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41화 (41/88)

41.

“비오스트!”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르미에르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분명 황태자궁에 들를 시간도 없이 바쁘다고 들었던 비오스트는 책상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즘 자주 뵙는 것 같네요, 숙부님.”

그 숙부님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비오스트는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아이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와 르미에르가 그를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위로 끌어 올려져 있던 비오스트 입가의 미소가 삐뚜름하게 변했다.

“그 아이라니요?”

“발렌시아 영애 말이다.”

“라일라를 만나셨습니까?”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셈이지?”

“제가 분명 숙부님께 라일라는 제 것이니 가만히 내버려 두시라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적어도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면, 네가 그 아이를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라일라의 머리카락 한 올부터 새끼발가락의 거스러미 하나까지도 전부 제 것이고, 제가 책임질 것이니, 숙부님께서는 관여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책임진다는 것이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그 아이를 황태자궁에 처박아 두는 것이냐?”

“정말 라일라를 만난 겁니까?”

“비오스트!”

“숙부님.”

서로 제 할 말만을 하며 언성을 높이던 두 사람의 사이에는 날 선 싸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체면치레 같은 웃음도, 가식적인 예의도 없었다.

그저 서로에 대해 몰이해와 적대감, 그리고 비난만이 가득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 마지막 순간에 편히 눈을 감게 해 줘야 할 것 아니냐?”

“아!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요. 따뜻하게 대해 주면 라일라가 죽는 순간에 아주 편안하군요? 배 속의 괴물에게 기를 쪽쪽 빨려서 말라 죽어 가는 과정에 그런 요령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비오스트!”

“정말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숙부님.”

비오스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르미에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마지막 경고라고, 이 경고를 무시하면 제아무리 피를 나눈 혈족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매서움이었다.

“라일라는 제 것입니다. 제가 찾아냈고, 제가 품었고, 제 씨를 가졌고, 제 아이를 낳을 제 여자입니다.”

르미에르와 똑같은 황금색의 눈에서 독이 뚝뚝 흘러내렸고 라일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오스트의 목소리에서는 집착이 끈질기게 묻어 나왔다.

그 누구라도 제 여자를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제가 가진 독으로 상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은 사나운 이를 드러냈다.

“비오스트.”

르미에르는 마치 사나운 짐승과도 같은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어떻게든 그것을 길들여 보고자 하는 조련사처럼.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후계자와 황위에 대해서 욕심을 품게 된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시절 넌 그렇게 욕심 많은 아이가 아니었어. 플로라를 닮은, 착한 아이였지.”

“…….”

“네 아비가 너에게 냉정하다고 속상해하고, 내게 와서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눈물을 보이던 그런 착한 아이였다.”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는 착하고, 순진한 법이죠.”

“아니. 네가 변한 건 그날 이후부터지. 황태자 책봉식 후, 형님께서 너를 따로 불러 독대를 한 뒤부터였다.”

십여 년 전의 일을 르미에르는 끄집어내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날 이후로 넌 변했어.”

“그 옛날 일이 갑자기 왜 궁금하신 겁니까?”

“갑자기가 아니야. 늘 궁금했다. 네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언제부터였을까를 항상 생각했었지. 최근에 난 그 시작이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해 봐. 형님이 대체 네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니, 그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별것 아닙니다. 큰 비밀도 아니지요.”

“별것 아니라면 내게 말해 줄 수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비오스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라일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때와는 달리 한결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숙부님께서도 이미 다 아는 것을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온라이언 황가가 왜 신의 축복받았다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그 축복된 힘을 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버님께 직접 전수받았지요.”

“변신을 그때 배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네 황태자 책봉식이라면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일 텐데?”

“아버님께서는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하셨지요.”

싱긋 지은 비오스트의 미소가 말하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가 더 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하셨지요.”

“뭐? 그럼…….”

“네. 숙부께서 늘 말씀하셨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내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들었지요. 그 이전에 더러운 냄새가 나는 여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하고, 그래서 자존감이 낮아진 여자를 어떻게 꾀어내야 하고, 마음을 얻고 나서는 그 여자에게 밤낮으로 그 짓을 해서 어떻게든 내 씨를 품게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아주 자세히 알려 주셨지요.”

“혀, 형님께서 어린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르미에르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열여섯이었다. 그조차 너무 빠르다고 아버님께서는 알려 주지 않으려 했다.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힘들다고 하면서.

하지만 당시 황태자비 후보로 궁에 들어와 있던 플로라에 대한 르미에르의 연심을 알게 되자, 그녀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 결국 알려 주었다.

자신이 어머니의 생명력을 잡고 먹고 태어난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플로라는 그런 괴물을 낳을 운명의 여자라는 것을.

알 것 다 아는 열여섯의 르미에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사실을 그것보다 훨씬 어렸던 비오스트에게 자신의 형이 이야기했다는 것에 르미에르는 경악했다.

“황제께선, 그때부터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형이 자신의 아들에게 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르미에르를 보며 비오스트가 대신 대답했다.

“웃기지 않습니까? 그렇게 혈통과 핏줄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 피를 토하는 폐병이라니요.”

자신의 아버지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비오스트는 빙그레 웃었다.

“형님이 최근 발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그게 예전부터 그랬다는 것이냐?”

“네. 꽤 오래되셨습니다. 최근에는 그걸 숨기지 못할 만큼 잦아지셔서 알려진 것이지요.”

“그럼 최근 네가 형님 대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냐?”

“네. 그분께서 명하신 일을 제가 훌륭히 해냈으니까요.”

그 명하신 일이 무엇인지는 비오스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르미에르는 알 수 있었다. 라일라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비오스트. 더더욱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니었느냐? 황공한 말이지만 형님께서 돌아가시면 자연히 네가 황위를 이어받게 될 것인데, 그렇게 서둘러서 라일라에게…….”

“숙부님께서는 그렇게 오래 아버님을 봐 왔는데, 아직도 그분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르미에르의 무지를 꾸짖는 듯한 말투로 비오스트는 말했다. 답답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내거신 조건이었습니다. 교환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와 황위를 교환하기로.”

“그 조건을 만족하지 않아도 시간은 네 편이었을 텐데?”

“아닙니다. 시간은 제 편이 아니었어요. 핏줄에 광증이 있는 미친 황제께서는 제가 과연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을까 걱정해서 다른 후계자를 더 만들어 두려고 했습니다. 전국에 냄새와 관련된 처녀를 모조리 잡아들여 지하에 가두고 전부 취하려고 하셨답니다. 그게 열이든, 백이든, 수천이든 말입니다.”

처음 듣는 제 형의 계획에 르미에르는 입을 벌렸다.

그의 황위에 대한 집착이나 온라이언 혈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집착과 자부심을 넘어 광증에 까지 이르렀는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놀라신 것 같군요, 숙부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가능합니다. 마녀사냥이라는 아주 편리한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악취가 나는 여자는 대게 마녀 취급을 받기 마련이죠. 과거의 플로라나 현재의 라일라나. 흠……. 그러고 보니 이름이 비슷하군요. 이름 역시 운명일까요?”

생각하지 못했던 공통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오스트가 말했다.

“어쨌든, 저는 저랑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동생이 제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차피 후계자 생산은 황족의 의무이니 조금 서둘러서 그 의무를 이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니냐? 그 애의 죄라면 그저 너를 사랑하는 것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자신이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데. 라일라는 자신의 운명대로 살고, 저는 제 운명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황위에 오른다 한들 행복할 것 같아? 당장 네 아버지를 봐. 플로라를 죽이고, 너를 낳고,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행복한 것 같아? 네 아버지가 정녕 행복한 것 같으냐고!”

“사람이 어떻게 일신의 행복만 추구하고 살겠습니까?”

“뭐?”

“저는 더 큰 것을 위해 삽니다. 행복, 기쁨, 사랑 그따위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이요.”

그 말을 내뱉은 비오스트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에 르미에르는 깨달았다. 더는 비오스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비오스트는 변하지 않을 것임을.

“정말로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숙부님.”

르미에르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비오스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일라는 제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면,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어 르미에르를 베어 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비오스트가 말했다. 그의 안에서 플로라는 이제 그림자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르미에르가 사랑했던 여자의 흔적이 이제 아무 곳에도 없었다. 제 앞에 있는 것은 그저 권력에 미쳐 양심을 버린 비열한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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