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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꽃-40화 (40/88)

40.

이름이 뭐였더라? 라일라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대공이라는 것, 그리고 비오스트의 숙부라는 것이 기억이 났다. 또한, 배 속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라일라가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르미에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는 잔뜩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인사를 한 뒤에는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표정이 굳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 오랜만이군.”

이대로는 라일라가 밖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르미에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가 경계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라일라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 상냥한 미소에 라일라의 경계심이 한풀 꺾이며, 긴장해서 솟아 있던 어깨가 긴장을 풀며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책을 좋아하나 보지?”

“아……. 그냥…….”

책을 읽게 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일라는 거짓말도 못 하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책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정리?”

라일라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이 르미에르는 되물었다. 황태자인 비오스트가 본궁에서 기거하게 된 지는 꽤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황태자궁에 청소를 할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황태자비가 될, 게다가 배 속에 미래의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될 아이를 품고 있는 라일라가 이런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르미에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자청했어요. 제 밥값을 하고 싶어서요.”

르미에르의 눈빛을 읽어낸 라일라가 재빨리 말했다. 비오스트가 자신을 부려 먹으려 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임산부는 안정을 취해야지,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켜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높은 곳은 오르지 않을 거고, 또 조심해서 할 거예요.”

라일라는 세실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제가 임신을 한 줄 어떻게 아셨어요?”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 라일라를 보며 단번에 그것을 알아맞힌 르미에르가 신기하다는 듯이 라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아! 비오스트가 이야기했겠군요. 그의 숙부라고 하셨으니까요.”

르미에르가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답을 찾아낸 라일라는 제 물음에 제가 답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마치 자신이 비오스트와 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르미에르가 알게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사 말을 했더라도 라일라가 상상하는 것처럼 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며 수줍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라일라보다 잘 알고 있는 르미에르는 쓰게 웃었다. 제 조카는 자신이 알던 그 착한 아이가 더는 아니었다.

르미에르가 라일라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지금 라일라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그저 은은한 그녀 고유의 체향이었다. 온라이언의 혈통인 자신을 유혹하는 향을 강렬하게 내뿜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성을 유혹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그 향 때문에 르미에르는 알 수 있었다.

라일라가 이미 비오스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비슷해. 비오스트가 알려 줬지.”

차마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르미에르는 에둘러서 말을 했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예전에 내가 아는 어떤 여인은 임신했을 적에 포도를 즐겨 먹었었지.”

“괜찮아요. 처음에는 조금 그랬지만 지금은 아무거나 잘 먹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오고요.”

“다행이군.”

르미에르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다음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라일라가 걱정되어 찾은 르미에르였지만, 그녀에게 뭐라고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네가 사랑에 빠진 놈은 사실은 널 사랑하지 않으며, 아주 비열하고 잔인한 남자라고, 그러니 너는 아이를 낳지 않고 도망쳐야 한다고 말을 한다면, 과연 라일라가 믿을까?

아니. 믿지 않을 것이다.

비오스트가 아는 것은 르미에르도 모두 알고 있었다.

소위 신의 아이라고 불리는 온라이언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는 여자가 온몸과 마음을 열어야만 가능했다. 제 목숨만큼이나 그를 사랑해야만, 혹은 그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온라이언의 씨가 여자의 태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마치 여인이 제 배 속에 생긴 아기를 거부하여 낙태하거나, 수치심에 자살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신의 아이라고 불리는 족속이면서 참으로 치졸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러니 임신한 라일라는 제 목숨만큼이나 비오스트를, 제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르미에르가 사실을 말한다 해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리라.

그 옛날, 플로라가 그랬듯이.

“비오스트는 어디에 있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 가벼운 말투로 르미에르는 물었다.

“본궁에 있어요. 아마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군. 그럼 혹시 결혼식은 언제지? 나도 참석해야 하니 미리 날짜를 알고 싶군.”

조만간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배가 불러오기 전에 해야 할 테니까.

“어…….”

하지만 르미에르의 짐작과는 달리 라일라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가?”

“네.”

“하지만 너무 늦으면 드레스를 선택하기 곤란하지 않을까?”

“어…….”

라일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프러포즈는 받았겠지?”

“아, 네!”

비로소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르미에르의 눈은 재빨리 라일라의 손을 훑었다.

반지가 없었다.

이전보다는 조금 살이 올랐지만, 여전히 마른 손가락에는 보석은커녕 실반지 하나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설마……?’

르미에르의 머릿속에 의혹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바빠서일 거예요.”

복잡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던 르미에르를 말리듯, 라일라가 말했다.

“지금 아주 바쁘다고 했거든요. 황태자궁에 오지도 못할 만큼요.”

“아……. 그렇군.”

르미에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아무리 비오스트가 바쁘다고 하더라도 황태자궁에 오지도 못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쯤이야 알았다.

비오스트가 지금 하는 일은, 르미에르가 제1 황위계승자이던 시절 했던 일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저 보다 잘났으면 잘났지 못하지 않은 제 조카가 그것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르미에르는 잘 알고 있었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다. 비오스트는 제 아이를 밴 라일라를 이제 쓸모가 다하였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처박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라일라는 모르는 진실을 르미에르는 단 10분 만에 모두 깨달아 버렸다.

‘비오스트! 네가 아무리 변했다지만!’

악랄한 제 조카의 행보에 르미에르는 저절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비오스트가 원해서 임신한 아이였고, 이제 채 8개월도 살지 못할 라일라를 이렇게 취급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한 일이었다.

“조금 이따 본궁에 가서 비오스트를 만나 볼 생각인데, 혹시 전할 말이라도 있으면 내가 전해 주도록 하지.”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르미에르는 라일라에게 물었다.

“아!”

비오스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좋은 것일까?

라일라는 르미에르의 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눈을 깜박였다.

“어…… 저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보고 싶다고?

‘말도 안 돼!’

라일라는 속으로 저 혼자 비명을 질렀다. 그런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한 번 오라고 할까?

‘그거나 보고 싶다나 뭐가 달라! 이 멍청아!’

라일라는 다시 자신을 꾸짖었다.

너무 급작스러웠다. 단어가 머릿속에서 엉키고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음…….”

“천천히 생각해.”

다행히 시간은 아주 많다는 듯이 눈앞의 르미에르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순간, 시간이 그렇게 많으면 비오스트 대신 일을 좀 해 주면 안 되냐는 말이 불쑥 라일라의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면 비오스트가 시간이 좀 날 테고, 그러면 황태자궁에 올 수도 있을 거고, 그러면 얼굴을 좀 볼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배 속의 아기도 아주 잘 자라고 있다고 말도 해 줄 수 있을 텐데!

아니다, 아니다. 비오스트는 아주 중요한 일 중일 거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다른 사람은 못 하는 일.

그래서 아주 바쁜 것일 테니까, 아무리 같은 황족이라고 해도 르미에르가 대신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그럼, 비오스트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마침내 할 말을 정하고, 라일라는 눈앞에 있는 르미에르를 바라보았다.

말하라는 듯, 르미에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수줍게, 라일라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라일라의 말을, 그녀의 수줍음을 이해하지 못한 르미에르가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비오스트는 알 거예요.”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안다는 건가?”

“네.”

라일라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남들은 알아듣지 못할 둘만의 암호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듯이 라일라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추운 새벽녘, 어두운 하늘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은 미소였다. 처음에는 그저 보일 듯 말 듯, 실금 같은 빛으로 시작한 미소는 점점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대지의 어둠을 밀어내며 떠올랐다.

그리고 따스한 햇볕이 온 대지를 비추듯, 라일라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라일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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