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풋!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처음에는 배 속에서부터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이 풋- 그다음에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뭐라고,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뒤는 그야말로 깔깔대며 웃었다.
“마녀가 이렇게 순진하다니! 너는 정말 불꼬챙이를 조심해야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잡혀서 활활 불타 버릴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한참이나 웃고 나서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그렇게 라일라에게 악담을 했다.
“대답이나 해. 비오스트를 사랑하냐고.”
“당연히 아니지, 황태자라는 지위를 빼고도 그분은 충분히 멋지신 분이긴 하지만, 그분이 머리에 똥만 찬 돼지 새끼라도 나는 그분이랑 기꺼이 약혼했을걸?”
대답을 들은 라일라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엘리자베스는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 멍청한 마녀야.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건 황후야. 내가 황후만 될 수 있다면, 만인의 위에서 군림하는, 가장 높은 자리의 여자가 될 수 있다면, 내 옆에 있는 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야.”
“그럼 비오스트는?”
“뭐?”
“넌 그렇게 황후가 돼서 행복하겠지만, 비오스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알 게 뭐야.”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들은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렸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라일라를 보며 비웃었다.
“황태자가 행복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냐고.”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라일라는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 * *
“오늘은 식사가 별로인가요?”
포크로 괜히 샐러드를 괴롭히고 있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가 물었다. 그 말에 라일라가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오스트가 보였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아까부터 잘 먹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요?”
“그냥, 이것저것.”
비오스트의 질문에 라일라는 모호하게 대답하며 다시 샐러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라일라.”
그런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는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힘없고, 슬프게 들렸다.
“혹시, 내가 괜한 짓을 했을까요?”
“뭐?”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요. 난 당신을 혼자 둘 수 없어서 내 집으로 데려온 건데, 라일라가 여기서 입맛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이 외롭다면,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해서요. 혹시, 여기 생활이 당신과 맞지 않는다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라일라가 이곳에 온 지 이제 보름 남짓 지난 뒤였다. 여기서 라일라는 더할 수 없이 행복했다.
모든 것은 풍족했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모두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 특히나 비오스트는 라일라가 이제껏 받아 본 적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라일라는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내가 불편하다면 세실을 불러다 줄까요?”
“세실을?”
“나한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세실과 의논해 봐요. 뭔지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같은 여자인 세실과 더 이야기하기 편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을 하며 비오스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질하던 스테이크도, 들고 있던 나이프와 칼도 내려놓고서 말이다.
“아직 밥 다 안 먹은 것 아니야?”
“라일라가 밥을 못 먹는데, 내가 어떻게 식사를 하겠어요.”
“아니야. 먹을게. 앉아.”
사실 이제껏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라일라는 비오스트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좋아했다.
세실이 한 말이 맞았다. 혼자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것이 훨씬 더 음식이 맛있었고,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것 역시 비오스트가 알려 준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라일라는 평생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경험을 해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아니에요. 마음이 편해져야 밥을 먹죠. 꾸역꾸역 밀어 넣다간 체할 거예요. 나한테 이야기를 해 주면 더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란다면 내 욕심이겠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아직, 나는 불편한 거죠?”
“부, 불편한 건 아니지만…….”
“아직, 나와는 거리감이 있는 거죠?”
“그런 게 아니라…….”
“역시 내가 라일라를 억지로 황궁에 데려온 게…….”
“억지로가 아니야! 난 여기가 좋아!”
자꾸만 자신의 탓을 하는 비오스트를 향해서, 결국 라일라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야 말았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건…….”
운을 떼고 나서도 라일라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비오스트는 괜찮다는 듯, 다정한 미소로 라일라를 격려했다.
“네 약혼녀를 만났어.”
“엘리자베스를요?”
비오스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엘리자베스의 이름에 라일라는 갑자기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며칠째, 라일라는 그 이름을 떠올리면 입맛이 없어졌다. 며칠 밤을 라일라가 잠 못 이루게 했던 이름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주 혹시 어쩌면,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헛된 망상이라고, 비오스트를 좋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약혼녀라는 말에 바로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대는 비오스트를 보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엘리자베스를 어떻게 만났어요?”
“도서관에 찾아왔었어.”
“엘리자베스가요? 저……. 혹시, 그녀가 무슨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가 조금 이해해 주기 바라요. 엘리자베스는, 그러니까 그녀는…… 조금 직설적인 데가 있어서요.”
그저 직설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라일라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라일라가 하는 걸 보니 그렇게 고운 말은 아니었을 것 같네요.”
하릴없이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제 약혼녀라고 편을 드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너는…….”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라일라가 말했다.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녀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듣고 있어요, 라일라.”
비오스트의 말에 어쩐지 라일라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을 이렇게 배려해 주는 사람인데,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그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여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고자질하는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라일라는 결국 그렇게 털어놓고 말았다.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서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에 아무도 상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라일라였으니까, 남의 일에 상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며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비오스트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멍청하고 나쁜 짓을 좀 저지르는 것이 나았다.
라일라의 말을 들은 비오스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라일라는 어쩌면 비오스트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약혼녀를 흉보는 것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금 비오스트는 화가 났고, 라일라에게 당장 숲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할지도 몰랐다.
“너는…….”
그래도 라일라는 물어야 했다.
이 안락한 곳에서 쫓겨나 평생 숲속에서 혼자 사는 일이 있더라도, 평생 냄새가 난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만을 만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비오스트가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여자를 사랑해??”
그렇게 질문하며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라일라의 눈에 비친 것은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비오스트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비오스트였다.
비오스트의 표정에서 라일라는 모든 것을 읽어 냈다. 비오스트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도 그 애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구나?”
아직도 슬픈 미소를 띠고 있는 비오스트를 향해서 라일라는 재차 물었다. 거의 확신에 찬 말이었지만, 그래도 확인을 하고 싶었다.
“너희 둘 다 변태야? 왜 좋아하지도 않는데 결혼을 한다는 거야?”
“말을 하자면 길어요.”
천천히 비오스트가 입을 뗐다.
“내가 왜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하는 것인지를 전부 설명하려면, 일단 우리 온라이언 제국의 정치, 외교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현재 리모트 공작가의 위치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고, 또 리모트 공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겠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작가와 후작가의 대립, 그중에서 중립인 귀족 가문. 그 가운데에 있는 황실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래요. 어려운 이야기죠. 하지만 전부 생략하고 이야기를 하자면, 네. 그렇습니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될 겁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비오스트는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작은 한숨. 그의 한숨 소리가 그의 고뇌인 것만 같아서 라일라의 작은 가슴이 또 아파 왔다. 항상 밝은 얼굴의 비오스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라일라에게는 괴로움이었다.
“그런 애랑 결혼한다면 넌 불행하게 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자신이 불행해진다는데, 왜 그렇게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 거지?”
“제가 황태자니까요. 세상에는 태어난 순간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사람도 있답니다.”
비오스트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옆에 있던 포도주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붉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태어나면서 자신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순간,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고, 또 이제 황제가 될 터였다.
라일라를 꿀꺽, 잡아먹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