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흘간의 마차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마차가 멈추었을 때, 라일라는 눈을 깜박이며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비오스트가 라일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 바깥을 살피고만 있을 뿐이었다.
“라일라. 이제 내리지 않겠어요?”
“여기가…… 어디야?”
여전히 엉덩이를 마차에 딱 붙이고서 라일라가 물었다. 다 와 간다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커다란 성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라일라의 표정이 굳었고, 마차가 그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표정이 굳어 버린 그녀였다.
커다란 성문을 지나고, 오가는 많은 사람과 병사들이 보이고, 생전 처음 보는 높은 건물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라일라의 얼굴에는 더욱 초조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라일라가 보았던 그 거대한 성안으로 들어섰고, 그 앞에서 서 버린 것이었다.
“저의 집이죠. 그리고 앞으로는 당신의 집도 될 거고요.”
별것 아니라는 말을 하는 비오스트를 더욱 노려보는 라일라였다.
“너 정체가 뭐야?”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안 했어.”
마치 난 말한 것 같은데? 라는 태도의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더욱 톡 쏘아붙였다.
그저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남작의 손님 정도가 되려면 그건 당연했다.
어쩌면 아리아드네의 남편감 후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성질 나쁜 아리아드네의 남편이 되기에는 이 착한 남자가 가엾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런 규모의 성이 집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냥 귀족은 아니었다.
“여기 어디냐고!”
당장이라도 다시 엄지손톱을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으로 라일라가 물었다.
“여기는 황궁입니다.”
“뭐?”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의 눈이 커졌다. 입도 벌어졌다.
그야 남작의 저택 외에는 귀족의 집을 본 적이 없는 라일라였다. 이렇게 크다니 엄청나게 높은 귀족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맹세코 라일라가 생각한 규모는 황궁까지 넘본 적은 없었다.
“화, 화, 황궁?”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그가 당황한 것은 그 뒤였다.
라일라가 마침내 엉덩이를 떼는 것을 보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로 문을 닫아 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서 말이다.
“라일라?”
“손 치워!”
재빨리 손으로 문을 붙잡은 비오스트를 노려보며 라일라가 말했다.
“난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어째서요? 나와 함께 지내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당분간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당장 갈 곳이 없으니까!”
“그래도 당분간이라도 좋으니 일단 내려서……”
“거기가 황궁이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승낙한 거였어!”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제 불찰이긴 하지만, 황궁이라고 뭐가 달라지는 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여기가 황궁이라며! 나는 마녀라고! 마녀가 황궁에 들어왔다가는 어떻게 될 거 같아? 게다가 나는 악취가 나서 내가 마녀라는 사실을 숨길 수도 없다고! 나는 당장에 들켜서 붙잡힐 거야. 그러고 나서 틀림없이 화형을 당하게 되겠지. 보름달이 뜬 밤에 높게 쌓인 장작더미 위에서 높은 장대에 묶인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타오르게 될 거라고!”
“그럴 일 없어요.”
“분명히 그래. 마녀의 최후는 결국 그렇게 끝장나게 되어 있어.”
“첫 번째, 당신은 마녀가 아니고. 두 번째, 황궁에는 그런 화형장이 없어요. 세 번째, 내가 결코 라일라의 최후가 그렇게 끝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네가 뭔데!”
다시 힘주어 문을 닫으려는 라일라 때문에 비오스트의 손이 마차의 문에 끼일 뻔했다. 비오스트가 더 힘이 세었으니 망정이지, 필사적인 라일라의 태도는 비오스트의 손가락이 잘리더라도 당장에 마차의 문을 닫을 기세였다.
“네가 황제라도 돼?”
“물론, 제가 황제는 아니죠.”
“그럼 당장 그 멍청한 손을 치워.”
“하지만 그다음 정도는 됩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느라 라일라의 손에 힘이 빠졌을 때를 노려 비오스트는 힘주어 마차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엉겁결에 마차의 문손잡이에 손을 걸고 있던 라일라도 문을 따라서 앞으로 몸이 쏠렸다.
그대로 뒀으면 마차에서 굴러떨어질 라일라였지만, 비오스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받아 내었다. 조그마한 라일라는 그대로 답삭 비오스트의 품에 안기었다.
“제가 황위 계승 서열 1위. 비오스트 블랙 드 온라이언 황태자이니까요.”
“……뭐?”
비오스트는 새삼스럽게 제 소개를 하며 품에 안긴 라일라를 내려다보았다. 놀란 표정의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황궁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라일라 비올렛 드 발렌시아 남작 영애.”
그리고 라일라는 갑작스러운 정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저를 안고 있는 비오스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 황태자?”
“그래요.”
“네가 황태자라고?”
“맞아요.”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가볍게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필사적으로 황궁의 땅을 밟지 않으려던 라일라는 얼떨결에 그 땅을 밟고야 말았다.
“여긴 내 집이고, 내 영역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도 당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나의 레이디.”
비오스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라일라는 잠시 뒤에 알게 되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라일라 아가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라일라는 방금 인사를 한 여자를 잔뜩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웬만한 남자만큼이나 훌쩍 큰 키 덕분에, 라일라는 고개를 꺾어 올려서 그녀를 바라봐야 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는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20대로 보였지만, 입고 있는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은 40대의 중년부인과 같아서 쉽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잔뜩 경계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일라를 향해서 여자는 방긋 웃었다.
“앞으로 라일라의 편의를 돌봐 줄 세실이에요. 뭐든지 불편한 것이 있으면 세실에게 이야기하면 될 거예요.”
잔뜩 움츠러든 라일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비오스트가 말했다.
“내가 방까지 안내해 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가 황궁을 오래 비웠다 보니 할 일이 지금 좀 많아서요. 세실과 함께 먼저 방으로 가겠어요?”
“뭐? 나더러 저 여자를 따라가라는 거야?”
“저 여자가 아니라 세실이라고 부르면, 세실도 더 좋아할 거예요. 그렇죠, 세실?”
“네, 황태자 전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넌 간다는 거야?”
불안하게 또각거리며 손톱을 튕기고 있던 라일라의 엄지와 검지가 비오스트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는 아이와 같은 제스처에 비오스트는 빙그레 웃었다.
“미안해요, 라일라. 지금은 가야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을 빨리 끝낸다면 저녁은 아마도 같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떼를 쓰는 것 같다는 걸 아는지, 라일라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불안한 눈동자를 굴려 옆에 있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눈초리가 조금 더 움직여 낯선 정원을, 낯선 성을, 그리고 낯선 공간을 바라보았다.
라일라의 세상은 태어나서 약 10년간은 낡은 헛간이 다였고, 그 후의 약 10년간은 숲의 오두막이 전부였다.
갑자기 오게 된 새로운 곳은 낯설다 못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곳이 이렇게 커다랗고 웅장한 성이라니, 당연히 두려웠다.
여기서 라일라가 아는 사람은, 그리고 라일라가 기댈 사람은 오직 비오스트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죠?”
물론, 그 사실을 비오스트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정한 말을 속삭이자, 어쩔 수 없이 라일라는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착하다는 듯, 비오스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평소라면 당연히 인상을 찌푸렸을 라일라가 얌전히 있었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
세실이 재촉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라일라는 머뭇거리며 비오스트의 뒷모습을 보느라 잠시 더 정원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이 아주 작아져서 누군지 잘 모를 정도가 되고 나서야 라일라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가실까요?”
진득하게 라일라를 기다려 준 세실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라일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커다란 성의 입구를 지나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방입니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세실이 방문 앞에 섰다. 라일라 키의 두 배는 훌쩍 넘을 커다란 고동색의 나무문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
조금 주저하던 라일라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의 틈새로 환한 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 그리고 활짝 문이 열리고 나서 라일라는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이게…… 내 방이라고?”
“네, 황태자궁에서는 조금 작은 방이긴 하지만, 볕이 잘 들고…….”
“이게 작다고?”
방이 작아서 그런 것인가 싶어서 조금 설명을 덧붙이려던 세실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라일라의 놀란 목소리였다.
예전에 살던 오두막이 통째로 세 개쯤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방이었다. 방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침대는 오두막에 있던 것에 비해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였고, 세 배는 푹신해 보였다.
옷장은 문의 아귀가 맞지 않아 반쯤 문이 열린 상태도 아니었고, 테이블은 네모반듯해 보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화장대에 놓인 거울은 화려한 세공까지 새겨진 커다란 것이었다.
“이게 정말…… 내가 지낼 방이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 현실같이 않아서, 라일라는 늘 그랬듯이 일단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