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오늘이 첫날밤이야.”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눈을 깜박였다.
복잡했던 결혼식 예복을 벗어 버리고,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던 두터운 화장을 드디어 지우고, 깔끔하게 씻고 나서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곳에서 라일라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말끔하게 씻은 채로 침대에 모로 누운 비오스트였고, 그의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
비오스트가 여기 누워 있는 것은 당연했다. 둘이 함께 쓰는 부부 침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세어 본 것은 아니지만, 오늘이 첫 번째는 아닐 텐데?”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라일라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비오스트 또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라일라는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비오스트가 오늘이 첫날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동안 자신이 함께 잤던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플로랜스의 아버지는 또 누구란 말인가?
“아기를 나 혼자 만든 것은 아니잖아? 플로랜스의 아버지는 너고, 분명히 그 행위를 함께한…….”
“라일라.”
비오스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라일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비오스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인 라일라에게로 말이다.
그의 계획은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로맨틱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처음 라일라를 안았을 때는 거의 그녀를 속여서 함정에 빠트린 채였다. 게다가 필요에 의해서였다.
물론 라일라의 향기에 취해서 중간부터는 계획이고 뭐고 간에 미친 듯이 그녀를 원하게 되었고, 오직 그 순간만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마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플로랜스를 가져서, 혹은 플로랜스가 있어서 라일라와 깊은 밤은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과거는 잊고, 새로 출발하는 의미에서 오늘이 진정한 첫날밤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왜? 맞잖아?”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라일라가 그리 로맨틱한 여자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남자의 달콤한 말도, 로맨틱한 분위기도.
“내 말은, 라일라.”
하지만 그 점이 더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아는 남자라고는 오직 비오스트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앞으로 로맨틱이라는 것을 알려 줄 사람도, 오직 비오스트 한 명뿐이었다.
“오늘이 정식 부부로는 첫날밤이라는 거야.”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은 한 번도 사랑을 속삭여 준 적 없는 순결한 귀에 대고, 비오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일부러 라일라의 귓구멍 속에 제 숨을 불어넣은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라일라의 어깨가 움츠러들며, 목덜미의 작은 솜털들이 바싹 일어나는 것이 비오스트의 눈에 보이자 더욱 짜릿해져 왔다. 로맨틱에 경험이 없는 라일라는 이런 비오스트의 작은 행동에 즉각적인 반응을 해 왔다.
“부부가 첫날밤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비오스트는 여전히 라일라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아까보다 입술을 더욱 바싹 붙이면서 말이다.
간지러운 것인지, 아니면 다른 느낌을 느끼는 것인지 라일라의 한쪽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며, 비오스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럴 수야 없지.’
비오스트는 얼른 라일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동시에 라일라의 귀를 덥석 물어 버렸다.
“흐읏!”
불의의 기습을 당한 라일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며, 비오스트가 안고 있는 라일라의 허리가 살짝 떨려 왔다. 그건 비오스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라일라가 하기에는 별로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신음과 그녀의 떨림이 비오스트를 더욱 달아오르게 했으니까.
그는 더욱 집요하게 라일라의 귓바퀴를 핥아 올리고, 귓불을 깨물고, 귓구멍 안으로 혀를 들이밀었다. 비오스트의 혀와 이가 귀를 씹어 대는 촉각과 질척거리는 청각이 동시에 라일라를 덮쳐 왔다.
“자, 자, 잠깐만.”
닭살이 오스스 돋아나며, 배꼽 아래에서 찌릿한 감각이 라일라를 찔러 대자, 순식간에 숨이 차올랐다.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내뱉지 못하고 있던 숨을 토해 내며 비오스트에게 잠깐만이라고 소리쳤다.
“안 돼.”
거절의 말마저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마침표는 단단한 혀로 라일라의 귀 안에다 찍어 주었다.
“난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오래 참았어.”
비오스트는 그대로 라일라의 엉덩이를 받치고 들어 올렸다. 엉겁결에 두 다리가 공중에 들어 올려진 라일라는 양손을 비오스트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것도 비오스트를 떨치려는 데에는 아주 나쁜 행동이었다.
조금 전 비오스트의 키스를 받아 촉촉해진 라일라의 눈이 그를 쳐다보자, 비오스트는 더욱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라일라가 무슨 행동을 해도 비오스트는 전부 달아오를 게 틀림없었다.
그가 라일라의 몸을 위해서 인내하기로 한 날이 바로 어제까지였으며, 오늘은 인내 끝에 다디단 열매를 먹어 치우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그는 라일라가 방에 오기 전에 이미 피임약까지 먹은 참이었다.
비오스트가 직접 그것을 먹은 이유는 첫 번째는 당연히 더 아이를 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라일라에게 피임약을 먹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임약에 따른 약간의 부작용은 자신이 감수하면 되는 일이었고, 라일라가 그런 것에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난 더는 참지 않을 거야.”
비오스트의 눈빛에서 그가 무엇을 더 참지 않을 거고, 방금 그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리라는 것을 라일라는 알아냈다.
그리고 동시에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더러 참으라고 한 사람 없어.”
라일라는 고개를 내렸다. 라일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비오스트의 얼굴을 감싸듯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입술은 곧바로 그의 입술에 가서 닿았다.
“난 그냥 잠깐만이라고 했을 뿐이야.”
입술과 입술이 닿은 채, 뭉그러진 발음으로 라일라가 속삭였다.
라일라가 잠깐만이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잠깐만이었다. 그 뒤에는 다시 시작하는 게 옳았다.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멈췄던 것을 스스로 다시 시작했다.
라일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라일라의 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두 혀가 격정적으로 얽히었다.
라일라가 비오스트의 머리와 목을 감싸 안으며 조금이라도 더 밀착하려는 듯이 그를 끌어당기자, 비오스트 역시 라일라의 엉덩이를 꽉 붙들어 자신의 배와 라일라의 배가 붙게 했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격렬하게 탐했다.
라일라의 작은 입술을 비오스트가 물어뜯듯이 삼키자, 라일라의 손이 그를 더욱 꽉 붙들며 적극적으로 그의 안으로 제 혀를 들이밀었다.
비오스트는 그것마저도 기꺼이 삼켰다. 라일라의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깊게 들이마시자, 그녀의 목구멍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에 비오스트는 더욱 라일라의 엉덩이를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여기서 더 밀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저 키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둘은 동시에 깨달았다.
비오스트의 말이 맞았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하아…… 하아…….”
“후…….”
붙어 있던 입술이 겨우 떨어지고, 달라붙은 몸이 겨우 떨어진 것은 거의 쓰러지듯이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였다.
거칠고 더운 숨이 두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방 안의 온도가 높아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벽난로가 활활 타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비오스트.”
라일라의 손이 자신의 위에 드리워진 그의 몸을 향했다. 재회했을 때, 조금 야위어 보였던 비오스트의 몸은 다시 이전처럼 조각상처럼 든든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라일라의 손이 비오스트의 셔츠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벗겨 내자 그의 오른 어깨와 팔에 걸쳐서 남겨진 커다란 상처는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것이 선황에게 맞선 흔적임을, 라일라를 구해 내는 과정 중의 하나로 생긴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라일라의 손이 그 상처를 더듬었다.
“왜? 흉측해?”
결코 보기 좋을 리 없는 흉터를 라일라가 매만지자, 비오스트는 물었다.
“넌?”
라일라는 도로 그에게 물었다.
“넌 그렇게 생각해?”
주어는 없었지만, 비오스트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 라일라가 매만지는 것처럼, 자신이 매만지곤 했던 라일라 배에 있는 상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전혀.”
비오스트의 손이 라일라의 옷을 들치며 말했다.
라일라가 말했던, 비오스트가 말했던, 그 상처가 라일라의 배에서 보였다.
“그보다는 난…… 미안하지. 너에게.”
그리고 눈에 보이게 된 그 상처에 손을 얹었다.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라일라를 발견해 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고, 그녀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그녀를 위해서 살기로 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비오스트는 오직 라일라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나도.”
라일라는 조용히 비오스트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무사해 준 것이 고맙고.”
“나도.”
매끈한 라일라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비오스트가 말하자, 라일라는 그 말에도 동의했다.
그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라일라도 죽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플로랜스를 낳다가 죽었든가, 그게 아니라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든가.
만약, 비오스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더욱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라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오두막에서 외롭게 혼자 죽어 갔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걸림돌이 된다고 발렌시아 가문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든가, 마을 사람들에게 화형을 당했든가.
자신을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내어 준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비오스트였다.
그러니 라일라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네 몸에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사랑스러워.”
살짝 미소 지으며 비오스트가 말했다.
“……나도.”
그리고 라일라 역시 살짝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웃으며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어쩌면 상처받고,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아나 흉터가 되는 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그런 미소를 가지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