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37화 (37/88)

37.

작고 여윈 어깨였다.

비오스트는 어젯밤 자신이 안아 주었던 그 라일라의 어깨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청혼하자 파르르 떨리던 것도 기억해 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라일라를 찾아낸 것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비오스트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비오스트는 의심하지 않았다. 라일라는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로 인하여 자신은 황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라일라는 죽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거울 속에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향해서 비오스트는 말했다. 그의 말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틀렸다는 듯이.

“정신 차려. 네 목적을 잊지 마.”

일부러 험악한 인상을 지어 비오스트는 그 남자를 겁박했다.

여자에게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그녀를 가엾게 여기려는 거울 속 남자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연민의 싹을 잘라 내기 위해서였다.

“넌 짐승이야. 사람이 아니야.”

최면처럼 비오스트는 중얼거렸다.

“아니, 너는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자꾸만 슬픈 눈빛을 하는 거울 속 남자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 비오스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라일라가 보고 싶었다.

그 작은 몸을 탐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허기진 욕구를 채우기에 바빠서 자신의 목적도, 운명도 잊을 수 있었다.

모든 행위가 끝나고 나면 그 작고 여윈 몸에 제 몸을 기대었다. 그러면 탈진한 듯 축 늘어져 있던 빼빼 마른 손이 비오스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당연히 비오스트의 몸을 다 감싸지도 못했고, 여윈 몸은 포근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이 비오스트를 감싸 안고 있을 때면, 기이한 충족감이 들었다.

절정일 때와는 다른 은은한 라일라의 꽃내음이 비오스트의 코를 간질이고, 목덜미와 쇄골에서는 새근거리는 숨결이, 피부에서는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 상태로 천천히 눈을 감으면,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이 들면, 악몽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그녀가 죽고 나면, 다시는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어.”

그녀가 죽고 나면, 비오스트의 악몽 목록이 더 추가될 것이다.

“어쩔 수 없어.”

허망한 목소리가 거울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 * *

“!!”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일라는 황급히 보고 있던 뭔가를 후다닥 숨겼다. 문을 열어 주었던 세실은 그런 라일라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지 못한 때에 왔나요?”

비오스트는 도로 나갈까? 라고 묻는 듯,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런 건 아니야. 점심시간에 맞춰서 온 거잖아.”

보고 있던 것을 등 뒤에 숨긴 채, 라일라는 말했다. 비오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앞에 앉을 때까지도 라일라는 그대로 손을 뒤로 한 채였다.

“그런데 그런 자세로는 점심을 먹지 못할 것 같은데요?”

“뭐?”

“밥은 손이 있어야 먹죠.”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조금 당황하다가 손을 움찔거렸다. 어떻게 해도 지금 숨긴 것을 갑자기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 라일라는 주춤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놓았다.

“이건?”

라일라가 보고 있었던 책을 보며, 비오스트는 살짝 놀랐다. 그것은 자신이 아주 어릴 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알파벳 책이었다.

아마도 하루 정도, 그게 아니면 이틀 정도 보았던 책이니 기억이 나지 않을 법도 했지만, 비오스트가 보았던 최초의 책이니만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 태교 중이었나요? 벌써 알파벳을 가르쳐 주기에는 빠르지 않나요?”

비오스트는 농담을 건네며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빨개진 라일라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농담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태교가 아니라, 내가 공부하는 거야.”

붉어진 얼굴의 라일라가 비오스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라일라의 말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비오스트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말문이 막혔다. 적국의 외교단과의 기 싸움에서도 막힌 적이 없었고, 우호국의 공주가 대놓고 하는 유혹에도 물 흐르듯이 상황을 넘겼던 그가 라일라의 실토에 그만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글을, 지금 배우는 건가요?”

“그래.”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서서히 분노가 끓어올랐다. 물론, 라일라가 자신에게 그런 말투로 대답을 했다고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작 영애가 스물이 넘도록 글도 모르게 방치한 발렌시아 남작가 놈들에 대한 분노였다.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아무도 없는 숲속 오두막에 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였다.

‘개새끼들.’

라일라의 오두막이 불타 버렸듯이, 발렌시아 남작의 저택을 불태워 준 것만으로 부족했었다. 귀를 잘라 내고, 눈을 멀게 만들었어야 했다. 혀도 잘라 냈어야 했다.

어린애를 학대한 그것들은 그래도 쌌다.

“뭐! 내가 글자를 모르는 게 그렇게 어이없어?”

비오스트가 말이 없어진 것이 어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한 라일라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아뇨, 라일라.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에요.”

비오스트는 부디 방금 자신의 얼굴에서 살기가 나오지 않았기를 바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내가 글도 모르는 바보인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태어날 아기도 바보로 만들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이라도 글을 배워서, 우리 아기는 빨리 글을 알려 줄 거야.”

“…….”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기가 태어나면, 라일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라일라가 아무리 글을 배우더라도 그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를 학대하는 개새끼들이라고? 눈을 멀게 하고, 혀를 잘라 내야 한다고?

누가 할 소리! 라일라를 가장 학대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를 속이고, 목숨을 빼앗을 사람은 바로 비오스트였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퉁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일라를 향해서 비오스트는 말했다.

너무도 쉽게 자신의 꾐에 빠지는 라일라를 보며 비웃었던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순진함은 죄가 아니었다.

“당신을 내버려 둔 그 사람들이 바보죠.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몰라보고요.”

조용히 비오스트는 책을 든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잠시 흠칫했던 작고 여윈 손은 조용히 책을 놓고,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겼다.

작은 손을 잡은 비오스트는 그대로 그것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라일라의 손등에 비오스트는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다정하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라일라의 아픈 과거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손톱이 많이 자랐네요.”

비오스트의 말대로 아플 정도로 바싹 깎여 있던 라일라의 손톱은 제법 자라 있었다. 게다가 물어뜯은 흔적도 없이 깔끔하고 가지런했다.

이곳에 와서는 라일라가 초조해할 일도, 곤란해할 일도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달라진 것은 손톱만이 아니었다. 거칠었던 손은 매끈해져 있었고, 잘 먹지 못해서 뼈가 도드라져 있던 손 역시 이제는 제법 살이 올라 있었다.

문득, 비오스트가 고개를 들어 라일라를 보자 살짝 홍조를 띤 뺨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잔뜩 경계를 하는 길고양이 같았던 푸른 눈이 지금은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그저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더는 길고양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사람의 손에 길이 들어 버린 고양이의 눈빛이었다.

라일라를 길들인 것은 먹이나 물이 아니었다. 애정이었다.

“라일라.”

이름만 불렀는데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치 제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주는 먹이에 독이 섞여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맛있게 먹었다. 저를 길들인 사람이 주는 것이 애정이 아니라는 것을 저 순진한 고양이는 몰랐다.

“내가 조금 바빠질 것 같아요.”

“그래?”

“네. 그래서 지금처럼 자주 오지는 못할 것 같네요.”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가 눈에 띄게 풀이 죽는 것이 보였다.

“잘됐네. 네가 안 오면 나도 공부할 시간이 많아서 좋아.”

눈으로는 섭섭하다는 빛을 숨기지 못했지만, 입으로는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바빠도, 밥은 먹으면서 바쁜 것 아닌가?”

조금 전까지 큰소리를 쳤던 입이 슬그머니 다른 소리를 했다. 그야말로 의중이 훤히 보이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밥은 먹을 테니, 그때는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네. 밥은 먹죠. 하지만 업무가 바쁘다 보니 일부러 황태자궁에 들러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업무를 보는 본궁에서 먹을 것 같네요.”

“아…….”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비오스트의 대답에 라일라는 자기도 모르게 김빠진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 나, 난 상관없어. 일이나 열심히 해!”

라고 말하며 라일라는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런 라일라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 더는 보지 않는 게 낫겠어.’

그러면 더는 라일라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더는 저 작고 마른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양심의 가책도 지울 것이라고, 비오스트는 다짐했다.

그저 자신은 이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씨는 이미 뿌려졌고, 이제 자리기만 하면 되었다. 라일라의 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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