팩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태양이시여!”
떨어진 셉터를 주워 든 자르파라가 셉터를 장식한 보석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나와 히스를 돌아본다.
“이 아티팩트, 이제 기억이 납니다! 이건 두 개의 아티팩트를 합쳐서 강화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셉터입니다!”
자르파라의 말에 등 뒤에서 히스가 이를 부득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넌 도통 입을 다물 줄 모르는군.”
“입이 찢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게 아크레아인 아니겠습니까, 왕이시여! 이 셉터는 분명-! 어억!”
그 순간 히스가 무슨 수를 썼는지, 어디선가 휙 불어온 바람이 자르파라의 몸을 열린 창문 밖으로 떨궈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