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6화 (86/88)

86.

그날이 되었다.

미래 재무대신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온라이언 제국 사상 유례없는 3개의 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단 3주 만에 기획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웅장하며,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가히 완벽한 날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날이기도 했다.

황궁의 가장 큰 홀을 가득 메운 온라이언의 귀족들은 새로운 황제를 칭송했다. 비오스트의 머리 위에 황관이 올려진 순간은 그야말로 홀이 떠나갈 듯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로운 황제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황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결혼이었다.

“흐음…….”

일찍이 비오스트가 황태자이던 시절, 딸을 황태자비로 올리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던 후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는 그를 몇몇 귀족은 힐끗거리며 쳐다보았지만,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곳을 쳐다보며 그를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새로운 황제가 저 여자를 끔찍이도 아낀다는 소문이 이미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오늘의 식들을 주관한 재무대신 내정자가 대관식보다 결혼식을 더욱 우선시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과연…….”

긴 베일을 드리운 가녀린 신부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신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였다. 드레스뿐만이 아니라 구두, 액세서리, 부케 등 그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러했다. 모든 것이 제국의 최고급품이었으며, 더없이 화려했다.

“폐하께서 어찌나 총애하시는지, 벌써 아이가 있으시다죠?”

호사가인 백작 부인은 부채로 제 입을 가린 채, 옆에 선 자작 부인에게 말을 했다. 비싼 공작의 꽁지깃이 그녀의 머리 장식에서 하늘거리며 저쪽 앞에서 유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검은 머리카락의 아기는 유모의 품에 안겨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의 태생에 약간의 의심의 말을 내뱉은 전 재무대신이 그 자리에서 당장 파직을 당한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이미 다 아는 사실인지라 그녀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네. 거기다가 날짜가 이렇게 된 것도 폐하께서 하루도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속히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서두르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백작 부인 못지않은 호사가였던 자작 부인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소곤거렸다. 거기까지는 미처 몰랐던 백작 부인은 얼른 그 정보를 자신의 머릿속에 새겼다.

하지만 그러고 나자 뭔가 자신이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워들었던 다른 소문이 없나 싶어서 제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건 들으셨어요?”

그리고 드디어 찾아낸 정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자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는 그녀를 보자 왠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졌다.

“곧 황태자 책봉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머! 어머! 어머!”

놀란 눈을 한 자작 부인을 보자,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두 번째로 짜릿함이 느껴졌다. 바로 이 맛에 정보를 모으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직 목도 못 가누시지 않나요?”

자작 부인의 시선이 저절로 앞쪽을 향했다. 황제와 황후의 아기라고 알려진, 대대로 황실의 유모로 고용된다는 여자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기 위함이었다.

“목은 무슨요. 옹알이도 아직이라고 하시는데요.”

“그런데도 황태자에 책봉하신다고 하셨다고요?”

“그렇답니다!”

“세상에! 정말 엄청난 총애를 받고 계시는군요.”

자작 부인은 정말 부럽다는 눈으로 천천히 입장하고 있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분의 사랑을 받고 계시다니 저분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아니, 꼭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이 아니라도 좋았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라도 좋으니 자신을 저렇게 끔찍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황홀한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전 이미 황후 폐하께 축하선물을 보내 드렸답니다.”

그녀의 상상이 순식간에 깨진 것은 조용히 옆에서 끼어든 후작부인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후작부인이 보였다.

역시나! 고위 귀족은 이래서 다른 것이었다. 벌써 황후에게 잘 보이려고 선물을 보냈다니!

그녀는 오늘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황후 폐하께 축하선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싸고 좋은 것으로!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서 그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즉시, 황후 폐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할 비싸고 좋은 선물을 자신이 하고 말리라고.

아직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고, 황후 책봉식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이미 라일라는 황후 폐하였다.

그것도 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라일라.”

라일라가 무사히 비오스트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오자,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라일라 역시 어제 연습한 대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자연스럽게 얹었다.

그리고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다시 몇 걸음을 걸어 신관의 앞에 섰다.

“괜찮아?”

신관이 무슨 말을 하기 전, 비오스트가 작게 라일라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잡은 라일라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 걱정되어서였다.

괜찮다는 듯이 라일라의 베일이 살짝 아래위로 흔들렸지만, 사실 지금의 라일라는 그리 괜찮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손에 돌을 들고 있지 않고, 또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라일라에게는 너무나 긴장되는 일이었고, 무서운 일이었다. 당장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손이 벌벌 떨릴 만큼 긴장했으면서도 라일라가 도망치지 않은 것은 지금 제 손을 잡은 비오스트 때문이었다.

이 길을 무사히 걸어야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라일라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이 다리가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지만 걸었다.

또 이 시간을 무사히 견뎌야 플로랜스가 비오스트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기꺼이 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비오스트와 플로랜스.

이 두 명을 위해서라면 라일라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라일라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비오스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러자 라일라의 떨림이 조금 멎었다.

비오스트가 옆에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거룩하신 신의 이름으로 비오스트 블랙 드 온라이언과 라일라 비올렛 드 발렌시아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신관이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라일라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에 울릴 뿐이었다.

비오스트 블랙 드 온라이언과 라일라 비올렛 드 발렌시아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라일라.”

멍하니 황홀한 그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는 라일라를 비오스트가 불렀다.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자, 베일 너머로 그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의 신부.”

그의 손이 라일라의 양쪽 어깨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려세웠다.

“나의 아내.”

이어 비오스트는 길게 드리워져 있던 라일라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처음으로 공개된 황후의 얼굴 덕분에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지만,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는 비오스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변화가 있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던 비오스트의 표정은 이제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생명.”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나풀거리는 라일라의 드레스 레이스에 비오스트의 정복이 닿았다.

그리고 비오스트의 손이 라일라의 뺨에 닿았다.

“나의 사랑.”

비오스트의 얼굴이 라일라에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입술이 라일라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게 비오스트의 입술이 라일라의 입술을 짓누르고, 이내 다정하게 그 입술을 머금었다.

언제나 하던 키스와는 조금 달랐다.

채워도 채워도 모자랐던 욕망의 키스와는 다른, 온화하고 다정한 키스였다. 어쩐지 입술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라일라가 그것을 온전히 느끼며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웃고 있는 비오스트의 얼굴이었다.

“나의 영원한 사랑.”

닿을 듯 말 듯, 입술과 입술이 살짝 스치며 비오스트는 속삭였다. 마지막 그 말은 오직 라일라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오직 그녀를 위한 사랑의 맹세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오스트.”

라일라가 입을 열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비오스트의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나의 영원한 사랑.”

라일라의 마지막 말 또한 비오스트만이 들을 수 있었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와 그것을 말한 입술, 그리고 그 순간의 숨결은 오직 신랑과 신부 둘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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