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21화 (21/88)

21.

숲의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수리가 구해 온 마차가 보였다. 아주 평범한 마차였다. 황실 마차에 비하자면 볼품이 없었지만, 그럭저럭 귀족의 품위를 간신히 지키는 정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것마저도 잔뜩 경계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귀족이었군.”

중얼거리는 라일라의 작은 목소리에 비오스트가 슬쩍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오셨군요.”

저쪽의 다른 마차에 있던 수리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의 시종이 아니라 이 마차에 어울리는 검소한 시종으로 보일 법한 복장으로 어느새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약삭빠른 녀석이라는 생각과 그래서 쓸모 있는 시종이라는 생각이 비오스트의 머릿속에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수리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일라 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만 숨을 쉬는지, 살짝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는 수리를 라일라가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뒤로 물러섰다. 비오스트의 뒤편으로.

“듣던 대로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

힐끗, 라일라의 시선이 다시 수리를 향했지만 별말은 없었다. 비오스트가 슬쩍 턱짓하자 그는 재빠르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의 외견만큼이나 평범한 마차의 내부였다. 그나마 괜찮은 점이라면 말끔하게 청소를 끝낸 뒤였다는 것이다.

“타실까요?”

비오스트는 능숙하게 손을 내밀어 라일라를 에스코트했다. 조심조심 마차에 오르는 라일라의 뒤편으로 수리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비오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방긋 웃었다.

“도련님, 저는 뒤쪽의 마차를 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존댓말에 수리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지만,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라일라에게 보이는 사태는 면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비오스트가 마차에 오르고, 얼굴을 가린 채 수리가 문을 닫자 곧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움직이자 움츠리고 있던 라일라의 어깨가 더욱 경직되었다. 상황을 살피는 쥐새끼 같은 눈이 연신 불안하게 마차의 이곳저곳을 쳐다보고, 바깥까지 쳐다보았다.

물론 비오스트는 맞은편에서 그런 라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고, 제법 빠르게 바깥의 풍경들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점점 잔뜩 긴장해 있던 라일라의 어깨도 천천히 내려왔다.

대신 마차 안을 두리번거리던 눈은 창밖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천천히 반짝이면서.

“마차는 처음인가요?”

“응.”

여전히 창밖만을 쳐다보며 라일라가 대답했다. 살짝 엉덩이가 자리에서 떴다가 다시 붙었다.

초록의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라일라가 살던, 바로 그 숲이었다. 라일라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비오스트가 모른 척 창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창가에 찰싹 매달려 버린 라일라였다.

“숲이 저렇게 컸구나.”

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제멋대로 흩날리도록 내버려 두며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으며 비오스트는 이전에 보았던 지도를 떠올렸다.

이전에 비 때문에 길을 잃어 라일라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숲을 가로지르는 데 꼬박 3시간 정도가 걸린 것이 생각났다. 지금은 마차니, 더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 마차는 출발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숲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 숲을 3시간쯤 더 볼 텐데요.”

“3시간이나?”

깜짝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라일라의 모습이 토끼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비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어떨 때는 쥐, 어떨 때는 고양이, 또 어떨 때는 토끼라니. 어째서 이 여자는 사람으로 보이는 적이 없단 말인가?

“왜 웃어?”

“오해는 말아요. 비웃는 건 아니니까. 그저 마차를 타고 3시간을 간다는 거에 놀라는 것 같아서요. 이 숲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응.”

“숲을 나온 적 없어요?”

“……응.”

조금은 풀 죽은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밖을 쳐다보았다.

마차를 타는 것도, 이렇게 멀리 나가는 것도 전부 처음인 듯, 그녀는 두려우면서도 설레어 보였다.

그런 라일라에게 다른 ‘처음’을 선물하면 어떻게 변할지 비오스트는 은근히 궁금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산노루처럼 귀를 쫑긋거릴지도 몰랐다. 사람의 귀가 쫑긋거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도시락을 먹을래요?”

“도시락?”

“슬슬 점심때니까요.”

비오스트는 마차의 한쪽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도시락을 넣어 두었다는 언급 따위는 없었지만, 황궁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출발하자마자 마을에 멈춰 서서 점심을 먹을 리는 없으니, 눈치 빠른 시종인 수리가 도시락을 넣어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덮개를 열자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다.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의 말에 그제야 라일라는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 이후 자신의 입에 넣은 것은 그 독버섯밖에 없었다.

비오스트가 건넨 샌드위치를 살펴보다가 한껏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일라에게 줄 우유병을 열고 있는 그를.

“먼저 먹어 봐.”

“왜요?”

“…….”

묵비권을 행사하는 라일라는 보며 비오스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 라일라가 도로 건넨 그 샌드위치의 종이를 벗기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아삭한 채소와 얇게 썬 돼지고기가 빵과 썩 어울렸다. 맛있다는 듯 비오스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라일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먹으라는 듯, 새것을 라일라에게 내밀자 그제야 라일라가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종이를 벗겨 내고 비오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크게 샌드위치를 한입 깨문 라일라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왜 그래요?”

비오스트의 물음에 라일라는 그저 열심히 씹을 뿐이었다. 입안에 가득 차 있던 샌드위치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고 나서야 라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거 뭐야?”

“샌드위치인 것 같은데요.”

“샌드위치? 샌드위치라는 음식이구나.”

신기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일라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것도 처음?”

“응? 아, 이런 맛있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비오스트의 질문은 샌드위치가 처음이냐는 것이었는데, 라일라에게서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비오스트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먹어 보았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샌드위치 맛이었다. 굳이 특징을 꼽자면 채소가 싱싱하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라일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은 감탄 어린 탄성까지 작게 내뱉으며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요. 우유도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보다 조금 느리게 입을 오물거리는 라일라였지만,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입은 아까와 비교해서 결코 작지 않았다.

“엇!”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라일라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뭐라도 있어요?”

슬쩍 비오스트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오롯하게 서 있는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비오스트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일라가 보였다. 작고 마른 손도 어느새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서로 꽉 맞물리도록 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뭘 기도했어요?”

떨리던 속눈썹이 열리자 비오스트가 물었다.

“말하기 싫어.”

팩 하고 돌린 얼굴이 이제는 창문의 끄트머리에 걸린 신전을 응시했다. 자신의 소원을 몇 번이고 부탁한다는 듯이.

“신을 믿는지는 몰랐네요.”

“왜? 마녀라서?”

“아뇨. 자살하려고 했으니까요.”

자살이라는 단어에 라일라의 손이 움찔했다.

“그 버섯이 뭔지 알았던 거야?”

“사냥하러 숲에 가게 되면 당부받는 흔한 독초와 독버섯 중에 하나니까요.”

별것 아니라는 듯 흘려 말하는 비오스트였지만, 그 말을 들은 라일라는 난처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곧이어 버릇처럼 손가락을 입가로 가지고 갔다.

“이런, 또 물어뜯을 거예요?”

어느새 다가온 비오스트의 손이 라일라의 손을 붙들었다.

“예쁜 손에 또 상처가 나면 어쩌려고요.”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가 비오스트의 얼굴에 어리었다. 라일라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

“어떤 이야기요?”

“나보고 예쁘다느니, 귀엽다느니 하는 이야기.”

“그야 당신이 정말로 예쁘고, 귀여우니까요.”

웃는 비오스트의 미소를 라일라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미소 아래에 깔린 진짜가 무엇인지 보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쉽게도 비오스트는 그렇게 쉽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넌 뭔가 꿍꿍이가 있어.”

툭 내뱉는 라일라의 말에도 그의 미소는 철벽과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잘해 줄 리가 없잖아.”

라일라는 비오스트가 잡고 있던 제 손을 재빨리 빼내서 제 몸 뒤에 감추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에게서 제 손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라일라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제 몸뚱이는 그대로 비오스트의 앞에 무방비하게 내던져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얼굴을 반만 가리고 경계를 하면 상대방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데요?”

상냥하게, 혹은 느른한 목소리로 묻는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의 눈빛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날 팔아넘길 셈이겠지. 나는 예쁘지도 않고, 비쩍 말랐으니 사창가 같은 곳은 아니겠지만. 게다가 나는 냄새도 나서 일도 못 할 테니까, 틀림없이 마녀 연구소 같은 데일 거야.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저주를 내리는 마녀한테 데려가겠지. 그 마녀가 저주를 내리려면 살아 있는 인간의 간을 가지고 오라고 했겠지. 그래, 맞아. 그거지? 날 데려가서 내 간을 악마에게 바치려는 속셈인 거야. 그걸 이상한 마법진이나 소환진에 놓고 주술을 부리겠지. 그리고 세계를 정복하겠느니 하는 멍청한 소원이나 빌겠지.”

“흠…….”

이제껏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한데 섞은 라일라의 얄팍한 상상력에 비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도 참 흥미롭긴 하네요.”

“역시!”

라일라는 재빨리 비오스트에게서 떨어져 마차의 한쪽 구석으로 제 몸을 구겨 넣었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덤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 소망은 세계 정복은 아니라서 말이죠.”

비오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거짓말!”

“세계를 굳이 정복해서 뭘 하겠어요? 넓은 땅을 관리하느라 머리 아프기만 하지.”

“하, 하지만……!”

“날 믿어요, 라일라.”

비오스트는 천천히 라일라에게 다가갔다. 아주 조금씩, 그녀가 비오스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당신은 아름다워요.”

비오스트의 손이 천천히 자신을 향해서 뻗어 오자, 라일라는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요.”

뻗은 손은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의 아래에 제 손을 넣어 슬쩍 끌어내자, 아주 얕은 반항이 있긴 했지만 결국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어서 따라왔다.

“라일라, 당신은 아름다워요.”

라일라의 손등에 아주 살짝, 비오스트의 입술이 닿았다.

마치 아주 고귀하고, 순결한 키스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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