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27화 (27/88)

27.

“불행해지는 게 황태자의 운명이라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에요. 다만, 나에게 주어진 운명 중의 하나가 불행한 결혼 생활이라는 거죠. 라일라, 당신은 잘 모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평생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불행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황태자는 라일라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그 다정함에, 그의 배려에 라일라는 그의 불행이 더욱더 안타까웠다.

“라일라, 날 걱정해 준 건가요?”

“걱정하는 게 아니라…….”

습관처럼 부정하려던 라일라는 씁쓸한 미소의 비오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걱정돼.”

“고마워요. 당신의 따뜻한 마음이 그래도 나에게 위로가 되네요.”

비오스트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 다시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그가 포도주 잔을 들고, 포도주를 머금고, 또 그의 목울대가 움직여 포도주를 삼키는 것까지, 라일라는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내 결혼을 고를 수 있다면……”

포도주를 마셔서인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비오스트가 운을 떼었다.

“내가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비오스트는 자신의 잔을 든 채로 물끄러미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생략되었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도 생략되지 않고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연한 표정을 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비오스트를.

라일라는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황태자의 불행한 결혼을 막고 싶었다. 그가 저렇게 슬픈 표정을 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엘리자베스 같은 공작 영애가 아니었다. 그저 변두리의 남작 영애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처지였다.

요리도, 바느질도, 하다못해 책 정리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그를 위해서 할 수는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마녀였다면, 라일라가 진짜 마녀였다면, 그래서 저주를 걸 수 있고, 흑마술을 쓸 수 있다면, 그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진짜 마녀도 아니고, 권력도 없으며, 능력도 없는 라일라는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애틋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다정한 남자를,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

드디어 라일라는 마음을 굳혔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 짓는 비오스트가 앉아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그야, 오늘의 라일라는 뭔가 비장해 보이니까요.”

비오스트는 다정한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라일라의 가슴이 뛰었음은 물론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서 웃어 준 사람.

“널 돕고 싶어.”

그런 사람을 불행의 늪에서 구하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라일라,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날 도와주고 있어요. 도서관이 이제 아주 깨끗하게 되었다고 세실에게 들었어요. 고마워요.”

“그런 것 말고.”

여전히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여자랑 결혼하면 불행할 거야.”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니, 분명해.”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꼭 결혼이라도 해 본 사람 같네요.”

전에 없이 단호한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가벼운 농담 섞인 대답을 했다. 마치 이런 대화를 계속 이어 가기가 싫은 사람처럼.

“나는 날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 봤으니까.”

“…….”

“나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싫어하고, 나를 역겹다는 듯이 쳐다보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살아 봤으니까 알아. 싫어하는 사람과 가족이 된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을.”

“라일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넌…… 좋은 사람이니까.”

그것이 라일라의 최대한의 용기였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고하는 것. 그리고 비오스트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말을 하는 것.

차마 너를 보면 두근댄다고, 그 여자와 결혼하지 말고 지금처럼 이렇게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살면 안 되냐고까지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지금 라일라의 최대의 용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좋겠어요.”

비오스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냐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비오스트를 바라보는 라일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눈빛을 알아차려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미 내 약혼녀예요. 게다가 중소귀족이 아니라 막강한 리모트 공작가의 영애죠.”

“그건 나도 알아.”

힘없는 남작가의 버려진 딸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지 않은 한 파혼은 불가능할 거예요.”

“그 무슨 일이 뭔데?”

“내가 사망한다거나?”

“사망하면 파혼이 아무 소용이 없잖아!”

“절름발이가 된다거나, 시각 장애인이 된다거나, 내가 황제가 되는 데 결격사유가 있다면 리모트가에서 이 약혼을 포기하겠죠.”

“장애인…….”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불행과 신체 일부를 바꾼다는 것은 가히 악마적인 상상력이었지만, 라일라는 기꺼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에게서 악취를 없애 줄 수 있다면, 라일라는 발이든 팔이든 눈이든 뭐든지 다 내어 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자신의 경우였다. 눈앞의 비오스트는 달랐다.

자신과는 달리 비오스트는 아주 잘생긴 남성이었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를 장애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당연히 고통을 수반할 것이 분명했다.

라일라는 될 수 있으면 비오스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예를 든 거예요, 라일라. 그렇게 내 어디를 분지를까 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딱히 부러트리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고, 오로지 내 과실로 인해서 리모트가에서 나와 파혼을 하고 싶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냥 파혼할 수는 없는 거야? 사랑하지 않으니, 파혼한다고 하면?”

“애초에 사랑 없이 한 약혼인데, 사랑이 없다고 파혼을 할 순 없죠.”

과거를 되돌리고 싶다는 듯, 비오스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에서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낸다면, 리모트가에서는 절대로 수긍하지 않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나한테 뭔가 파혼의 사유가 있어야 해요.”

“그럼…….”

라일라는 다시 비오스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저 다정한 황금빛의 눈을 멀게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귀를 한쪽 잘라 내면 될까? 팔을 자르면 너무 불편할 것 같은데? 다리는? 거동이 힘든 건 내가 열심히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라일라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방법은 없어?”

무엇을 하든 비오스트가 너무 아플 것 같았다. 황태자로 귀하게 자란 그는 고통을 잘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의 팔이나 다리라면 하나 정도는 비오스트를 위해서 잘라 내어 줄 수도 있을 텐데.

라일라는 그저 안타까웠다.

“글쎄요. 어쨌든 나한테 흠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엘리자베스가 먼저 파혼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내가 받아들이는 거죠.”

“너한테 흠이 뭐가 있어?”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비오스트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던졌다.

“흠이라……. 흠이라…….”

라일라는 입안에서 ‘흠’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굴렸다. 데굴데굴 혀 안에서 구르는 그 단어는 영 비오스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서 사생아라도 하나 낳아서 와야 하는 건지…….”

라일라의 귀에 비오스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녜요.”

“방금 뭐라고 했잖아.”

“미안해요. 내 혼잣말이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혼잣말을 했냐고.”

“순진한 귀족 아가씨가 들을 말은 아니에요. 나도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보니, 헛소리가 튀어나온 거예요.”

“내 어디가 순진하다는 거야?”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생각에 자신은 순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무식하고 제멋대로에 거친 쪽에 속했다.

그리고 라일라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편이었다.

“난 어엿한 성인이고, 혼자 숲에서 살긴 했지만 알건 다 알아.”

“뭘 아는데요?”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알아.”

라일라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생아라고 했어요.”

작은 한숨과 함께 비오스트는 대답했다.

“사생아?”

그리고 ‘사생아’라는 단어는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 라일라의 모르는 것에 속했다.

“…… 사생아가 뭔데?”

“부부가 낳은 자식이 아닌 혼외자식을 사생아라고 해요.”

비오스트의 친절한 설명에 그제야 라일라의 머릿속 사전에 ‘사생아’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결국 ‘사생아’라는 것은 아기였던 것이었다.

“내가 밖에서 사생아라도 낳아 오면, 엘리자베스가 포기할까? 그런 말을 했어요.”

“네가 사생아를 낳아 오면, 그 여자가 널 포기를 할 거라는 거야?”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엘리자베스라면 후궁 한둘쯤은 둬도 상관없다고 말할 거예요. 그러고도 남죠. 하지만 자기와 결혼도 하기 전에 사생아가 먼저 있다고 하면, 제아무리 엘리자베스라도 펄쩍 뛰겠죠. 심지어 그게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남자아이라면 더더욱요.”

“그래?”

비오스트의 추가 설명을 들은 라일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주 잠시.

“그럼 낳자.”

“네?”

“그 사생아라는 것, 낳자고.”

라일라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툭 던졌다.

사실은 지금 심장이 두근거리고, 비오스트가 거절할까 봐 다리가 덜덜 떨리고, 혹시 그가 자신을 가벼운 여자라고 여길까 봐 손이 달달 떨리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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