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36화 (36/88)

36.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초조한 기색의 중년의 사내를 보며 수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수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연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저 남자로부터 받은 천 실링을 다시 토해 내야 할 수도 있었다.

“분명 내 여식을 자연스럽게 황태자 전하께 소개시켜 주실 수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개라니요?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황태자 전하의 눈에 띌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게 그것 아닙니까!”

“엄연히 틀리지요. 소개라는 것은 제가 정식으로 전하께 딱딱한 격식을 갖춰서 통성명을 해 드려야 하는 방식이고, 자연스럽게 눈에 띌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전하께서 자연스럽게 따님을 발견하실 수 있게 만들어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리에게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전자라면 비오스트가 싸늘하게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게 될 것이었고, 후자라면 자신은 분명 자연스러운 자리를 마련하였으나 귀하의 따님께서 매력이 아주 조금 부족하셔서 황태자 전하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고 말하며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 자연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대체 언제 만들어 주실 겁니까? 벌써 약속하신 시일이 많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은 남자의 말이 맞았다. 수리가 약속한 그 자리는 황태자 전하께서 시골 어느 영지로 다녀오고 나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수리도 그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지 분명 계획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이미 받은 천 실링을 다시 토해 내야 했고, 약속을 지키고 나서 받기로 한 천 실링도 멀리 달아나 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게…….”

하지만 그 시골 영지에 가고선 상황이 변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 시골에서 찾고 있던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란 걸 어떻게 알았겠느냔 말이다.

이 남자를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이미 받은 천 실링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수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는 제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 기회를 미루는 수리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자리를 만들기 어렵군요.”

어쩔 수 없이 수리는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이제까지는 비오스트의 비위를 잘 맞춰 가며 쏠쏠한 부업을 이어갔던 수리였지만, 이제는 그게 불가능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수리는 최악을 경우를 대비해서 가지고 온 돈을 꺼내 놓았다. 제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다시 꺼내야 하자 수리는 아쉬워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되도록 돈을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귀족이었고, 사병도 제법 가지고 있었으며, 수리에게 이런 청탁을 할 만큼 그리 청렴한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화내는 걸 봐선 화를 참는 성격도 아니었다.

수리가 그냥 돈을 꿀꺽하고도 뒤탈이 없을 만큼 호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 아니! 아니! 시종님. 제가 시종님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언제인지가 궁금해서 그런 것입니다.”

분명히 재촉하던 남자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언제가 아주 힘들 것 같습니다.”

수리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다시 한번 제가 준비해 온 돈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천 실링은 정말로 아까웠지만, 라일라가 있는데 비오스트의 앞에 다른 여자를 들이밀었다간…….

천 실링은 분명 소중했다. 하지만 수리에겐 목숨이 더욱 소중했다.

* * *

나른했다. 졸렸다.

어제는 비오스트가 업무가 있다고 해서 분명 라일라 혼자 일찍 잠이 들었는데도 그랬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요즘은 계속 그런 것 같았다.

나른하고, 졸리고, 조금만 무언가를 해도 피곤한 기분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두막과는 달리 라일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라일라 아가씨, 점심을 가지고 왔어요.”

“응.”

창가에 앉아서, 햇볕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일라는 세실의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세실은 그런 라일라가 귀여워서 혼자서 살짝 웃었다.

잔뜩 발톱을 세우고 경계를 하던 길고양이에게 꾸준히 밥을 주고, 물을 주어, 드디어 고양이가 도망가지 않는 경지에 이른 기분이었다.

“오늘은 함박스테이크예요. 이전에 좋아하셨죠?”

“응. 그랬지.”

제 앞에 차려지는 접시를 보며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포크를 집어 든 순간이었다.

“윽!”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라일라가 고개를 뒤로 잡아 뺐다.

“어머, 왜 그러세요?”

“이상한 냄새가 나. 이거 상한 것 아니야?”

“이상한 냄새요?”

라일라의 말에 세실은 눈을 깜박였다. 이상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지금 세실의 코에서 맡아지는 냄새는 오로지 맛있게 익은 함박스테이크의 냄새뿐이었다. 달큼한 소스가 노릇하게 익은 고기와 함께 아주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그래?”

세실의 말에도 라일라는 미심쩍어하며 코를 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았다. 그러자 다시 뭔가 역한 냄새가 라일라의 코를 찔러 댔다.

“으윽!”

그 냄새를 맡은 순간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이 밀려들었다. 라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내달렸다.

“어머, 라일라 아가씨!”

놀란 세실이 라일라를 따라 욕실로 들어가자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헛구역질을 하는 라일라였다.

“괜찮으세요?”

가볍게 라일라의 등을 두드려 주며 세실이 묻자, 몇 번이나 더 헛구역질을 하고 나서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웩웩거리긴 했지만, 라일라가 뱉은 것이라곤 자신의 침밖에 없었다.

“체했나?”

라일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는 식욕이 없다고 과일 조금밖에 안 드셨잖아요.”

세실의 말이 맞았다. 늦게 일어난 데다가 계속 나른하기만 해서 과일만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좀 이따가 점심을 먹으면 된다면서 말이다.

“저어, 혹시 모르니까 의원을 불러올까요?”

“의원? 됐어. 체한 것 가지고 무슨 의원을 불러.”

“체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체한 게 아니면?”

라일라의 질문에 세실은 그저 싱긋 미소만 지었다.

* * *

“라일라!”

비오스트는 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거리던 라일라는 그대로 우뚝 멈추어 서 버렸다.

“사실이에요?”

어디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숨차하면서도, 비오스트는 물을 것을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비오스트는 낮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라일라에게 달려갔다. 힘껏 그녀를 안으려던 비오스트는 그녀에게 닿기 직전 멈칫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부드럽게 라일라를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그만하라고 말을 했을 라일라였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눈을 깜박이며 비오스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을 뿐이었다.

“계획대로 잘 되어 가고 있는 거지?”

“계획요? 아, 그래요. 그게 있었죠.”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이 비오스트는 다정한 포옹 중에 제 몸을 떼어 냈다.

“사실, 잊고 있었어요. 그냥 당신이 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달려왔네요. 라일라, 당신은 원래 사랑스러웠지만, 오늘은 더욱더 사랑스럽네요.”

“바보 같긴. 계획을 잊으면 안 되잖아.”

비오스트의 다정한 속삭임을 들은 라일라는 그에게 핀잔을 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라일라의 볼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럼 넌 이제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는 거지?”

라일라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내가 임신을 했으니, 이 사생아를 낳으면, 넌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는 거지?”

“아뇨, 라일라. 틀려요.”

“뭐?”

갑자기 달라진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일라, 난 사생아를 낳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내 아이에게 사생아라는 굴레를 씌울 수 없죠. 나는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뭐?”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예요, 라일라.”

당연한 일이었다. 장차 온라이언의 적통 후계자 자리를 물려줘야 할 아이를 사생아로 낳을 수는 없었다. 비오스트는 당장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라일라를 황태자비로 삼을 생각이었다.

“내가, 너랑?”

“그래요, 라일라.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아이가 정식으로 한 가족이 되는 거예요.”

비오스트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라일라의 손을 끌어다가 그녀의 배에 얹었다. 그리고 그 위로 자신의 손도 얹었다.

참으로 다정한 프러포즈였고, 참으로 자상한 가장과 같은 말투였다.

“가족? 나에게 가족이 생긴다고?”

그리고 평생을 외롭게 자란 라일라에게 완벽한 프러포즈기도 했다. 라일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남자였다.

“비오스트…….”

감격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라일라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이 따뜻하게 녹아내려서, 자신의 안에 있는 아가가 좋다고 웃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미소였다.

“라일라, 웃고 있네요?”

“내가?”

“네. 지금 아주 예쁘게 웃고 있어요. 당신이 웃는 것 처음 봐요.”

“네 덕분이야. 전부 다 네 덕분이야, 비오스트.”

라일라는 와락 비오스트를 껴안았다. 그저 괴롭기만 하던 그녀의 인생에서 따스함이라는 것을, 가족이라는 것을, 미소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것은 전부 비오스트였다.

“아뇨. 나야말로 당신 덕분이죠, 라일라.”

어느새 비오스트의 얼굴에서 미소는 지워지고 없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싸늘함과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안쓰러움이 동시에 비오스트의 눈빛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비오스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생명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두 가지 일이 지금 동시에 라일라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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